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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친밀감: 떠나지 않고는 친밀해질 수 없다

by 샬롬보금자리 2020. 7. 9.

*샬롬 나눔. 황성하 목사(전주성화교회)의 글을 기고받아 나눕니다. 샬롬 복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는 샬롬이 있고, 그 샬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한 복음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글은 연구소에서 샬롬의 한 측면인 친밀감에 주목하여 다룬 세 번째 글입니다. 

 

친밀감: 떠나지 않고는 친밀해질 수 없다

들어가는 말 : 상실의 우울감

  몇 년 전에 저희 집에서 길렀던 강아지가 죽었습니다. 제 눈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또 제가 그렇게 그 강아지를 좋아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 우울감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슬픔을 참지 않았고 그 마음 그대로 흘려보내었습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현재)는 두 가지 종류의 우울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인 우울증은 존재했던 관계의 상실에서 비롯됩니다. 익숙하고 정든 것, 사랑했던 것과의 상실은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이와는 다른 다른 종류의 우울증은 첫 관계 맺음의 실패 때문에 생겨납니다. 크리스테바는 이를 멜랑콜리(melancholy)라고 불렀습니다. 멜랑콜리는 원래 있어야 할 관계, 맺어졌어야 할 관계의 허약에서 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멜랑콜리는 어린 시절, 엄마 아빠와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을 때입니다. 크리스테바는 아빠와의 관계에 더욱 주목했습니다. 자신의 몸이었던 엄마를 벗어난 아이는 아빠와 그 첫 사귐의 시기를 갖습니다. 만약 이 사귐이 허약하면 텅 빔이 마음을 차지합니다. 이 멜랑콜리는 비어있음으로 나타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삶의 중요한 순간에 찾아오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감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관계를 통해 형성되어야 할 관계적 자아가 부족하니 인정 욕구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어린 시절 자녀는 부모를 부모로만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아빠 엄마가 있어야 할 자리를 부모의 직업, 사회적 신분, 지위가 차지하고 있으면 자녀는 멜랑콜리를 경험합니다. 많은 군인의 자녀들에게 따라다니는 평생의 외로움의 이유가 그것입니다. 목사의 자녀들이 아빠, 엄마와의 사귐 대신 성직자-영육, 성속 이원론이 담겨 있는 말-와의 만남을 강요당할 때도 멜랑콜리는 파괴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부모와 친밀감을 경험할 시기, 친구와 순수한 우정을 나눌 시기, 나무와 꽃과 새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을 놓치면 그 멜랑콜리의 비어있음이 자리를 잡습니다.  

  상실해야 할 것이 처음부터 없는 존재, 비어있는 존재, 텅빈 존재를 경험한 이들은 외로움과  중독, 혹독한 종교적인 규율에 쉽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른 멜랑콜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한 무나 허무를 경험하진 않습니다. 사물들이 말을 걸어와 ‘나와 너’의 관계들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허약한 관계들 사이로 종종 은총의 빛이 비치기도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쫓겨난 존재, 에덴을 상실한 존재로 그려냅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은총과 은혜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옵니다. 구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 내러티브는 한 가정의 관계의 상실과 왜곡을 치료하시는 이 은총의 빛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떠남 : 상실을 통한 나 됨

  태어난다는 것은 어머니의 뱃속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공급되는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을 떠나지 않으면 생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친밀감에  대한 추구는 그런 점에서 환상입니다. 멜랑콜리가 만들어내는 텅 빔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떠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떠남을 통해서야 우리는 자기 스스로가 됩니다. 탄생으로서의 분리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면, 부모와의 정서적 거리가 생기는 것은 우리가 우리 되게 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인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갈등의 문제는 아버지 이삭을 통해 주어질 하나님의 복에 대한 경쟁 때문에 발생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라고 칭송받는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생활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둘 사이의 관계가 진실과 투명성에 기초한 상호 신뢰와 친밀감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장남을, 어머니는 차남을 더 사랑합니다.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형제 사이의 갈등은 부모의 편애를 통해 증폭됩니다. 아버지와 장남의 연대, 어머니와 차남의 연대는 장남과 차남 사이에 갈등을 고착화시킵니다. 

Hendrick ter Brugghen ,  Esau Selling His Birthright , c. 1627.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사는데 성공한 동생은 이제 아버지를 통해서 주어질 복을 염소 두 마리로 만든 별미를 통해 획득하려고 합니다. 동생 야곱은 형과 상업적 거래를 하고, 자기 편인 어머니와의 굳은 동맹을 통해 아버지를 기만합니다. 자기편이라는 말이 친밀감이나 정서적인 교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런 가까움은 아직 어머니 배속에 있는 아이와 엄마의 밀착입니다. 친밀감이 아니라 자기애, 자기 사랑입니다. 친밀감은 가까이 함에서 오지만 이는 자기애의 가까움이 아니라 그 사람을 존중함으로 거리를 두고 상호 교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나타나는 어머니와 둘째의 가까움은 그 사이에 다른 것을 두지 않는 배타적인 가까움입니다. 이런 가까움은 그 관계밖에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여깁니다. 

  역설적이지만, 진정한 친밀감은 서로의 거리를 점차 인정해주는 것을 통해 더욱 견고해집니다. 거리두기는 부모와 자녀 모두가 함께 연습해야 합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독차지하는 동안, 야곱은 아버지와의 참된 교제를 깊이 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차지하는 동안, 에서는 아버지와의 참된 친밀감 밖에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아버지, 어머니, 형이 있는 친숙한 공간을 떠나야 하는 것은 형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잘못된 동맹과 밀약들을 떠나 건강한 친밀감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집을 떠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면 ,야곱은 그의 어머니를 떠남으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후에 이 사건은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과도 반복됩니다. 야곱이 그의 아내 라헬의 사랑에만 매여 있을 때, 라헬에게서 나은 아들 요셉을 제외한 다른 아들들은 아버지와의 진실한 관계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장남 르우벤의 멜랑콜리는 아버지의 첩 빌하를 둘러싼 파괴적인 사건의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둘째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의 거짓 맹세와 살인과도 연관되어 있고, 넷째 유다의 이중적인 도덕군자의 모습에도 서려있습니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를 떠나야 했던 것처럼, 야곱의 아들 요셉도 아버지가 지어준 채색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요셉의 채색 옷이 찢긴 것은 아버지의 편애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그 스스로 우뚝 서는 삶의 여정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누리길 바라는 친밀감은 집착과 소유욕의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친밀감 자체의 환상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 얼굴을 등지는 과정은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늘 타인의 얼굴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하는 것은 동시에 늘 타인이었다고 생각하는 적들을 이웃과 친구로 다시 만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2. 맞섬 : 거짓 욕망을 벗어나기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이론을 사회학적으로 잘 설명한 20세의 가장 중요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중 한 명입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사회의 폭력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한 분이었습니다. 르네 지라르는 ‘누군가 때문에 내가, 우리가 불행하다고- 행복을 빼앗길 위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만들어낸 혐오와 배제의 문화 안에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이 희생양 이론의 배후에는 삼각형의 욕망 이론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우리다와지고 행복해지기 위해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 삶이 있는데, 이것이 다른 이의 욕망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현대 대중매체들과 광고는 진정으로 욕망해야 할 대상이 아닌 자신 안에 결핍을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부를 획득합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복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짓 욕망들과 맞서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과 내 안에 만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신비의 하나님과 조우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고정된 사물이 아닌 사귐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이름 안에는 이미 깊은 비교와 경쟁의 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형과 경쟁해서 이겼지만 그 결과는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홀로 광야에 나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사다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다른 말로 야곱은 홀로 되고서야 하늘과 땅이 사다리를 통해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떠남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떠남과 홀로 됨 없이 자신이 속한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과 오롯이 경쟁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고립되고 닫힌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를 통해 하늘과 연결된 개방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우리가 맞서야 할 사람은 적으로 여겨졌던 타인들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정확히 말하면 폐쇄성, 두려움과 같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어머니의 고향인 밧단아람에서 야곱을 두고 벌이는 두 아내의 치열한 경쟁에서 그가 본 것은 스스로 폐쇄성과 두려움을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외삼촌과 양 떼의 소유권을 놓고 벌이는 경쟁과 두 아내들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아들 낳기 경쟁은 과거에 자신이 어머니와 동맹을 맺고 아버지와 형을 이기려고 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을 이겨야 내 것을 지킬 수 있다는 경쟁의 논리들은 하늘과 땅에 연결된 은총의 사다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니꼴라 드피르의 <야곱의 사디리>,15세기, 아비뇽 뿌띠 팔레 미술관 소장

  벧엘에서 보았던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의 기억은 얍복-יַבֹּק '흘려보냄'이란 뜻-나루의 새로운 만남과 이어집니다. 야곱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이-타인-와의 씨름에서 사력을 다했지만 끝내 이길 수 없었습니다. 힘의 근원인 환도뼈가 끊어져 고꾸라지고 나서야 그는 하나님을 이긴 사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형과 아버지와 외삼촌을 이겼지만 그 승리의 결과는 버려짐과 쫓겨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다리 너머에서 오신 하나님께 졌을 때 하나님을 이겼다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닫힌 땅의 경쟁에서 이김을 얻으려는 시도를 내려놓았을 때, 그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있는 세상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3. 얼굴 : 타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 내 얼굴 찾기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타자의 얼굴이 신의 얼굴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2차 대전의 혹독함을 경험했던 레비나스는 자신이 진리를 소유했다고 믿는 이들이 가지는 폭력성에 대해 주목했습니다. 더욱 커져서 타인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길 원하는 이들은 그 울타리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적으로 간주합니다. 한국어에서 ‘우리’는 자기와 함께하는 사람들, 혹은 자기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인 동시에 울타리의 줄임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강조하는 사회는 놀랍게도 배타적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배타성을 극복하는 은혜의 초대를 말해줍니다. 친밀감은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되라고 강하게 말하는 것도 우리 밖에 있는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도 폭력입니다. 

렘브란트의<돌아온 탕자>,1669, 에르미타쥬 박물관 소장 *렘브란트는 여러 그림 안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떠났다 다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떠남을 만류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은 떠나고 나서야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같이 살면서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던 죽은 아들, 잃어버린 아들은 그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걸어오시는 살아있는 아버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떠남 역시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그 중간에 광야가 놓여있습니다. 광야 건너편에는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가 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마주하는 것은 사실 과거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과거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야 형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과 맞설 수 있던 야곱에게서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얼굴을 마주합니다!”와 같은 놀라운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는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마주한 야곱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자신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이스라엘-하나님을 이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만든 무장과 확대의 태도를 내려놓았을 때, 타자인 형의 얼굴에서 신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마주해야 할 대상은 나의 얼굴이고, 나를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끝까지 맞서는 방식으로 우리가 우리와 맞서도록 도우십니다. 회개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의 과거의 삶, 우리의 얼굴과 맞서는 전 과정입니다. 그렇게 자신과 맞서는 이가 새로운 자신과 만나서 위로에 이를 때 구원 사건이 발생합니다. 가장 멀었던 이에게서, 가장 두려워했던 이의 얼굴에서,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얼굴을 볼 수 있는 것, 그래서 다시 형제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멜랑콜리의 텅 비어 있는 마음이 영원에 대한 그리움의 삶, 노스텔지아(nostalgia)로 바뀌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갈등과 경쟁의 자리에 ‘자기를 비우신 예수’를 소개합니다. 그 비움의 자리에 초대된 이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고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며 위로를 얻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직 서로의 얼굴을 다 알지 못합니다. 두려움에 감춰 쓴 여러 가면 중에 어떤 얼굴이 내 얼굴인지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맨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볼 날을 그리워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음도 배우는 중입니다." 자신의 비워져 있는 텅 빈 멜랑콜리의 공간을 한 사람을 알기 위한 그리움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며 소망이고 사랑의 길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아직 남아 있는 삶에 대한 신비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맨 얼굴로 서로를 마주 할 수 있는 친밀감은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며 나뭇잎 사이에 비치는 햇살처럼 찰나의 순간을 통해서만 경험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다 풀어보지 못한 크리스마스의 선물 꾸러기처럼 알아가야 할 나의 모습, 그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삶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시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의 끝 두 연

  시인 윤동주가 어두운 시대, 남의 나라에 살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시를 한 수 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삶의 무게를 다 담아내지 못하는 시를 쓰는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늘 힘들었습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시대의 어둠이 자기를 삼킬 때, 그래서 처절하게 내 삶이 무너지는 순간에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시인의 태도입니다. 

  시대의 어두움은 내 마음의 폐쇄성과 두려움들이 흘러 모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등불을 밝히고 자신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눕니다. '자신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그리고 '타인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그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발견해 가는 것이 삶의 여정입니다. 

 

나가는 말 : 삶의 소리(Sound of Life)

  친밀감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 첫 부분에서 논베르크 수녀원 견습 수녀였던 마리아는 푸른 하늘과 너른 초원을 벗 삼아 뛰놀다가 늘 기도시간에 늦습니다. 이후에 그녀는 수녀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수녀원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후에 마리아는 군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군대 질서를 배우고 자라난 아이들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녀는 아이들과 노래를 부릅니다. 그 유명한 '도레미송'에서 마리아는 '도', '레', '미'의 각기 다른 소리에 각기 다른 이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각기 자신의 자리가 있고 각기 서로 다르지만, 그 음의 있음과 없음, 함께 어우러짐을 통해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진정한 '나' 자신의 자리를 찾고 함께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마리아의 도움으로 아이들은 자연과 음악을 배우면서 군인 아버지 폰 트랩 대신, 아버지 폰 트랩 대령을 새롭게 만납니다. 텅 빈 군인 아버지의 자리에 아버지 폰 트랩이 돌아오니 아이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찾고 아이다워집니다. 마리아 역시 수녀복을 벗고 아이들과 노래 부르며 폰 트랩 대령(마리아에게 청혼하여 그녀의 남편이 됨)과 노래를 부를 때 활기차 보입니다. 

  교회와 집을 오고 가는 길에 가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함께 길을 걷는 그 두 생명 사이에 흐르는 놀라운 교감이  자연스레 그리움으로 내 마음에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마냥 우울해하지 않습니다. 내 주변의 교감의 대상들은 아직도 나를 기다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꽃 한 송이, 그 사이를 스치는 바람, 바람 사이에 실려 오는 비의 예감, 비 너머 다시 비칠 7월의 햇살, 그리고 예전에 보았던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얼굴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야곱처럼 광야를 향해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주해야 할 버려짐과 외로움은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열린 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있음에서 없음으로, 다시 어울림으로 참 '나'로 이 세상과 건강한 친밀감을 누리는 삶을 함께 노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