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브런치 김작가 님의 '실존주의 전략'이란 글을 읽고 작성하는 글입니다. 김작가님은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실존주의 철학을 제시합니다. 우연히 만난 글인데 철학에 있어서는 학문적 입장에서는 초보 중의 초보이지만 이미 우리는 살며 인생의 의미를 돌아본다는 면에 있어서는 이미 철학하는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감히 글을 주체적으로 읽고 나누고자 합니다.
1. 자본주의 시대를 실존주의 철학으로 살아가기
자본주의 전략과 철학하기
글쓴이는 실존주의 철학의 쓸모, 그 가치를 자본주의 시대에 비추어 이끌어 냅니다. 간략히 보면, 인간은 감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감성과 이성을 다 공략하지만 글쓴이는 주로 감성에 해당하는 감각을 자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본 자본주의는 초월적 환상과 표면적 심연(감각, 감성, 쾌락, 쾌감)입니다. 사람에게 불행감을 안겨주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초월적 이성을 통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철학하기란,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고(존재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실천론), 대안적인 다른 구조 만들기(정치론)입니다.
글쓴이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합리성, 효율성, 과학의 이름을 가지고 확장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절대군주처럼 강력한 힘으로 통치하지 않고, 미시적인 권력, 합리적인 지식으로 통제합니다. 특히 이들이 통제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입니다. 새로운 맛, 새로운 느낌, 새로운 시각적 자극을 통해서 우리의 감각을 자신들이 제공한 감각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대상화하는 방법은 우리를 소비의 주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소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상품의 소비를 통해 우리의 감각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채우도록 하는 것, 더 이상 자본이 제공해주는 감각 이외의 것을 욕구, 욕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라고 합니다.
실존의 확인, 욕구와 요구와 욕망
철학적 자세에서 자본주의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한 첫 자세는 우리가 누구인지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글쓴이는 본질이라는 것보다 실존에 더 주목합니다. 샤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처럼 우리는 실존(현실을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적 문제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알면 방향을 잡을수 있지만, 방향을 잡았다고 실제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같습니다. 그래서 실존적 주체로 본질을 다시 규명하자고 합니다. 그 실존적 주체, 구체적인 내 문제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아쉬운 것을 하고자 하는 욕구, 욕망'입니다. 그 욕구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은 순수한 것입니다. 물론 타인에게 해를 가하거나, 부도덕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은 문제라고 간단히 짚어둡니다.
글쓴이는 약간 다른 차원에서 욕구를 결핍에 대한 실존적 문제로 취급했는데, 그것을 알아차린다면(감각),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하고(사고, 사유, 선택),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함으로, 욕구를 충족(만족, 결핍의 해소)할수 있다고 합니다. 욕구가 생기면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요구를 하게 되는데, 요구를 통해서 일정부분 해소가 되지만 욕구를 정확하게 만족시키는 요구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욕구가 다 충족되지 않는 부분을 욕망으로 정의합니다.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욕구 - 요구 = 욕망' 입니다. 여기서 남는 욕망은 결핍을 느끼게 하는 요소 이고, 자본주의는 이 욕망을 교환 가치의 크기(돈의 액수)로 환산해서 끝없이 결핍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안전하고 풍요로워졌지만 현대인들은 결핍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환상통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본래는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느껴서 채워야 한다고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결핍
글쓴이가 보는 이 결핍에 대한 자본주의 전략은 과거형입니다. 과거를 끊임없이 결핍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왔던 과거를 끊임 없이 형편없게 만들도록 하는데, 실제로 지금 나 자신이 풍요롭고 충만한 상태에 있어도 과거와 현재가 결핍으로 채워져 있다고 느끼도록 만듭니다. 동시에 지금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요구를 통해 해소되지 않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욕구와 욕망을 해결해야 할 미래는 이미 자본주의가 만든 시뮬라시옹(실재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의 구조 속에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미 결정되었다는 말은 예측 가능한 구조 속에서 특정한 테크(할일)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등에는 무엇을 하고, 중등, 고등은 어디에 진학해서 대학에서는 무엇을 선택하고, 직업은 무엇을 선택하는 등에 대한 인간에 대한 테크트리(할일목록)가 구조화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내면화하지 못하면 문제라고 인식하고, 이 테크트리가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는 길이라고 여기며 이것을 표준화된 삶으로 규정합니다. 여기에 들어가든 아니든 이 구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안을 느낄수 밖에 없습니다. 그 불안 때문에 사회가 요구하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글쓴이는 자기기만을 하는 것이며, 연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현대적 질병인 정신분열증의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연기하는 나와 실재의 나 사이에서 오는 불일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라고 합니다. 이 불일치로 인한 결핍에 대해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소비로 메우도록 하고, 주체의 항구적 분열을 일시적 분열로 착각하도록 '연기하는 나'를 부추긴다고 합니다. 사회가 제시한 어떤 것을 소비하는 순간, 일시적인 주인공이 되는 착각을 한다는 겁니다.
실존주의적 저항
이렇게 이미 짜여있는 구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결핍되고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는 '초월적 환상'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족한 존재로 이성적으로 '인지'하게 만들고, '표면적 심연'은 이 구조를 확실하고 벗어날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감각'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철학하는 글쓴이가 제시하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책, 실존주의적 저항은 이 모든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초월적 환상'과 '표면적 심연'이 만들어 놓은 욕구, 욕망이 아니라 '진짜 나는 결핍된 존재인가?', '진짜 나의 욕망은 달성될수 없는가?', '명품을 사지 않으면,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나의 요구,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가?' 묻고 우리가 절대 결핍된 존재가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을 결핍된 존재로 설정해야 자신들이 의도한 소비가 일어나니 그렇게 만든 '시뮬라시옹'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존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렇게 하자는 근거로 과거에는 결핍이 없거나 길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식품이나 재화를 저장할수 없으니 공유경제가 자연스러웠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나는 없다는 식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우리가 가진 결핍의 단면을 드러냅니다.
존재는 결핍이 아니다.
글쓴이가 주장하기는 우리 일상에서 결핍은 항상 일시적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울고, 그 울음의 요구에 응하느라 결핍을 해결해주는 일은 수고롭지만 금새 채워집니다.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에겐 결핍이 해소된 상태가 더 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결핍이 해소된 시간'을 '불안의 시간, 공포의 시간'으로 바꿉니다. 이 시간에 다가올 결핍을 향해서 내 모든 '풍요로운 시간'을 사용하도록 부추깁니다.
글쓴이가 말하는 철학하기는 내가 처한 불안, 결핍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그 불안과 공포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를 실존적으로 마주서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항상 있는 풍요로운 시간을 지금은 없는 것으로 만드는 전략, 과거에는 있었는데 앞으로 잃어버릴지 모르는 것,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대학가서? 취업하고? 결혼한 뒤에? 아이들 다 크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철학과 이론에 저항해야 한다고 합니다. 권력, 법, 지식을 활용해서 너무나 논리적이로 합리적이어서 저항하기 힘들고, 어려서부터 익숙해져서 마치 진실처럼 여겨지는 것을 철학함으로 부정하고, 지금 내 삶의 풍요로운 삶을 긍정하자고 합니다.
2. 자본주의와 샬롬복음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
위의 글에서 실존주의 철학을 통해 극복해야 할 핵심적 삶의 자리로 자본주의를 다룬 것은 통찰있어 보입니다. 성경에서도 맘몬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쓴이가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자본주의의 특징은 일부는 적절하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적절치 않습니다. 더 나아가 무엇인가를 갖고 싶게 하는 방식으로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전략은 기독교에서 사단의 유혹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실제로 코로나 시대에 경제적 약자들이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하고 치료도 받기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는데, 자본가들은 더 큰 부를 축적하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돈에 의해 작용하는 살벌하고 무자비한 세상을 보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의 유혹과 거짓말은 인류의 첫번째 죄인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내게 주지 않은 더 좋은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감사하는 삶,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삶 같습니다.
거룩한 소원에 대한 긍정
하지만 천지 창조를 하는 하나님 역시 아직 만들지 않은 인간을 향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고(창 1:26),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눅 18:31)고 물으시는 것을 보면 소원을 갖는 것은 마땅하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구체적인 재료가 됨을 알려줍니다. 실제로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있다, 천국을 사모한다고 할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그 사랑의 삶을 살고 싶어하도록 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의 주요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게 만드는 욕망의 거룩한 측면도 고려해야 하며, 무작정 나쁜 것으로 호도해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꼽은 합리성, 효율성, 과학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우리에게 허용된 것으로 하나님 역시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과학을 사용하십니다. (다만 그것으로만 일하시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실존적 차원에서 글쓴이가 말한 자본주의 특징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실존의 자리에서 관심을 가지고 목표와 소원을 갖는 것, 그를 위해 수고함으로 일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구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욕구의 바탕으로서의 샬롬
실존적 주체를 인식함에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욕구를 돌아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샬롬복음에서도 복음으로 사는 삶의 한 지표로 하고 싶은 일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욕망과 구분 짓는 경계로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른 관계라면, 그 관계를 맺을 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샬롬이 있습니다. 그것의 복음됨을 강조한 것이 샬롬복음입니다. 이 샬롬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라도 주의를 기울이고 그 소원을 고백함으로 돌아와 안착할수 있는 안전함과 자유로움의 근원이 됩니다. 하지만 샬롬복음은 평화스러운 안정감, 모든 것이 잠잠해지는 것으로서의 정적이고 안정되어가는(regulation) 과정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샬롬복음은 그 관계 때문에 담대하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돌보는 일, 경작하는 일을 할수 있게 됩니다. 거룩한 산(living) 제사로 사는 삶을 살게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한 경계입니다. 예를 들면, 창기와 죄인과 먹고 마시는 것이 죄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은 천국의 잔치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나로서 하나님께 위임받은 삶을 풍성하게 살수 있습니다. 그 삶을 살아가는 방향성, 각자의 은사와 소명이 다름 아닌 욕구, 소원으로 구체화 되고 표면화 됩니다.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둘러쌓인 세상의 욕구, 부모님의 욕구가 투영되어 있는게 분명하지만, 그마저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사귐이 깊어질수록 교정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자리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육신적, 정서적, 정신적 약함의 한계안에 있는 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 하나님의 자녀로 소금과 빛으로 살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내가 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을 알게 됩니다.(고전 15:10)
무엇을 원하는가가 지금 나의 실존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롬 8:5). 이욕구는 내가 무엇을 원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존적 지표로 지금의 나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으며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에 대한 갈급함이라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그 실존으로 서는 것은 기복신앙으로 마냥 책망받거나 터부시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아담, 아브라함, 모세의 소원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바른 관계 안에서) 실존적 존재로 삶을 살아갈때 충분히 자유롭고 안전하게 존재할수 있습니다. 그 자유로움과 안전함을 기반으로 본능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사, 소명)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글쓴이가 말한 것 같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세상의 테크트리에 휘둘리며 끝없는 결핍에 자극되어 소비를 통해서만 자신의 통합을 경험하는 상태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욕구를 돌보는 것은 중요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기 돌봄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과정입니다.
다만 그 욕구를 해결하는 것은 글쓴이가 설명하는 결핍에 대한 요구와 해결되지 않은 욕망의 고리를 끊어내기 어려운 한계를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욕구, 샬롬복음이 주목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헤아리는 소원은 단순히 내가 느끼는 결핍이나 고통에 대한 해결과는 결이 다릅니다.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분명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갖는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요구나 선택을 함으로서 기대하는 것은 부정에 대한 해소만이 아니라 긍정으로서의 즐거움과 보람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타인에게 이롭게 하는 섬김의 자리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결과를 만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이루시는 복음의 삶, 복음으로 사는 삶, 섬기는 자로 큰 자로 성장합니다.
샬롬복음에서 보는 요구와 욕망의 자세
관계는 사람마다 체감하는 밀도가 다르다는 점이 어렵지만 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알아가고 자녀로서 삶을 선택하는 주체성의 회복)은 주관적으로 충분히 적절성을 확인하고 사랑을 누릴수 있습니다. 이를 글쓴이의 용어로 다시 말하자면, 은사나 소명으로 갖는 욕구는 세상(자신과 타인, 그 사람이 속한 환경)에 대해 요구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는 환경을 무시하고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그 상황에서 내가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글쓴이가 말한대로 자연발생적으로 남는 욕망( 욕구-요구 = 욕망 )은 타인의 도움이든 자신만의 어떤 자아 성찰 방법을 통해서든 인식할수 있는 것이라면, 다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실행하는 과정(요구)을 반복하면 됩니다. 하지만 무의식의 차원에 잔류하는 욕망은 그 어찌할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를 가리켜 주 경외함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려는 자세, 열린 결론을 기대하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잠재적 악과 나의 선택
또한 글쓴이가 지적하는 세상의 견고한 권력, 법, 논리는 악한 세력이 조정하는 것 같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를 두고 악한 영, 사단의 역사라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정부분만 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속임입니다. 사람의 주체성을 내어주는 것은 언제나 본인 자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개인이 샬롬복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의 관계 안에서의 샬롬을 누리면서 소원을 따라 행하는 것이 궁극적 대안, 대조사회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테크트리로 주어진 것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 이유도 없고 그것에 매여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테크트리를 해야만 어떤 풍성한 삶이 이루어질 것 같은 시뮬라시옹 구조 안에 있는 것이라는 글쓴이의 말은 그 테크트리로 제시된 삶에 담겨진 사람들의 욕구가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인식하는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테크트리를 꼭 따라야할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일을 하고 싶은 욕구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서 선택하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고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하면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지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자 가장 중요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3. 철학하기와 성도의 삶
우리가 글쓴이가 도움을 주는 실존주의적 사고를 한다면, 우리가 확인해야 할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된 자신입니다. 또한 실존으로서 만나는 결핍, 혹은 결핍과 무관한 욕구(글쓴이가 말하는 욕망)은 하나님께 요구해야 할 것인 동시에 우리가 주체성을 가지고 선택해야 할 것들입니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과학적인 것들, 힘이 있는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신뢰와 활용, 갖고 싶어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다스리는(manage) 권한(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철학하기는 이 땅에서 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나의 본질(정체성)을 찾되, 눈에 보이는 실존을 마주하며 내 마음의 소원, 욕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뒤에는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지를 선택하고,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그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되, 결과에 메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열린 결론을 열어놓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글쓴이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철학하기, 그리고 그 '철학하기를 통한 존재론, 실천론, 정치론'은 철학이 낯선 이에게는 생소한 용어들입니다. 하지만 내 삶에 애정을 가지고 잘 살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설명일듯 합니다.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고민할때도 적용할수 있는(이미 적용해 온)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존재론적으로 나는 누구인가(하나님의 형상, 자녀, 백성)를 확인하고, 실천론적으로는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이자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대속한 세상의 이중 구조 아래서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정치론적으로는 대한민국에 살고 2020년을 살면서 동시에 창조이래 종말까지 지속되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더불어 온전한 구원의 날을 소망하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를 북돋우는 철학하기는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그 관계를 가꾸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로, 어떤 이는 찬양으로, 어떤 이는 말씀 묵상이나 예배 참석으로 다양한 모양과 다양한 삶으로 살겠지만,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목하는 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영성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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