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_모음

친밀감, 하나님의 선물

by 샬롬보금자리 2020. 7. 5.

1. 친밀감은 왜 필요한가?

가. 들어가는 말: 우리 안에 경험된 친밀은 무엇인가?

  친밀감 하면 보통은 우정이나 연인, 가족 간의 관계를 떠올립니다. 대개는 내가 아는 사람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친밀감은 본래 타인과의 관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는 사람이 아닌데도 친밀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벌써 20여 년 가까이 된 기억인데 2002년 월드컵 당시 길거리 응원의 한 장면입니다. 지금도 프로 농구, 프로 축구, 기아 타이거즈 야구를 보려고 갈 때마다 그런 친밀감을 느낍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기를 함께 응원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함께 기뻐하기도 하고 함께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다른 경우는 박효신, god 콘서트를 다녀온 청년에게서 들은 이야기 안에 있습니다. 보통 2-3명이서 함께 콘서트를 가는데 원하는 자리를 배정받기가 워낙 어려운데, 그 콘서트를 오고 가는 중에 자연스레 알게 되는 사람들이 있고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며 서로에게서 깊은 유대감을 경험한다는 겁니다. 또 다른 경우는 외국에 나가서 한국인을 만날 때 느끼는 반가운 마음입니다. 물론 이는 오묘하게 그 온도가 변하는데, 해외에서 한국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오히려 서로를 더 외면하기도 합니다. 

<출처: 중앙일보>

  그 외에도 우리가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 자신과의 관계'는 현실에서 먹고 마시며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경험하는 '실존적 자아'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나, 하나님이 구원한 나로 이해되는 '존재론적 자아' 사이의 관계입니다. 현대 사회는 특히 실존적 자아에 도취되어 휩쓸리듯 살아가는데, 여기서 존재론적 자아를 인식하려는 갈급함이 적지 않습니다. 존재론적 자아를 인식한다는 것은 현실이라 불리는 상황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실존적 자아를 사랑으로 보듬으며 돌보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나. 그렇다면 친밀감은 좋은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친밀감을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일하지 않는 시간의 힘(마릴린 폴)"이라는 책에 보면  "행복은 곧 사랑이다. 우리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영적 힘이나 의미와 교류해야 할 필요성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래야만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는 우리를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여기서 좋은 관계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친밀한 관계, 사랑하는 관계일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사이의 좋은 관계가 행복과 건강한 삶에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족의 법칙: 가속도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친밀감에 늘 목말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게, 우리가 느끼는 만족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데서 온다는 점입니다. 한 달에 100만원 벌던 사람이 110만원, 120만원 이런 식으로 뭔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때 우리는 만족을 느낍니다. 그런데 한 달에 5천만원 벌던 사람이 한 달에 500만원 벌면 그 사람은 자살하려고 할 정도로 절망합니다. 토익 시험을 봐서 800점, 950점을 맞다가 다음 시험에 920점을 맞으면 실망하는 겁니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증가폭(기울기)이 양수일 때 만족을 하고, 그 미분 값(기울기의 변화, 가속도)이 클수록 더 큰 만족을 합니다. 이는 세상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인간들의 삶의 양상입니다.  

 y=mx, 기울기m에 따라서 그래프의 모양이 결정된다. m>0 일때 x(시간)이 흐를수록 y(만족)도  높아지고, m<0일때는 반대다

 

친밀감이 가져오는 관계의 변화

 우정이나 애정을 쌓아온 관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친밀감을 만나면, 그 새로운 자극의 기울기가 양수(+)가 되는 방향으로 삶이 전개됩니다. 또는 그 자극이 양의 값에서 음의 값으로 줄어들거나 그 증가폭이 둔화될 때 이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자극을 찾아 친구나 연인, 혹은 배우자와 가정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버림받은 느낌, 고립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떠나는 이유를 말하든지 말하지 않든지 간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떠난 친구에 대한 불만과 원망으로 속상해하거나, 다시 그 관계를 회복할 방법을 찾아 전전긍긍합니다. 혹은 "그래.. 너 어디 두고 보자.. 가려면 가라!" 쿨하게 보내주며 다른 관계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또 다른 경우로는 사춘기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느끼는 친밀감이 친구관계로 확대되는데, 이때 부모는 기존의 친밀감이 약화된다고 여기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모임에 동참하라는 식으로 압력을 가할 때, 자녀는 부모에게서 자신의 자유가 위협받거나 친구와의 친밀감이 공격받는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는 개인 혹은 사회 심리학적인 다양한 설명이 있을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친밀감의 다양한 역동을 소개하는 사례로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성년기의 과업

  제가 관심을 갖는 친밀감은 청년의 시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에릭슨은 인간의 삶을 총 8단계로 나누고 각 시기마다 성취해야 하는 과업이 있고 이를 통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제시한 심리사회적 발달 8단계에 따르면, 성년기(23-34/39세)는 애정관계를 통해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이 성취해야 하는 과업입니다. 이 시기에 건강한 친밀감을 갖지 못하면 고립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을 외로운 자아로 인식하고 사회나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꼭 2-30대에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친밀감을 형성하느냐 상대적으로 고립감을 경험하느냐는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좋은 설명이라 여겨집니다. (이를 연예와 결혼, 혹은 또래 문화나 유행 같은 것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친밀감이 존재하고, 그 친밀감을 통해 사랑을 경험하고,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친밀감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는 더 큰 친밀감을 원하기에 관계를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이 친밀감을 채우지 못할 때에는 고립감이나 외로움으로 공허함을 느낍니다. 

 

지나친 친밀감의 폐해

  친밀감을 다룰 때 우려되는 점은 친밀감, 친숙함이 경멸을 낳는 경우도 있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6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면서도 "이 사람이 마리아의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했는데,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배척은 그보다 작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아야 하는데,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니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배타가 아니더라도 실제로 우리는 관계 안에서 너무 친하면 '이 사람은 이러이러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하고, 정작 본인이 '아니다'라고 말해도 '넌! 그래~~'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 적절성을 잃어버린 친밀함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가고 사귀어 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친밀감의 양극단

  이 친밀감은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요 근래에는 사람이 아닌 애완동물과도 친밀감을 깊이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친밀감을 두고 "원래 100% 만족하게 채울 수 없다"고 체념하고 초월하려 하거나, "아냐! 어딘가 진짜 나의 그 사람은 있을 거야!"라고 평생을 목마름으로 헤맬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친밀감은 중요합니다. 친밀감이 무엇인지, 어떻게 친밀감을 누려야 할지를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친밀감은 무엇인가?

  먼저, 친밀감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네이버 국어사전은 "지내는 사이가 매우 친하고 가까운 느낌"이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  친할 친  빽빽할 밀  느낄 감"이니, 친함이 가득한 느낌 정도로 이해하면 될듯합니다. 이미 이야기했던 친구나 연인, 가족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들과의 관계에서 전해지는 느낌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친밀감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크게 2가지로 추적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관계를 주목해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용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가. 성경에 나온 친밀 : 관계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그 형상에 비추어 바라보는 친밀감

  성경에 제일 먼저 언급되는 관계는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에 곧장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는 기준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형상, 자신의 모양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형상"이라는 말은 삼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창세기 1:26–28 (NKRV)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형상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image로 번역되었습니다. 아마도 외모나 성품 같은 것을 닮았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이 형상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צֶ֫לֶם(쩨렘)인데, 다니엘서 3장 1절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의 "신상 צְלֵם(쩨렘)"이라는 단어와 철자가 동일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만든 목적이 왕으로서의 자신 권위와 권세를 나타내고, 신하와 백성들,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순종과 예배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단 3:1-7), 창세기에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 의미가 새롭습니다. 마치 신상을 볼 때 느부갓네살을 떠올렸던 것처럼,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를 알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생명에서 유추하는 친밀감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하나님과 그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그 사이에 친밀함이 있었을까요? 예를 들면, 제가 제 아들과의 관계가 친밀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저와 제 아내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이는 본능적으로, 생득적으로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아이에 대한 친밀감은 본래는 부부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내를 닮은 딸을 낳고 싶고, 남편을 닮은 딸이 응애응애 우는데도 예쁘기만 하고 더욱 사랑하고 싶어 지는 이유는 그 부부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서 경험된 사랑, 삼위 하나님이 서로 안에서 경험된 사랑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 이유입니다. 혹여라도 하나님 사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관계 안에 사랑이 없었다면 굳이 날 닮은 존재, 우리를 닮은 존재를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종교에 등장하는 창조설화들을 보면, 신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찾기 어렵습니다. 간혹 인간을 불쌍히 여기기는 하지만(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고 구속할 만큼 사랑을 보이는 경우는 없습니다. 

친밀감의 확대

  하나님과 하나님 자신의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 아담과의 관계로 발전했다면, 이후에 이 관계는 다시 아담과 하와의 관계로 발전합니다. 창조 기사에 연거푸 반복되는 "좋다"와는 대조적으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창 2:18). 이 돕는 배필은 기존에 아담을 창조하던 방식-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함(창 2:7)-과는 다르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빼서 그 빈자리를 살로 채우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창 2:21-22). 이렇게 만든 여자를 아담에게로 데려오시자(22)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고 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관계"(창 2:25)였습니다.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는 사이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친밀한 관계로는 모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한 것에 대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느냐?" 하며 비판의 날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모세)와 내(하나님)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 12:8) 말씀하시고는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미리암과 아론이 나름 자신들도 하나님과 친하다고 주장하며 모세에게 비난을 했는데, 하나님은 모세와 친밀함을 더 깊이 누리고 있음을 근거로 미리암에게 벌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는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는 사이로 은밀한 말로 하지 않는 사이입니다. 이 말은 서로 좋게 좋게 지낸다기보다는 무슨 일이든 비밀이 없는 사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다는 말과 비슷해 보입니다. 

 

연인 사이의 친밀감

  그 외에도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에서도 친밀한 관계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아 1:13). 여기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을 빗대기를 자기 가슴 사이에 있는 몰약 향주머니라고 합니다. 메시지 성경(유진 피터슨)은 "His head resting between my breast-the head of my lover was a sachet of sweet myrrh 그의 머리가 내 가슴 사이에 쉬고 있도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머리는 달콤한 향 주머니구나"로 표현했습니다. 연인의 젖가슴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있는 이미지는 부끄럽지 않음 정도를 넘어서 아주 가까이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친밀감 추구

   호세아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고 그 우상에게 드려진 건포도와 과자를 즐기던 것을 보여줍니다(호 3:1). 이스라엘은 이방 신과의 종교적 친밀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 혹은 그 이상의 부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관계 안에서의 친밀함 추구였고, 올 바른 관계 안에서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돌아옴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은 음녀로 비유되는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심으로'(3:1)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말합니다'(3:5). 

호세아 3:1–5 (NKRV)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 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하나님과의 친밀감 회복

  신약에 와서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친밀감을 보여주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라고,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 아버지"는 신약에서 15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이 13번 등장합니다. 모세,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말라기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드물었습니다. 그나마 하나님과 친한 사람들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했습니다. 대신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나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자녀로 대하셨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을 감히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만군의 주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 영생하시는 하나님, 예비하시는 하나님, 승리하시는 하나님일 뿐이었습니다. (참고: 하나님 호칭 연구: 예수님의 '아버지' 어휘 사용에 관하여,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에 대한 연구)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알려주셨고, 신약의 초대 교회는 그 뒤로 줄기차게 우리 아버지,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이는 마치 어떤 성도들이 자기 아빠가 목사인데 아빠라고 부르기보다는 목사님이라고만 부르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다른 아들이 와서 아빠, 내 아빠, 네 아빠, 너희 아빠, 우리 아빠라고 알려주고 나니, 이제는 모든 아들들이 교회에서나 밖에서나 자신의 아빠였던 목사를 아빠, 아빠 목사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열어준 이 호칭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친밀감, 하나님과 성도의 친밀감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나. 성경에 나온 친밀 : 용례에 대해

  이제는 성경에 나온 친밀이라는 용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친밀감"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친밀"이라는 단어가 몇 군데 등장합니다. 한글성경(개역개정)에 나온 친밀을 찾아보면 2곳이 나옵니다(시 25:14, 잠 18:24). 시편에 나오는 단어는 סוֹד (sod : a friendship characterized by social or emotional intimacy)이고, 잠언에 나오는 단어는 דָּבֵק(dabek: Remaining in close relation by being faithful or steadfast)입니다. 먼저, 시편에 나오는 소드라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סוֹד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14, 개역개정)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의논하시며, 그들에게서 주님의 언약이 진실함을 확인해 주신다.” (새번역)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가지고 그들에게 그 언약을 알리십니다.” (우리말)
"여호와는 자기를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려 주시고, 자신의 언약을 가르쳐 주십니다."(쉬운 성경)

  시편 25:14에 사용된 이 단어는 사회적 혹은 감정적 친밀감에 의해 형성된 친구 관계를 의미합니다. 개역개정과 우리말 성경은 "친밀하심", "친밀감"으로 번역했지만, 새번역 성경은 "의논하시며", 쉬운 성경은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시는" 말로 가까운 관계, 신뢰함을 전제하는 비밀스러운, 은밀한 느낌을 줍니다.

  거꾸로 이 히브리어 단어가 같은 뜻으로 사용된 표현을 사전의 도움을 받아 추적해보면 욥기 29:4, 시편 55:14이 나옵니다.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욥기 29:4, 개역개정)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시편 55:14, 개역개정)

 

  욥기 29:4이 말하는 "기름을 발라준다"는 표현이 어색한데, 이 구절을 다른 번역본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이 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표현입니다. 

욥기 29:4
내가 그처럼 잘 살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새번역)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내 집에 있던 내 한창때와 같을 수만 있다면" (우리말)
"내가 그처럼 잘 살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쉬운)

 

  시편 55:14에서 "재미있게 의논하며"라는 표현은 우리말 성경과 쉬운 성경으로 보면 성도들끼리 "즐겁게 어울리는, 친하게 지내는" 것을 회상하는 말입니다. 이런 회상의 이유는 시편 기자가 친구에게 배신당했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를 비난하는 자, 미워하는 자, 나보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원수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고, 피해 숨기라도 할 것 같은데, 그 사람이 내 동료, 내 친구, 가까운 벗이기 때문입니다(시 55:12-13)

시편 55:14
우리는 함께 두터운 우정을 나누며, 사람들과 어울려 하나님의 집을 드나들곤 하였다.” (새번역)
우리가 즐겁게 어울리며 하나님의 집에서 무리 지어 다녔었는데!” (우리말)
"한때, 우리는 친하게 지내며 함께 하나님의 집에도 다니곤 했습니다." (쉬운)

시편 55:12–14 
12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즉,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시 25:14, 욥 29:4)와 사람과의 관계(시 55:14)에 모두 사용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친밀함은 함께 의논하는 모습, 재미있게 지내는, 즐겁게 어울리는, 우정을 나누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음으로, 친밀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다베크라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דָּבֵק

잠언 18:24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개역개정)
친구를 많이 둔 사람은 해를 입기도 하지만 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친구도 있다.” (새번역)
많은 친구를 가진 사람은 해를 입기도 하지만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도 있다.” (우리말)
"친구인 척하는 자도 많지만,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낫다." (쉬운)

  잠언 18:24에 사용된 이 단어는 신실함에 기초한 가까운 관계를 의미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친밀"로 번역했지만, 다른 번역본들은 "더 가까운 (친구)" 관계로 표현했습니다. 잠언의 이 구절에 나타난 "친밀"은 형재애에 비견되는 혹은 더 가까운 진정한 우정을 의미합니다. D.A. 카슨은 이 구절을 두고 "친척(가족)은 기본적으로 가족 간의 결속을 타고나지만, 친구는 어려운 시간에 헌신을 통해 진정한 관계로, (형재애와 비교될만하게) 서로에 대해 헌신적으로 사랑(loyalty)을 나타낸다"(NIVSB, p.1230)고 설명했습니다. 

  이 단어가 같은 뜻으로 사용된 다른 구절을 찾아보면 신명기 4:4이 나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으로 "충실하게 따르는", "끝까지 붙드는", "끝까지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 붙어 있는 "친밀"은 오늘 이스라엘의 생존의 근거, 이유가 됩니다. 

신명기 4: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개역개정)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충실하게 따른 당신들은 오늘까지 모두 살아 있습니다.” (새번역)
그러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끝까지 붙들고 떠나지 않은 너희 모두는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우리말)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 여호와를 끝까지 따랐으므로 지금까지 살아 있소." (쉬운)

  즉, 이 단어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신 4:4)와 사람과의 관계(잠 18:24)에 모두 사용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친밀함은 단순히 은밀한 것을 공유하거나 사랑하여 가까워지는 친밀을 넘어서는 서로에게 신실한 헌신이 담고 있습니다. 

 

  이 두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자연스레 이 친밀이라는 단어가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먼저 시편 55:14와 잠언 18:24은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 줍니다. 잠언 18:24은 진정한 친구가 어려울 때 가족 못지않은 관계로. 사랑과 지지를 해주는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시편 55편은 시편 기자인 다윗이 한때 가깝게 지내던 사람, 함께 하나님의 집을 드나들던. 친구가 지금은 원수, 미워하는 자의 자가 되어 다윗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친밀감이 실망과 고통의 이유가 됩니다. 사람 사이의 친밀감이 때로는 힘이 되고, 때로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2] 하지만, 욥기 29:4, 시편 25:14, 신명기 4:4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언제나 긍정적인 것입니다. 욥기 29장의 친밀함은 욥이 그리워하는 좋았던 시절을 의미합니다. 시편 25편의 친밀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에서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참 생명의 근거가 됩니다. 

  정리하면 친밀은 사람과의 관계 안에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친밀은 가요들의 주요한 주제인 사랑의 달콤함과 아픔의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친밀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입니다. 경외하는 자가 누리는 것이며, 참 생명의 근거가 되고, 좋은 것으로 기억할만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것, 하나님과 사이좋은 관계가 복음이며,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를 관계적으로 이해할 때 의로운 관계는 다름 아닌 신뢰할만한 관계(faithful relationship)로 구원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3. 친밀감은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가.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의 가능성

  먼저는 단순 노출 효과가 친밀함을 줄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처음에는 싫어하거나 무관심했지만 대상에 대한 반복 노출이 거듭될수록 호감도가 증가하는 현상'을 단순 노출 효과라고 합니다. 이를 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 친숙성 원리(familiarity principle)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을 검색을 하면 보통 다음 3가지 사례가 나옵니다.

  [1]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자이언스는 졸업앨범에서 12장의 사진을 골라서 호감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1초에 2장 정도 보여주되, 보여주는 횟수를 달리해서 어떤 사진은 1번, 다른 사진은 25번까지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는 많이 보여준 사진일수록 호감도가 높았습니다.

  [2] 다음으로는 피츠버그대학의 리처드 모어랜드와 스콧 비치 교수가 한 실험입니다. 여학생 4명을 선정해서 한 학기에 0, 5, 10, 15회 출석을 하게 하고, 같은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에게 이 네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각 여성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지적이고, 진실해 보이는지 등을 평가하는 실험입니다. 학생들 중 90% 이상은 이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10%의 나머지 학생 중에서는 더 많이 출석한 여성이 높은 점수를 얻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친구로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도 15번 출석한 여성은 60%,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여성은 41%의 응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3] 또 다른 예는 에펠탑입니다.  1889년 3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에펠탑을 건립했습니다. 탑을 세우기 위하여 건립계획과 설계도가 발표되었을 당시에 파리의 시민들은 에펠탑 건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의 에펠탑은 천박한 흉물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파리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구조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오랫동안 보다 보니 정이 들고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이론에 바탕을 두고 영화나 드라마에 사용하는 마케팅 전략 'PPL(Product Placement, 영상에 소품으로 상품을 등장시키는 것)'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 효과에 대해서는 단순 노출 효과는 상대방이 봤는지 못 봤는지 알아챌 수 없는 상황에서도 (무의식 중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 낯선 사람을 대할 때 경계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자주 보면 정든다는 말처럼 친밀감은 자주 보면 볼수록 생길 것 같기도 합니다. 

 

나. 친밀감의 위기는 어떻게 찾아오는가?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친밀감은 앞서 성경의 용례에서 찾아본 것처럼 죄로 인도하는 관계, 고통을 주는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함께 즐거움을 누리며 더 깊은 사이로 발전할 것 같던 친밀감이 이런 관계로 바뀌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피해 숨음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가정인 아담과 하와 사이의 친밀감의 변화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고, 그 둘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창 2:25) 그런데, 이런 친밀감이 깨지는 것은 최초로 '함께'라는 단어가 사용된 본문에서 입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창 2:17),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남편도 먹었습니다.(창 3:6) 그 이후에 그들은 자기들이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삼았습니다. 어느 한쪽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게 인류 최초로 부부 사이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친밀감이 깨진 첫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이 당시에 하나님과 아담은 서로 대화를 하는 관계인데, 선악과를 먹은 뒤에 아담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숨고(창 3:10) 하나님이 주셔서 자신과 함께 있게 한 여자가 줘서 선악과를 먹었다고 핑계를 댔습니다(창 3:12) 이 사건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죄로 인도하는 관계, 원망하는 관계, 고통을 주는 관계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세기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사단의 유혹에 있었습니다. 뱀으로 나타난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갖게 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는 물음으로 여자를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말씀하셨던 것과는 다르게 여자가 대답하자(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3)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The Fall of Man" by  Lucas Cranach the Elder . 

  여기서 죽음의 문제를 잠시 생각해보면, 본래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죽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동산 중앙에 있던 나무는 생명나무였고(창 2:7), 그 열매는 임의로 먹을 수 있었으니(창 2:16) 영생을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선명해지는 사단의 특징은 말을 헷갈리게 하고 교묘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단들은 말씀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본래 말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호도하며 상식 이하의 행태를 마치 참된 신앙인 것처럼 곡해합니다.

  이렇게 사단이 접근하여 시험하고 유혹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깨지도록 만듭니다. 그러자 연달아서 사람과의 친밀감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서로에 대한 의심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두 개의 구조 안에 있습니다. 하나는 '나와 너'의 대결입니다. 그래서 삶을 경쟁으로 이해하고 끝없는 대결에서 이겨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류의 세계관은 선과 악으로 세상을 구분하고, 옳고 그름의 흑백논리를 갖습니다. 그리고 선을 지키기 위해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그 힘을 추구합니다. 이런 흐름은 좀 더 확장된 구조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우리와 그들'의 대결구조가 그것입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일본이나 중국, 미국을 아군이나 적군으로 여깁니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화해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의견과 우리가 꿇릴 것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자존심을 세우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치를 이룹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갈등, 종교를 가지고, 혹은 교파를 가지고 경쟁을 부추깁니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대부분 나, 우리는 선이라 여기고, 너, 그들은 악이 됩니다. 상대방을 먼저 의심하고, 의심을 늦추면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는 논리가 집단에까지 미쳐서 국수주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의심을 부추깁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어 비난하기를 실패할 때는 나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습니다. 자격증이 없어서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해서 네가 그 모양이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정규직이 아니면 파리 목숨이다 같은 말로 내가 하는 일의 가치는 외부에서 보이는 비교대상이고, 그것으로 나 자신의 가치, 나 자신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신앙을 가진 성도들도 "내가 이러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식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무너뜨립니다. 이는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는 다릅니다. 성찰은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될 때 반성하고 돌이킴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계기가 됩니다. 주님께로 나아가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성령을 의지하는 성장의 과정이 성찰입니다. 하지만 자괴감에 빠지고 절망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떠나 고립되게 하거나 문제를 외면하고 미루는 회피로 나타나는 것은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사단이 의도한 것이고, 그가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든 타인에 대한 의심이든 사실은 그 밑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나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우리를 만나게 하신 섭리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는 현실에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 밖에 있지 않다, 더 큰 논의는 신정론에서 다룰 주제이다)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나 아닌 타자로서 너를 신뢰할 수 있고, 우리로 확장되는 그들마저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섭리를 의지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살아온 삶, 역사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와 거룩함과 지식이 회복된 사람이라는 믿음입니다. 

 

다. 친밀감의 회복 가능성?

하나님과의 관계 : 형상의 회복

  앞서 이야기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그 진정한 회복의 첫걸음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다섯 명의 선지자와 왕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지만, 그 외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알려주셨고, 그 뒤로 우리 아버지,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다시 보이셨습니다.(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골 1:15)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하셨습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로마서 8:29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된다는 것은 의와 거룩함, 지식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엡 4:24, 골 4:24)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사람과의 관계: 샬롬의 회복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단순히 하나님과의 회복만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을 가져옵니다.   히브리서 12:14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이 되지 않으면 주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대우는 a->b 가 참이면, ~b -> ~ a 도 참이 됩니다. 히 12:14을 대우로 바꾸면 "누구든지 주를 보는 자는 어떤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름이 있다"가 됩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에 나오는 것처럼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3-18에도 보면,  전에 멀리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가까워졌고, 우리의 화평이 되심으로 둘로 하나를 만들고, 원수 된 것 곧 중간의 막힌 담을 허물고, 십자가로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함께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것이 화평(14,15), 화목(16), 평안(17절 2번)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샬롬의 한 단면입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3-18)

  여기서 허물었다는 막힌 담은 다름 아닌 죄로 말미암아 관계 안에 쌓은 담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하나님이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샬롬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사랑하는 연인이나 배우자, 혹은 부모나 자녀에게도)에 담을 쌓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그 담을 허물수가 없습니다. 처음 호감을 갖고 자꾸만 생각나고 행복감에 젖어드는 썸을 타더라도 진정한 친밀감은 누리기 어렵고, 언제 위기가 찾아올지 모르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단순 노출 효과로 서로 가까워지고 친밀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참지 못해서 혹은 나 자신을 참지 못해서 분노하거나 슬퍼하면서 좌절하고 절망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관계를 끊어내든지, 거짓 가면을 쓰고 적당히 좋은 척하면서 관계를 이어나갈 것입니다. 

 

교제하기

  처음에 관계가 시작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정체성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자연 만물의 관계가 결정되었습니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다고 하시며 다른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여 만든 사람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최초의 함께함이 가정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런 함께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동체가 새롭게 제시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을 듣고는 음부의 권세,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이 가정과 교회를 주셨다는 점을 기억하면 온전함을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 혹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구심력을 갖게 합니다. 본 회퍼가 쓴 '성도의 공동생활'은 이런 교회의 실체, 성도의 교제에 대해 유용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교제,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짧은 시간 단 한 번의 만남에서부터 평생에 걸쳐 매일 이어온 사귐이라 해도 성도의 교제는 오직 이것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서로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공동생활 p.2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서로에게 속한다는 표현은 하나의 이상입니다. 같은 예배당에 출석하는 이웃과의 교제, 혹은 나와 성향이 맞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교제가 성도의 교제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된 교제는 예수님을 그 기초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저절로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리스도가 아니면 서로를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혼자서는 괜찮은데 다른 성도로 인해서 괴로움을 경험합니다. 그 괴로움의 원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원망하고 비난하기 일수입니다. 맞습니다. 그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그 죄인 됨의 정죄는 세상 법정의 재판관 이외에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나 아닌 것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실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죄성과 한계를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죄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로마서 15:7)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서로 받아들임을 통해서 우리는 외로움을 잊게 되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관계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서 하는 치유적인 공동체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관계가 교회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와는 동떨어진 어떤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단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조급함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면서 성장하는 것처럼 공동체, 관계 역시 희로애락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교제에 집중하되 매몰되지 않고 언제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교제는 환성적인 이상, 완벽한 유토피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한계를 거룩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태초에 그리고 지금을 지나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영적인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4. 친밀감을 누리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삶,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성도의 교제 안에서 친밀감을 누리는 삶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게 할까요? 먼저는 우리는 온전한 홀로 있음과 함께 있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다른 말로 주체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 홀로 있음과 함께 있음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하고 나면, 우리는 그제야 홀로 있음이 가능해집니다. 내가 나임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 하나님이 지으신 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하신 나를 알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뒤에는 자연스레 나의 은사와 소명을 따라 내 삶을 삽니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에게 배타적이지도 않고 의존적이지 않은 주체성이 뚜렷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주변에서는 너무 독단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자신들을 싫어한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된 친밀감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과만 함께 있는 홀로 있음 안에서 자유롭고, 어떤 아픔도 하나님께 꺼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참된 친밀감을 누리는 사람은 함께 있는 것이 자유롭습니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입니다. 나의 어려움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그의 당혹스러움과 그녀의 절망이 나에게도 공명되어 울립니다. 하나님과 친한 사람들은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고, 시대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며 회개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함께 있음은 참된 홀로 있음에서 확장됩니다. 내가 괜찮으면 다른 사람도 괜찮게 받아들여집니다. 사실 이런 관계의 회복은 예수님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교회, 예수님이 머리 되시고 그분의 몸 된 교회가 홀로 있음과 함께 있음이 공존하는 그 실제입니다. 성도의 교제 안에서 더욱 자신의 자신 다움을 찾아가고, 동시에 참된 위로와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건물로서의 교회, 조직으로서의 교회, 교단에 속한 교회들은 이런 홀로 있음과 함께 있음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양산해 내는 형국입니다. 대형교회 개척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고, 내 이웃을 내 몸으로 여기는 사랑, 그 친밀감의 문제입니다. 

나. 오해할만한 것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한다는 것은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계속해서 구시렁거리며 헤헤거리고 웃고 모든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감사를 남발하며 인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어서 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우리 보고 잘 살라고 하나님처럼 느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슬픔도 분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 나라가 경험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형상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우며, 기쁘고 화나고 울고 웃는 모든 것이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도 있고 일어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며 모든 것을 자유롭게 대화하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감사할 자유, 취업이 안되어도 믿음을 더욱 굳세게 가질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럴만한 어떤 상황이 되어서 하는 게 아니라 없어도 남음이 있는 사랑, 친밀함이 있을 때 찾아오는 복음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된 샬롬을 누리는 것, 복음을 제대로 누리는 것입니다. 

다. 복음으로 사는 삶에 깃드는 샬롬, 친밀감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을 종합하면,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논의한 친밀감은 행복한 감정으로서 추구하여 얻고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 안에서 시작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 확대되고, 그 사람이 다시 다른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친밀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 샬롬의 한 측면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고 바르게, 의롭고 사이좋게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친밀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진정한 친밀감, 누려도 누려도 목말라하는 인간적인 친밀감은 사실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친밀감과 하나님이 없는 왜곡된 친밀감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에 빠지고 3개월이 지나면 멈추는 호르몬에 의해 지배되는 기계가 아닙니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사는 삶은 치열한 경쟁의 연속으로, 친구도 언제든지 적이 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에서도 부부 사이에 주도권을 먼저 갖기 위해 길들여야 하는 동물의 왕국도 아닙니다. 모두가 다르지만, 서로를 통해 온전해지며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처럼 서로 안에 깊은 친밀감을 경험하는 신비가 우리의 삶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입니다(습 3:17).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그 하나님 안에서 참 행복, 참된 친밀감이  나옵니다. 이 친밀감을 풍성히 누릴 때, 나 자신에 대한 긍정과 돌봄이 쉬워집니다. 그리고 나면 연인을 사랑하다가 더는 못 참고 결혼하자고 하는 것처럼, 자녀를 사랑해서 기꺼이 밤샘의 수고를 자처하며 돌보는 것처럼 자연스레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나설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사이좋은 사람으로 온전히 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팬클럽처럼 서로 공감하며 함께 즐거워하고, 이방 땅에서 만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처럼 멀리서 보기만 해도 반가운 친밀감을 누리길 바랍니다. 그 친밀감을 누리되 풍성히 누리는 삶,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하나님 나라, 그 천국을 지금 내 삶에서, 우리의 삶에서 함께 누리기를 기대합니다.  

샬롬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