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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

고대 히브리인의 우주 개념과 우리의 신앙

by 샬롬보금자리 2020. 6. 3.

창조복음: 창조가 복음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연발하신 창조는 하나님이 태초에 시작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창조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그 절정으로서의 인간을 향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이 복음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이 창조복음을 논의하는데 바탕이 되는 이해에 관한 글을 찾다가 "고대 히브리인의 우주개념"이라는 글을 발견하고 참고가 될 듯하여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이런 견해를 이해함을 통해 창조 기사가 우주적인 사건을 묘사하려는 것이었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만큼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로서의 여부를 가르려는 시도는 자연스럽지만, 창조 기사가 담고 있는 내용을 기록하는 이들의 한계를 오늘날 우리의 한계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바를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Heiser, M. S. (2012, 2016). The Old Testament and the Ancient Near Eastern Worldview. In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고대 히브리인의 우주 개념

고대 이스라엘은 세상을 하늘, 땅, 바다 그리고 지하세계로 구분했다. 

그들은 하늘을 산들에 기초를 놓은 아치형 천장으로 보았다. 하늘에는 문이나 창문이 있어서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천장이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 구름과 존엄에 가려져 거주하신다.

세상은 물 위에 떠있는 원반으로 기둥들에 고정시킨 또는 묶어두었다고 보았다. 땅은 단지 알려진 영역이었고, 그 밑의 영역은 알수 없다고 여겨졌다. 

지하세계(스올)는 물이 있는 또는 아무도 돌아올 수 없는 건조한 감옥이었다. 땅 밑에 물리적인 장소로 여겨졌고,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고 여겼다. 

 

구약과 고대 근동 세계관

  성경의 적절한 해석은 본래 그것이 쓰여진 문맥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특별히 구약에 있어서 더 그렇다. 하나님은 특정한 시대, 장소, 문화를 택하셨다. BC 1-2000년의 고대 지중해와 고대 근동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가 구약에서 읽는 것들을 만들어 내도록 영감한 것이다. 성경 저자들이 우리가 했던 것처럼 생각하고, 믿고, 행동한다는 추정으로부터 오해들이 생기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더 많은 충실한 이해를 하도록 이끈다.

   비록 이 고대 세계가 우리 대부분에게는 친숙하지 않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고고학적 발견 이전에 살았던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더 생소했을 것은 것이다. 고대 수메르인, 바빌로니아인, 이집트인, 가나안인의 언어들은 지난 200년 안에 해독되었다. 구약과 이런 문명들의 문헌과 사상의 친밀한 관계는 고대사와 고고학에서 그런 발전 이후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성경 저자가 의미했던 것을 이해하기 위한 특별한 창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연결은 특별히 창세기 1-2장의 이해에 중요하다. 

 

우주론은 무엇인가?

  “우주론”(cosmology)은 우리가 우주의 구조를 이해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에 의해서 어떻게 구조되었는지에 대한 성경 저자의 개념은 독특한 우주론을 나타낸다. 이 우주론은 하나님이 우주라고 알려진 곳에 거주하신다는 생각을 포함하고, 역사나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저자의 경험이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예를 들면, 우주론들은 장소와 인간들이 죽을 때까지 혹은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서 그렇게 되도록 허용되지 않는 한  경험하지 못한 사건들에 관한 설명들을 포함하고 있다. 

 

구약 우주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대 근동의 문명들 사이에서 흔히 볼수 있는 우주 구조를 믿었다. 이 구조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신들을 위한 천상의 영역, [2] 인간들을 위한 지상의 영역, 그리고 [3] 죽은 자 들을 위한 지하세계. 이스라엘의 우주론의 용어 역시고대 근동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가나안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세 층들은 십게명에도 반영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 20:4, 시 33:6-8, 잠 8:27-29와 비교해보라)

시편 33:6–8 (NKRV)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잠언 8:27–29 (NKRV)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이런 우주론은 빌립보서 2:10, 요한계시록 5:3에서도 나타난다. 

빌립보서 2:10 (NKRV)
10 하늘에 있는 자들땅에 있는 자들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요한계시록 5:3 (NKRV)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하늘 : 천상의 영역

  창세기 1장 6-8절은 하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제시한다: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raqia)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samayim)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궁창(둥근 돔)은 단단하다고 믿었고, 그 위에 있는 물을 막아 땅 위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창공(그리고 때로는 하늘과 동일시되는)이라고 불리는 그 둥근 돔은 바다 밑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기초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 돔은 지평선에서 그 끝이 만나는 “빛과 어둠 사이”의 경계로 지구를 둘러쌌다. (욥기 26: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이는 잠언 8장 28절의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라는 구절, 욥기 37장 18절의 “그대(너)는 그(하나님)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는 표현을 설명해준다. 

  창세기 1장은 단단한 창공 위와 아래의 물로 묘사한다. 이 믿음은 시편 148: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에도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은  욥기 22:14(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에 묘사된대로 창공 위에 거주하신다고 여겨졌다. 아모스 9:6(그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 시니라)도 이런 생각을 반영한다. 

 

지상의 영역

  땅은 깊은 물 위에 놓여있다. ‘아래 물’은 인간이 사용하는 물뿐 아니라 더 깊은 심연까지 가리킨다. 따라서 땅은 바다에 떠있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보였고(창 1:9-10), 물로부터 떠오른 것이다.(벧후 3:5)

창세기 1:9–10 (NKRV)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베드로후서 3:5(NKRV)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땅은 기둥이나 움푹 들어간 기초에 의해 단단히 고정된다고 생각했다(삼상 2:8, 욥 38:4-6, 시 104:5)

사무엘상 2:8 (NKRV)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욥기 38:4–6 (NKRV)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시편 104:5 (NKRV)5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지하세계

  죽은 자의 영역은 땅 밑에 있다고 믿어졌다. 이 장소에 대한 히브리어 용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스올이다. 영어성경에는 Sheol로 번역되거나 죽은 사람의 영역, 무덤으로 번역되었다. (한국어 성경은 모두 스올로 번역함)

잠언 9:18 (NKRV)
18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시편 6:4–5 (NKRV)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grave, NIV)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시편 18:4–5 (NKRV)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 스올(grave, NIV)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무덤이 지하세계로 통하는 관문을 나타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때때로 “땅”에 대한 히브리어(erets)는 지하세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욥기에서 죽은 자의 영역은 물과 연관된 용어로 묘사된다.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욥기 26:5). 요나의 묘사가 아마 가장 생생할 것이다. 비록 그는 큰 물고기 뱃속에 있지만, 요나가 말하길 그는 지하세계에 있다고 한다: “산의 뿌리”의 깊은 곳, “빗장”으로 오래도록 막혀있는 “구덩이”

요나 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이 세계관은 구약을 형상화했으며, 성경이 그 시대의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서 그 관점을 설명하고 여호와를 영광스럽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1.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역사

  지금으로부터 6~8천 년 전의 기록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지구는 둥글고, 태양은 태양계의 중심이고, 더 큰 은하계가 무한히 존재한다)과 다르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대'라고 부르는 그 옛날에 살았던 이들이 세운 건축물이나 업적들을 보고 오늘날에도 감탄할만한 경이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우리가 지금 아는 것들로 그들을 예단하는 것을 주저하게 합니다.

지구의 창조 vs 우주의 창조

  성경의 첫 시작인 창세기 1장 1절은 맨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지는 하늘(samayim)과 땅(erets)입니다. 이 하늘과 땅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하늘과 땅(지구에 속한 것)으로 볼 것인지, 우주만물로 볼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이해는 크게 달라집니다. 지구적인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이 지구를 창조한 신으로 축소되거나 그 기록의 신화성을 주장하며 무시하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윗글에서 보여준 고대 히브리인의 우주 개념을 참고하면, 그들이 이해하기에 하늘과 땅은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게 던지는 질문들

  그 이후에 등장하는 창조 내용(창조 기사)을 두고도 헷갈리기는 비슷합니다. 1장 2절에 나오는 땅이나 수면은 언제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들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고,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땅이 드러나게 하고, 그 안에 생명들이 번성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주장하고 있는) 과학적 사실(진화론을 비롯한 생물학적, 지질학적, 천문학적 지식)과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 외에도 성경(특히 구약)에 나타난 우주론이 고대 근동 문명들과 유사하다는 점도 걸림돌이 됩니다. 유일한 신적인 계시로 여겨지는 성경이 혹시 그 시대 문화의 산물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언약이나 십계명의 내용, 성막의 구조를 비롯해서 윗글에서 언급하는 용어까지 그 유사점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일부 신학은 인간 문화의 산물로 다루되, 그 인간 문화에 섭리하신 하나님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이런 문제, 반응들은 성경에 기록된 창조 기사를 두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논증이나 역사적 기술의 입장에서 다루려다 보니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 진지한 반응으로서 일부는 우리가 알고 있는(과학적으로 검증한) 것들과 다르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두고, 한편에서는 과학적 사실로 입증하려 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성경이 고대문서로 가진 부정확성을 지적하며 실제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또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과학적 문서로 다루지 않고 문예적 방법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견들은 모두 나름의 진실한 반응으로 함께 숙고할만합니다. 

 

2. 우리가 읽는 성경

  하지만 이는 성경의 본래 의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창조 기사를 포함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고,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 기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소개하는 기록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이 이 세상(더 엄밀하게는 인간, 더 나아가서는 '나/우리')에게 어떻게 대하시는 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겸손에 기초한 해석의 가능성

  또한 지금이나 앞으로 미래에도 분명한 사실들은 우리가 읽는 성경을 우리의 기준에서만 재단할 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을 요청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 창조의 일, 그 역사의 일을 온전히 다 알 수 없습니다. 그 역사적 시점을 직접 경험하거나 재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어떠했을지 추정만 가능합니다. 이런 우리의 진실한 태도를 성경 기자에게 적용하는 것은 의외의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의 고백

  먼저, 기독교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루어진다는 면에서 창세기 1장 1절은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수학(예를 들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그 논의를 시작하는 기초가 되는 공리처럼 창세기 1장 1절을 다루는 겁니다. 이 기초 위에서 성경의 모든 내용을 믿음으로 대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세상을 살아갈 방향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설명은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설명입니다)

인식의 한계 안에서의 기록

  여기서 더 나아가면 고대 이스라엘 백성 혹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창세기를 읽거나 들을 때, 혹은 모세가 이 창세기를 기록으로 남길 때, 더 나아가 이 이야기를 모세가 기록하기 전에 구전으로 전해질 때 살았던 사람들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보다 오래전에 살았던 이들이 듣고 이해했던 것은 오늘 우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한 세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우주 만물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로 모세(창세기 기자)에게 천지창조의 장면을 보여주었다 치더라도 그는 그가 아는 지식에 바탕을 두고 그가 납득하는 수준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거기서 생기는 고대 히브리인의 우주 개념이 동시대 인근 국가들의 우주론과 유사했을 수 있습니다. 

실제 역사안에서의 분화되며 발생한 왜곡의 가능성

  또는 더 성경 중심적으로, 태초의 그 창조 기사가 아담과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내려오는 과정에 그 원시적 구전의 내용이 바벨탑 이후에 다양한 민족들의 버전으로 분화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근 국가들과 유사한 우주론을 가지되, 하나님의 선택과 계시에 의해 보다 온전한 이해를 유지한 것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전해졌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구전의 당사자들이 이해하는 수준에서 우주론을 가졌을 것은 당연합니다.

나이든 우주 창조

  이런 전제를 두면, 여전히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그 사실로서 역사성과 실재성을 갖습니다. 과학적 사실들이 말하는 바는 창조와 역사의 주체나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시점의 세상의 원리로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의 나이(42세?)처럼, 우주와 지구의 나이(58 억년 된 지구?), 우주 안에 작동하는 모든 원리(물리, 생물, 시간적 체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마치 클래식 제품, 레트로 제품을 만들듯이 창조했을 가능성)

레트로 상품, 구제 스타일 새제품

 

같은 세계 다른 세계

  또한 우리가 주목하여 성경을 대하면, 비슷한 우주론과 비슷한 용어를 가지고 기술되는 성경의 내용, 그 안에 담긴 문맥에서 마주하는 하나님은 동 시대 어느 종교와 차별됩니다. 이는 실로 오늘날에도 여전한데 그 고대문서로서의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나라는 전능한 하나님을 알게 해주며,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존엄과 하나님을 대리하며 다스리는 삶을 살수 있는 자유와 가능성을 일깨워 줍니다. 이런 성경의 내용은 그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도 기초삼을만한 가치들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와중에 드러나는 성경의 복음은 고대신화나 오늘날 모든 영역에서 당연시 되는 불가피한 희생이나 헌신을 강요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기대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우리가 사는 삶에 참된 샬롬을 깃들게 하는 복음이 됩니다.

3. 성경과 우리의 삶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 겨우 34개의 문장을 가지고 창조를 설명하는 것은 빅뱅이론이나 우주 생성 원리, 물과 지형의 변화, 생물의 출현과 진화를 담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본격적인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혼돈하고 공허한 땅, 흑암이 깊음위에 있을 때,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갈 생명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빛을 만들고, 궁창을 만들고, 땅과 바다를 나누고 풀과 나무를 만들고, 그것들을 주관할 대상들로 해와 달과 별을 만들고, 새와 물고기, 짐승과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하는 하늘과 땅은 우주만물이면서도 지극히 지구적인 관점, 그들이 만지고 보고 듣는 것에 기초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묘사한 것처럼, 창조 기사 역시 그들의 세상 이해를 반영한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인의 우주 개념이 사실이라고 부르는 오늘날 우리의 지식과 충돌하는 것 같지만, 지구의 땅 위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동일하며, 그 세상을 창조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이해하는 우주 개념이 다르지만 여전히 이 세상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창조가 생명의 창조로 우리 삶의 목적과 밀접하다는 이해는 동일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나온 "창조하다creat"는 단어(bara)는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이 단어는 창조기사(1:1-2:3)에 6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단어는 바벨론 포로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사야에 가장 많이 사용됩니다(21번 사용).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것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포로로 끌려와 있는 이들, 아무런 소망을 가질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의 시기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한 하나님의 창조를 대하는 고대 히브리인이나 코로나 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공지능과 무인 전기 자동차 시대를 살아갈 다음 세대에도 동일하게 창조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는 중요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는 말씀은 여전히 우리가 알수 없고 경험할수 없는 영역이지만, 고대 히브리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 소망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갈 삶의 터전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그 지으신 것을 보시며 "좋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샬롬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