샬롬 나눔 Ger Han 선교사의 글을 기고받아 나눕니다. 샬롬 복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는 샬롬이 있고, 그 샬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한 복음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글은 샬롬의 한 측면인 친밀감에 주목하여 다룬 첫 번째 글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친밀감(‘주기도’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기도
개신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 중 하나가 기도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의 행위는 어떤 것보다 초월적인 하나님과 친밀감을 누릴 수 가장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 안에 나름대로의 기도 행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는 하루에 다섯 번씩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를 향해 자신들이 믿는 신 ‘알라’에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일년의 한 달을 라마단 명절을 지키며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성전을 향해 기도했던 다니엘의 모습을 떠오릅니다(단 6:10).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그들의 기도의 모습이 가끔은 아주 정숙 하며 경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들 역시 ‘알라’와 가까워 지기 위해 기도를 하며 금식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바로, 초월적인 신과 인간의 관계가 그 차이입니다. 이슬람은 ‘이신론(Deism)’을 바탕으로 한 구원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슬렘’들이 섬기는 ‘알라’는 홀로 하늘에 있는 신으로 결코 이 타락한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슬렘’은 오직 인간의 자력으로 ‘알라’에게 가까이 감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타락한 이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똑같이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한낱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서 우리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늘 그 관계를 위해 노력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는 쉽게 발견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함이셨습니다. 얼마전부터 우리 가정은 하루에 한 번은 ‘주기도’로 식사기도를 합니다. 5절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기도문이지만 그 기도를 읊조를 때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짧은 기도문 안에 ‘우리의 일용한 양식’까지도 챙기시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의 배려를 느끼며 감사와 찬양을 하게 됩니다.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는 기도라 생각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깊고도 큰 마음을 담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짧은 기도의 의미를 차근 차근 살펴보려 합니다.
본론에 앞서, 많은 신약 학자들은 ‘주기도’를 ‘청원’이라 말합니다. 청원이란 사전적 의미로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저는 누군가에게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을 요구할 때가 많아서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었습니다. 어느 정도 공감되고 동의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말하라고 알려주신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알려주신 이유는 우리의 필요를 요청할때 더 친밀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친밀함은 다시 나로 하여금 내 필요를 듣는 상대방의 필요가 무엇인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주기도'에 나타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그 기도의 결과가 어떠할지 생각해봅시다.
2.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 아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a)
‘주기도’를 열면서 첫번째 만나는 단어는 다름이 아니라 아람어 ‘아빠’입니다. 마태복음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도 그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직역하면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아빠(아버지)’는 아람어 ‘아바’로 당시 어른들이 그들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한국인들의 일상 표현대로라면 ‘아빠’보다는 ‘아버지’가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을수도 있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어른이 된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친근하게 불렀던 표현법이며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용하던 호칭입니다. 중동지역의 아랍어 역시 ’아버지’’ 아버지’는 ‘아브’ 입니다. 여기 ‘아브(아버지)’에서 아들의 이름을 넣어서 부르면 성인 남자에 대한 존경과 높임의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부 무함마드’라고 하면 “무함마드 아버지”의 의미가 갖는데 아랍 성인 남성에게 그의 아들의 이름을 넣어서 불러주면 아주 기뻐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더욱 친근하게 대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만나면 꼭 아들이나 딸의 이름을 물어보고 그 이름을 넣어서 '아부 누구'하고 부르며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이처럼 아람어와 비슷한 아랍어 ‘아브’ 역시 오랫동안 아랍지역에서 아주 흔한 표현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바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에서는 흔하지 않은 아주 독특한 표현법입니다(롬 8:15-16; 갈 4:6). 히브리적 사고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사회에서 사용되던 아람어 ‘아바’를 여호와 하나님의 호칭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당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친근하게 부를때 썼던 표현법을 여호와 하나님께 사용했다는 것은 신성모독과 같기 때문입니다. ‘탈굼 성경’이나 외경 및 랍비문헌에서는 가끔씩 하나님을 아람어 ‘아바’라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예. 마카비3서 6:4, 솔로몬의 지혜 2:16 등). 하지만, 아람어로 쓰여진 구약본문(예: 다니엘, 에스라 등)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구약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아버지(Abinu)’로 호칭된 구절 역시 12번 사용되었을 정도로 특별한 호칭입니다(신현우). 이 호칭은 두 형태로 나뉘게 되는데 몇 구절에서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희 아버지”라며 언급한 호칭입니다(삼하 7:14; 대상 17:13; 22:10; 말1:6).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시편 68:5(‘고아의 아버지’)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과 일반적인 개인관계에서 사용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또는 왕)의 관계에서만 ‘아버지’로 호칭되었습니다(신 32:6; 사 63:16; 사 64:8; 렘 31:9; 시 89:26; 말 2:10). 이 본문 들을 살펴보면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것을 얼마나 조심스러워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일상어인 아람어로 ‘아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발언은 이스라엘에게서 혁명적인 표현법이었습니다.
아람어로 가르쳐 주심
그럼에도 아람어 ‘아바’로 시작한 ‘주기도’는 성경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를 이스라엘의 종교적 언어인 히브리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인 ‘아람어’로 기도하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기도에 있어서 일상어인 아람어보다 히브리어로 기도하는데 익숙하였습니다. 그들은 늘 히브리어로 된 시편이나 유대 회당에서 설교 끝에 낭송한 ‘카다쉬’ 기도 그리고 하루 세 번씩(아침, 오후, 저녁) ‘18번 축복 기도’를 드렸습니다(김세윤). 또한, 그들에게서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지금까지도 아주 신성한 언어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아람어’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겐 분명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 ‘히브리어’ 구사가 가능한 유대인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중동에는 인쇄기술이 없어 서기관들의 필사에 의존하고 구전으로 성경이 전해졌습니다. 이 때는 종교지도자들 이외에는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은 아주 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알려주기에 앞서 “이방인처럼 의미 없는 말로 기도하지 말라(마 6:7)”고 하신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풀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글도 모르고 의미도 모른 체 누군가가 가르쳐준 대로 외우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분명 그들은 구약 성경을 스스로 읽지 못하고, 의미 또한 모르니 랍비나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들이 알려주는 대로 믿고 따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이슬람 사회에서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은 오직 아랍어 ‘꾸란’만 경전으로 인정합니다. 문제는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많은 아랍인들조차 ‘꾸란’을 읽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주 소수라는 것입니다. 각 나라마다 독특한 아랍어 방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글을 읽는다해도 1,300년 전 문체로 쓰여진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100년 전 모국어로 쓰여진 신문과 책을 읽을때 그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그것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저는 최근 2년 넘게 버스와 택시를 탈 때 마다 ‘꾸란’을 들으며 따라 읽는 많은 ‘모슬렘 운전사와 승객’들에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집 앞에서 꾸란을 읽는 ‘모슬렘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 ‘꾸란’의 의미를 알고 싶었습니다. 대부분 그들의 답변은 “알라는 위대하다!” 였습니다. 모두가 같은 답을 해서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90%이상이 본문의 의미를 모른체 듣고 따라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아랍 교회에서도 이슬람교와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콥트 정교회는 물론이고 많은 복음주의 교회 조차도 ‘표준 아랍어 성경’만 인정하고 각 지역 아랍어로 번역된 성경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아랍인 기독교인은 지역 아랍어로 성경을 번역했다가 교단과 교회로부터 제재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은연 중에 교회안에서도 오랜시간 내려온 표준 아랍어 성경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준 아랍어를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도 스스로 읽지 못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조차 언어의 종교적 신성시함으로 일상의 언어로 바꾸지 못하는데 2,000년 전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이라며 신성한 히브리어가 아닌 일상언어인 아람어로 바꾸신 것을 보고 들은 수 많은 유대인들은 얼마나 당황 했겠습니까. 즉, 현대에서 조차 하지 못한 이 혁명적인 일을 2,000년 전에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바로, 기도를 통해 인간과 친밀감을 누리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그 벽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그분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아람어’를 통해 이스라엘의 일상에 의미있는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구약성경의 ‘알다(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 같습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가 의미하는 ‘경험되어져 알다’는 서로의 깊은 일상이 공유된 ‘친밀감’ 을 상상케 합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들의 일상으로 들어가서 너의 삶을 경험하고 너와 교제 할테니 너희도 나의 일상에 와서 나를 경험하고 교제하자!”라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그렇다면, 이젠 우리는 그분의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야만 합니다.
3.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함
“진정한 친밀감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b-10)
이 본문에서는 세 가지의 청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함’, ‘하나님 나라가 임함’, ‘하나님의 뜻을 이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이 세가지의 청원을 구하며 우리의 삶 가운데 구현될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함”
여기서 ‘거룩’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거룩’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은 그분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개념입니다. 피조물과 다른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거룩’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에스겔 36:16-23에 보면 고대 이스라엘이 피를 흘리고 우상을 숭배하여 땅이 더럽혀 져서 이방 민족이 보기에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졌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무섭고 떨리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흩으시고 심판하심으로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찾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바’이신 사랑의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거룩한 하나님과 어떻게 친밀감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더욱 친밀감을 누리기위해서는 ‘거룩’의 초월성 앞에 우리는 ‘경외함’이 함께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그 경외함이 기초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신을 벗고 두려워했던 모세를 연상해 보시길 바랍니다(출 3:1-6).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 앞에 죽을것 처럼 떨었던 선지자 이사야를 연상해 보시길 바랍니다(사 6장). 어느 누구든지 거룩한 그분을 마주하게 된다면 동일한 행동을 취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향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된 친밀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하게’ 대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거나 하나님을 경망스럽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늘에 계신’분이시며 ‘거룩한’ 분이십니다. 몇 달 전에 한국의 한 목사가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고 말을 해서 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큰 문제가 된적이 있었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그때 그 목사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나타낸것이라 해명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경외함’에 기초한 사랑이 있었다면 그러한 발언이 가능했을지 의문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이야기 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친구같이 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친근감 역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없이는 해서는 안될 말과 행동입니다. 로마서 1:18-32에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는 인간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인간 죄악의 시작이 ‘경외함’의 결여에서 나온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함”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친밀감을 누리는 사람은 자연스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제 자리를 찾는 나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시키고 이방에 흩어져 사는 유대 민족을 모아 다윗 때와 같은 강성한 이스라엘로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로서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번영을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정치적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기독교가 힘을 가짐으로 국가 정책에 영향을 많은 영향을 미침으로 기독교 국가의 모습을 갖추는 것, 수 많은 교회가 세워짐으로 기독교인 비율이 다른 종교보다 높아지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번영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변화가 '하나님의 거룩함’이 아닙니다. 앞서 선지자 에스겔이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이스라엘의 ‘심판’으로 회복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답은 ‘주기도’가 들어있는 산상수훈 말씀(마 5-7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4:23).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방인들과 함께 가르치셨습니다(마 4:25). 하나님 나라에서의 관계가 이스라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를 포함 시킴으로 혈통의 오해를 허무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산상수훈의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생명(마 5:21-26, 27-32, 38-42)’에 대한 말씀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마 6:1-4; 7:1-6).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 그리고 나의 이웃과 연관되어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하나님 나라 설교는 ‘주기도’ 전후로 인간의 생명과 이웃사랑 더 나아가 원수사랑(5:43-48)까지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는 나라는 생명이 존중되고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 함께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이 초월된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마 7:13-14). 즉, 이것들이 배제된 관계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절대 누릴 수 없습니다. 생명을 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고 미워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생명이 존중되고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그러한 간구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하나님의 뜻을 이룸”
‘이웃 사랑’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웃사랑'이 율법을 이룬것이라고 말합니다(롬 13:8-10). 그래서 우리는 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갈망합니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의 저자 케네스 E. 베일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안녕(安寧)’하기를 원하는 바람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안녕’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시작된다 말합니다. ‘안녕’은 샬롬을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샬롬’이 이 땅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샬롬’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청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주기도’로 말씀하신 진정한 친밀감은 아주 넓은 의미를 갖게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샬롬’, 나와 이웃들 사이의 ‘샬롬’. 이 모든 것이 포함된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친밀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4. 결론: 우리에겐 ‘샬롬’의 선물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1-13)”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친밀감은 결국 우리에게 ‘샬롬’을 선물로 줍니다. 바로 ‘일용한 양식’과 ‘죄 용서 받음’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아 악에서 구원받음’입니다구원 받음’입니다. ‘사랑’과 ‘경외’가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풍요로운 양식’과 더불어 ‘죄용서 받음’ 그리고 ‘구원을 선물받게 됨’으로 ‘샬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인간과 친밀감을 이루길 원하셨던 이유는 우리의 필요와 더불어 죄 용서 그리고 구원을 주시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최종 목적은 구원받은 자의 ‘샬롬’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샬롬’이 이땅에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누리는 ‘샬롬’은 오직 구원 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 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매일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 가까워지기 위해 일방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불안한 삶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어려운 지침들을 의미도 모른체 매일 힘겹게 따라 살아야만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심으로, 함께 걷고 주무시며, 그 삶과 죽으심으로 그 모든 종교적 불안을 없애주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친근하게 손을 내밀어 주심으로 그분을 믿는 모든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구원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분께 합당한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과 ‘아빠’라 부르는 친밀감 속에서 함께 ‘샬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샬롬’은 아버지께만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이다(아멘)”
참고서적
주기도문 강해(김세윤)
누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신현우)
어떻게 기도할까?(R.C. 스프로울)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케네스 E. 베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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