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일상, 부활을 살다'를 읽고
평소처럼 살자. Let's get on with life.
1. 들어가는 말: 기독교와 부활
유진 피터슨은 "영성형성"에 관심이 있다. 그는 여러 책들을 통해서 줄기차게 영성형성을 이리저리 도모한다. 이 영성형성은 어떤 신비주의적이거나 초월적으로 이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일상(평범한 식사, 가족이나 친구 같은)의 평범함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엇을 얻지 못할까 봐 혹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서 재촉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유 있고 즐겁게 그리고 진지하게 하나님이 만든 세계를 음미하게 한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실제적인 삶을 살고 싶게 한다. 이를 두고 내가 이해하기로는 '복음으로 사는 삶의 실체를 채워가는 것'이다. (그동안 수년을 이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다 보니 너무 반갑다) 유진 피터슨은 이 책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 평범한 일상에서 복음으로 사는 삶의 실체로서 영성을 형성하도록 안내한다.
부활은 누가 뭐래도 기독교에 있어서 무척 중요하다. 우선 기독교는 어떤 능력을 가진 절대자가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어서 부려먹었다는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더 나아가 신이 인간이 되는데, 이는 실수나 징벌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섬김러 온 것이다. 그 섬김의 의미는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활하고 부활하게 한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이다. 그런데 성탄절에 전 지구인들이 선물을 주고받으며 그 한 달 무렵을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하는 것에 비하면 모든 인간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기념하는 날은 초라하다. 그저 달걀과 칸타타, 고난주간의 금식 같은 것만 생각난다. 유진 피터슨은 이를 두고 '부활은 돈벌이의 기회나 팔아먹을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드는데 실패했다'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인들이나 세상 문화에서 유행하는 어떤 중심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엉뚱하게 사용할수 없는 것,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기독교 전통, 소중한 전통이라는 의미다.
2. 부활을 생각하다.
유진 피터슨은 이 책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와 서신서들을 소환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주목한다. 부활의 주변에 등장하던 경이(두려움), 식사,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성형성의 장으로 우리의 일상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탁월함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특징들, 일상을 거부하는 몸짓들을 주목하며 그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교회 안에서도 흔하게 보이는 그런 일련의 뒤틀림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끄집어낸다. 그리고 부활에 주목함으로, 부활에 참여함으로 금새 다시 본래의 자리,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으로 일상을 대하도록 안내한다.
부활의 경이
1부에서 저자는 부활이 놀라운 사건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하지만 세상은 놀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상과 의도를 벗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이런 경향은 기독교 신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예화는 '빌리 선데이가 말한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다.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이후에 죽어서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믿음을 버릴 염려, 신경을 건드리는 시험 거리, 씨름해야 할 신앙적 회의는 없어야 한다는 식이다. 받들어 섬길 배우자, 참고 견뎌야 할 자식, 사랑해야 할 원수는 빠지고, 한순간에 영원을 맛보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경이로움, 충격, 놀라움이 가득한 사건이다.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그 부활 사건의 목격자들은 경외감과 동시에 친밀감을 경험했다. 이 경외감은 무서움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초월과 다름을 볼 때 느끼는 두려움(경외)이다. 저자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한다. 이 경외는 흠모하는 마음, 나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만나고 싶어하는 친밀감을 내포한다. 인격적인 관계, 그리고 참된 예배에는 그런 경외와 친밀감이 유지되기 마련이다. 저자가 그리스도인의 영성형성의 중심에 두는 것이 이 두려움(주를 경외함, Fear of the Lord)이다. 언제나 샬롬을 가져오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바로 이 경외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본래 어떠했는지, 그게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은 주목할만하다. 본래 일은 최선을 다하는 무대이고, 성취를 맛보며 타인과 세상을 섬기는 현장으로서 경이감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이것이 소명 받은 일의 실체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직장은 그런 일을 하라고 요구하고, 그렇게 돈을 번다. 삶에서 계속되는 끊임없는 요구, 새로운 자극, 깊은 만족감이 경이를 대체한다. 그렇게 되면 정작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을 잃어버리는 우상숭배의 현장이 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일터가 아닌 기독교시장을 찾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을 배우기 위해 각종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소비한다. 그렇지만 이는 잘못된 해법이다. 이것 역시 우상숭배의 한 부분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자는 다시 일상으로 주어진 일터를 부활의 영성을 형성해야 하는 곳으로 제시한다. 하나님도 일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일터는 신비를 용인하지 않는 곳으로 부활의 영성에 적대적인 곳이 되었지만, 우리는 일에서 경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안식한 것처럼 안식하면 된다. 우리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능가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시고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을 지키는 것이다. 부활의 경이를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일손을 멈추고 침묵을 지키는 것, 안식일을 지키면서 놀라움과 열린 마음으로 우리 너머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누구나 살고 있는 일상에서 우리가 만들어 낼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부활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영성을 형성하게 된다.
부활의 식사
2부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평범한 식사"다. 부활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초월적 사건이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위인 식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예화는 채리티라는 아이가 '평소처럼 살자(Let's get on with life)'고 하는 말이다. 한편에서는 이 표현을 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빼고 이야기 하자는 말로 사용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소대로 살자는 말로 사용한다. 저자가 끄집어 내는 이야기에서 언급하는 아이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아이는 모든 것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이고 관계적이다. 하지만 아이와 대비되는 어른은 관계의 피상성과 왜곡으로 주변 사람들을 필요나 역할로 대한다. 그런 어른들로 가득 찬 세상은 낙원보다는 전쟁터, 죽음이 넘실대는 곳에 가깝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앞지르는 삶을 선포하고, 모든 삶(life)의 유기적 연관성과 그 소중함을 증거 하며, 부활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그리스도가 다시 살리신 생명, 성령이 풍성케 하는 생명으로 일상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소처럼 살아야 한다. 그 평소로 대표되는 것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식사이다.
예수님의 부활 전후에(사실은 그의 사역 전반에) 식사가 많이 등장한다. 저자는 그중에서 부활 후에 있었던 2번의 식사를 주목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과 식사를 할 때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일상으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찾아가 아침을 차려주셨다. 이 식사들은 지극히 평범한 그냥 식사였다. 그런데 두 식사 모두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예수님이 초대받기도 했고, 예수님이 초대하기도 한 식사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이 함께하는 식탁의 주인이셨다는 점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평범한) 식사는 생존의 필요와 먹는 즐거움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또한 식탁의 주인은 손님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자리 잡는다. 여기에 예수님을 초대하고, 예수님께 초대 받음을 인식한다. 식사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알아차리고 식사를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눈이 있어서 기능적으로)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제나 기술로 되지 않고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로 받는다. 믿음은 강요로 되지 않고, 부활한 예수님을 보고, 그 부활을 받아들이고, 부활에 참여하고 관여하면서 참된 고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식사가 바로 이런 체험을 위한 정황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순서나 조건이 아니라 식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식사하는 동안 손님은 완전히 주인에게 의존하게 되고, 주인이라 해도 손님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우리가 주님의 식사에 온전히 참여하면서도 온전히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주님이 나를 강제하지도 않는다. 비록 우리가 식탁의 주인처럼 취향과 입맛에 맞추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식탁에 당당하게 앉아 그 식사를 즐기며, 실제로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 자체에 개입하게 된다.
부활에 의한 영성형성을 하는 식사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기독교 초기부터 예배의 중심이었던 주의 만찬이다. 저자는 예수님의 네 번의 식사에서 4개의 동사로 대표되는 패턴을 소개한다. (가지사-축사하시고-떼어-주시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과 그것을 드리는 우리를 받으신다(take). 작다고 꾸중하지 않고 온전히 받으신다. 이어서 곧바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고(thank, bless) 주님의 손으로 찢으신다(떼다 break). 거짓과 위선의 딱딱한 삶을 산산이 부수신다. 그리고 주님손에 들린 그것을 다시 우리에게 주시며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주라 하신다(give).
식사는 사실 하루에 한 번 이상, 거의 매일 하루에 세 번씩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살기 위해서 먹기도 하고, 먹기 위해서 살기도 하는 생존과 즐거움의 결합된 이 식사는 사실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가장 평범한 일상이다. 이 식사가 부활을 통한 영성형성의 주요한 방법이라는 점은 하나님 다운 설정이며, 일상을 하나님이 주신 현실로 받아들이는 저자의 탁월한 설명이다.
부활의 친구들
3부에서 저자는 고립된 자율성과 전문가 의존주의의 폐해를 지적한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능력과 전문성을 갖춘 사람에게 맡기려 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비전문가로 인식하고 삶의 모든 분야를 각 전문가에게 배워야 하는 존재로 한정한다. 비싼 값을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시장의 소비자로 전락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저자가 오늘날의 그런 흐름에서 심각하게 꼽는 것은 평신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직접 상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두고 겸손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각자의 삶 본연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고 매일매일 온갖 구체적인 일을 통해 부활을 실천해야 한다고 한다.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저자는 요즘 유행하는 심리주의, 도피주의, 전문가 의존주의는 우리 영혼 속의 목마른 사슴이 마셔야 할 시냇물(시 42:1)을 오염시킨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영혼(사람을 영혼으로 표현한다)이 필요로 하는 샘물의 근원이 예수의 부활인데 정작 그것을 외면하고 다른 데서 생명을 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샬롬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두는 영성형성은 전문가에게 의존해서는 해결할 수가 없으며, 본질적으로 친구들, 대등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예수님의 부활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이 그런 모습의 원형이 된다. (여기서 서로 잘 아는 친구라는 것은 놀람과 당혹감, 혼란과 의문, 의심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인격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고, 미래(내세)의 소망이면서 동시에 현재적 의미를 가진다. 부활 때문에 제자들이 서로 관계를 맺게 되고, 부활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부활에 의한 영성형성은 다른 이, 인격적이고 관계적 의미를 갖는 이웃, 소위 친구를 필요로 한다. 따뜻한 육체, 통계수치 속의 숫자, 역할이나 기능 혹은 필요로 축소된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종servant이 아니라) 친구로 부르시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요 15:15). 이 우정은 서로를 마주보며 친밀한 느낌을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함께하는 삶을 통해 서로의 동료애를 경험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서로의 다름을 충분히 느끼고, 나 자신밖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넘어서는 실재로부터 흘러나오는 선함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서로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언급했다. 이는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고, 그 하나님과 신자로서의 우리와의 관계 같으며, 부활 공동체로서 우리의 관계와 같다.
하지만 저자는 오늘날 친구관계는 해체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설명하기 위해 역할과 범주를 짜깁기하고 있고, 비인격적 단어들(역기능, 자원, 소비자, 문제, 희생자, 내담자, 자산, 의무, 패배자, 승리자 같은 단어들, 그 사람의 존재로서의 인격성을 상실한 표현)이 우리의 친구 된 관계를 잊게 맞든다. 그 결과로 혹은 그 원인으로 고립된 자율성과 전문가 의존주의가 활개를 친다. 자율성의 문화는 독자성과 자기 충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가 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되고, 다른 사람들이 필요 없게 된다. 또한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문화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이웃이나 가족까지도 구경꾼으로 만든다. 동시에 우리 자신들도 전문가들의 무엇을 소비해야 하는 대상이거나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자존감을 잃어버리게 한다.
저자는 이 고립된 자율성과 전문가 의존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 부활의 삶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거룩한 세례를 꼽는다. 세례를 받을 때 부활의 공동체 안에서 세 인격의 하나님과 함께 자신의 이름이 불린다. 세례 의식에는 회개와 따름이 암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회개는 고립된 자율성과 전문가 의존주의에서 돌아섬이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자만하거나 내 주체성을 전문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선택한다. 말씀을 듣기로 선택하고,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고,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따라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고,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한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보고, 들으며,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 기도의 삶을 산다.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은 내가 살아야 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때가 있고 그 도움을 받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내 삶의 주체성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혼자서 해내야만 하는 삶과는 거리가 있다. 영성형성을 위해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삶은 세례를 통해 하나님과 공동체 안에서 이름을 갖게된 정체성으로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 친구들과 함께 예수의 생명을 통으로 받아먹고 누리며 옥신각신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3. 나가는 말: 부활과 나의 삶
"부활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이 책을 펼치기 전에는 사실 별로 고민하지 않던 주제였다. 의식이 생겨나던 청소년 시절에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뭔가 죄송하고 나라도 뭔가 그 미안함을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밥을 한 끼 굶거나 미디어 금식, 금식한 밥 값으로 선교헌금을 하는 일들을 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라는 건 우리의 금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한 복음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붙잡았다. 그 덕분에 고난주간과 부활절에 복음을 더 깊이 누리려는 시도는 나름의 열매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이 내게 어떤 삶을 제시하는지는 막연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부활의 의미가 일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 놓았다. 복음으로 사는 삶으로 한걸음 더 내딛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주의를 기울이고, 그 시간이 늘어나는 일은 참 달콤하다. 예측 가능하도록 통제하려 하는 내 모습을 알아보고 경이의 여지를 열어두기로 했다(열린 결론). 교회나 가정이나 삶이 마냥 행복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수고로움과 번거로움을 동반한다는 것을 내팽개치고 도망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매일 임하는 식사는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예수님을 초대하고, 내가 초대받았음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그리고 함께 식사에 참여하는 가족과 친구에게 집중하며 관계를 맺고 친밀감을 기대한다. 이 일을 두고, 평소처럼 하자는 구호도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공동체에 대해서도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다. 부활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친구들과 있을 때 일어나는 일, 친구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자꾸만 생각난다. 실제로 모임 가운데, 대화 가운데 하나님이 기초가 됨을 염두하고 기도하면, 그 만남에 생명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도 계속 더 해볼 생각이다) 자유를 원하지만 고립된 자율성이 지뢰가 되고, 잘하고 싶어서 전문가를 찾는 전문가 의존주의가 암초가 되어 나 자신과 다른 이를 비인격화 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교회나 선교단체나 기관들에서 실제로 인격적인 일보다 숫자로 프로그램 신청자로 역할을 감당하는 직분자로 통용되는 것이 다시 한번 마음이 아프다.(나는 서진 목사이지, 목사 서진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 이 이야기인줄 이제서야 알게되었다) 이전에 복음을 인격적인 것으로 막연하게 이해했다면, 이제는 세례를 통해 주어진 정체성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내 이름, 그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시원스레 부활이란 이런 것이다고 주장할 수 없는 나를 본다. 아니 사실 이전에는 아는 척했다면 이제는 정말 내가 말하는 것 이외에는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주님과의 식사처럼 일상에서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르는 것으로는 도무지 도달할수 없는 삶이 명확해졌다. 예수님을 꼭 붙들고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 모든 나의 나됨을 볼 때,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통해서 영성형성을 부활로 설명해내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이었고, 그 일을 적절하게 해 주었다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은 죽어있는 기독교 혹은 죽어가는 기독교를 일깨우며 다시금 하나님을 보게 하고, 그분이 주신 생명, 그분에게서 시작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복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 이제는 일상이 떠오른다. 아직 이 세상은 복음에 목마르지만, 이미 복음은 감추임 없이 주어졌고 충분하다. 일상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다. 부활을 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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