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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복음으로 읽기(서평 및 정리)

(서평) 청년팔이 사회를 읽고 - 나는 청년을 사랑한다

by 샬롬보금자리 2020. 7. 29.

<서평>

‘청년팔이 사회’를 읽고

- 나는 청년을 사랑한다 -

 

 

1. 들어가는 말 : 나는 청년을 사랑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청년을 사랑해왔다. 눈을 감으면 금세 어른거리는 얼굴, 생각나는 이름을 가진 사랑하는 그 형제, 그 자매가 있다. 하지만 내가 청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청년으로 살아온 대학과 군대, 선교단체와 교회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시공간 안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청년이라는 단어, 그 사람들과 그 시절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같은 청년으로서(?) 그리고 청년들을 섬기는 사역자로서 청년들을 사랑했다. 나의 청년 됨과 그들의 청년 됨을 연장선상에 놓고 사랑하기를 아끼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나는 청년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부모님과 같이 살았고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과 빨래를 당연히 여기고 부모님께 용돈을 탔다. 아직 풋내나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밤을 새워가며 프로그래밍을 하기도 하고 동아리 엠티도 갔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연예를 시작했고, 캠퍼스 복음화를 통한 성서한국 세계선교의 꿈을 내 젊음의 소명으로 여기며 돈과 시간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젊음을 쏟아부었다. 그 혈기왕성하던 기억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지금은 40대가 되었다. 아내와 함께 살아온 13년의 세월 동안에 3명의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 막내가 10살이니 진정한 십 대 청소년 부모가 되었다. 이제는 나를 청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첫째가 곧 청년에 이를 것만 같은 가슴 벅찬 기대가 있다. 

  이런 나에게 ‘청년팔이 사회’라는 책은 참으로 관심이 간다. 내가 사랑하던 청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심스럽다. 내가 사랑하는 청년을 팔아먹는 사회라니 그 제목부터 괴기스러운 블랙코미디 스릴러가 될 것만 같았다. 책을 읽는 동안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현실이 사회학자인 20대 청년에 의해서 까발러졌다. 청년이라는 이름을 이리도 모질게 사용했나 싶은 안타까움과 청년 저자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아직도 청년의 이름을 소비하는 사회에 대한 야속함, 여전히 자신이라고 여겨지는 청년 담론에 휩쓸려 가는 청년들에 대한 아찔함이 느껴졌다. 

 

2. 청년팔이 사회를 고발함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최근 20여 년 사이에 급증한 청년 담론, 청년 세대론의 허상을 고발한다. 신세대라는 용어가 기존에는 구세대와 대비되는 새로운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대략 70년대에 출생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젊은 층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 이후에 한동안 X세대, P세대, N세대 같은 다양한 이름들이 등장했다. 청년들에게 붙여진 이 이름들은 나름의 대상과 그 이름에 걸맞은 사건이나 특징들이 함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규정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이들에게도 단순히 같은 나이 또래라는 이유로 그런 존재로 동일시되었다. 더 나아가 그런 식으로 붙여진 청년과 관련된 담론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청년들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함축한 표현으로 ‘청년’이라는 이름이 팔려나갔다.

  대표적으로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헬조선이나 N포세대 같은 표현은 청년을 떠오르게 한다. 내가 처음 그 표현을 들었을 때 이것은 청년들의 것이라고 여겼었다. 청년들이 사회를 바라보며 푸념하는 것이 그 이름이 된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책을 통해 확인한 사실은 그런 표현이 청년 담론으로 형성되는 데는 40대, 50대의 기성세대가 언론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88만원 세대나 20대 투표율 신화(20대가 투표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진보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같은 것도 청년이 아닌 외부에서 (기성세대, 주요 언론이 조장해서) 만들어졌다. 청년과 관련된 담론이 과연 정말 청년들의 것인가 싶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고 청년들의 의견마저도 다양한 이익집단에 의해 이용되고 있었다. 여기에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청년 담론들도 객관적 자료를 추적해 들어가면 극히 일부 청년들의 이야기를 청년전반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이야기로 과장하거나, 선입견에 의해서 왜곡한 것이라는 점이다. 더 심한 경우에는 애초에 검증조차 시도하지 않은 주관적 견해를 일반화하는 것도 있었다.

  저자가 이런식으로 만들어지는 청년 담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기성세대의 반응과 맞물려 있다. 이런 담론들이 한편으로는 청년들을 문제시하며 그들이 가진 미숙함을 꾸중한다. 노오력을 해야 한다거나 정치참여를 해야 한다는 식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청년을 보호하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는 식으로 기성세대를 꾸짖는다. 청년들을 위하는 것 같지만 저자가 보기에는 불필요하게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를 갈등구조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청년들을 타자화한다.  이런 문제의식이 저자로 하여금 거의 모든 청년 담론을 두고 청년이 실제로 그러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자료를 찾아들어가게 했을 듯싶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찔하게도 청년 담론의 진단이 실제와는 다르며, 그에 해당하지 않는 청년들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청년에 관련된 담론을 해체시킨다. 

  저자는 그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세대 문제, 세대차이로 설명하려는 세대주의 해석을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한다. 청년실업문제, 대학서열 혹은 같은 대학 내 과별 서열화 및 차별 문제, 스펙 경쟁 같은 것들이 청년들의 문제로 세대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적절한가를 묻는 것이다. 단순히 언론을 통해 요즘 청년 문제라고 소개되고 유통되는 이런 문제들이 사실은 사회 전반에 모든 세대가 같이 마주하고 있는 고용 불안정한 상황, 학벌주의 풍토, 개인주의-능력주의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시대의 문제를 은근슬쩍 세대의 문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런 시도들이 횡행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로 저자는 이런 담론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3개의 집단-대중매체와 기업(광고기획사), 정치권-을 그 주도적 세력으로 꼽는다. 대중매체는 시대 풍속과 사람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내고, 기업은 마케팅 대상의 차별화를 통한 이윤을 얻기 위해서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정치권도 유권자를 포섭하기 위해서 20대 투표율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세대론은 만드는 사람과 수용하는 사람 모두가 세대가 중요하다는 믿음(무의식)의 기반 위에서 유통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나의 예를 소개하자면, 청년이란 이름을 두고 격돌하는 정치의 장은 가관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전쟁터가 되었다고 표현한다. 진보와 보수 모두 청년세대가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또한 청년세대의 특징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정의하고, 임무를 부여한다. 그리고 청년세대를 한 묶음으로 다루면서 잠정적인 적을 세대갈등으로 표출해낸다. 이것들을 포함하는 세대담론이 언론사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이용되고 있다. 

 

3. 청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학의 관점에서 청년을 바라보는 저자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두고 젊은 층을 어찌해보려는 사회의 모습이 부정적으로 비취는 것 같다. 그가 주목하기에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대표성을 가질수 있는 사람은 단지 나이가 20대, 30대 또래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을 진보적인 주체나 미숙한 후기 청소년으로 다루는 오늘날의 세태에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저자가 보기에 청년들에 대한 오판에 뿌리 밖은 다양한 담론과 논의들이 모두 불편하다. 대표적으로 3포세대라는 표현을 두고 청년들이 모두 포기하지도 않았고, 그건 포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기존 가치체계를 강요하는 것이며, 폭력과 차별의 현장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보기에 청년 됨은 본질적인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사회문화적으로 소비되는 어떤 가치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저자에게 있어서 그런 사회문화적인 요구를 비판적 사고 없이 수용하고 그런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문제이다. 또한 청년들에게 그런 정체성을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여기며 포기했다고 꾸중하거나, 포기하도록 세상을 만든 자신의 잘못이라고 반성하는 양측의 기성세대 역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저자가 내린 결론은 좀 황당하지만, 청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청년 당사자 본인이 청년으로 이야기를 해도 어차피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니 한계가 있다고 부정한다. 일련의 청년세대론과 청년 담론에 대한 반응으로 각자의 이득을 위해 보여주기 식으로 진행되는 정부나 사회의 노력들도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청년들을 타자화하고 문젯거리로 여기는 것이다’라는 말로 그 의미를 부정한다. 그가 보기에 청년이란 이름을 팔아서 이슈를 만들어 내는 문제는 자세히 살펴보면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저자는 청년운동이 청년세대의 특정 문제를 대변하는 것보다 장애 문제, 취업과 노동 문제, 성(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다루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래서 책의 결말 부분에 가면 20대인 저자는 “나는 청년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하며 ‘탈-청년, 탈-세대’를 외친다. 마치 젠더해방처럼 청년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신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청년세대를 제안한다. 실체는 없지만 청년이라는 상상 속의 집단이 사회적으로 모듈화 되어서 배제된 청년들이 모이는 표상으로 삼자는 말이다. 사회학자인 그의 시각과 논조를 가만히 읽다 보면 사회문화에 따라 형성되고 변화되는 가치관과 행동양식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는 통찰이 무게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지나친 반응이자 부적절한 해법이다. 젠더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회자될 때 차별을 반대하는 사람들마저 씁쓸하게 하는 불편감이나, 극렬한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남혐 혹은 여혐 논리처럼 그 주장하는 사람의 고통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얻을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일부 사람들이 젠더 문제를 다룰때 언급하는 것처럼 성은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의학적으로 다양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와 여자가 없는 게 아니다. 숫자가 많다고 보편을 주장하고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보편이라는 단어가 정치적인 의도를 갖지 않았음에도 이미 내포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잘못을 묻는 것은 역차별이다.(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남성과 여성으로의 구분이 불필요한 것으로 해체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마찬가지로 청년이란 단어에 너무 많은 것을 담을 수 없다. 세대주의에 빠져서 지나치게 모든 것을 세대의 문제로 이해하고 대안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잘못된 진단으로 인해 헛발질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있다. 그렇기에 세대도 존재한다. 학문적 과학의 영역에서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 조사해서 무균실로 만들 것처럼 강박적인 태도를 조금 내려놓으면 어떨까 싶다. 

 

 

4. 나가는 말: 나는  사랑한다.

  청년이 쓴 청년팔이 사회는 씁쓸하다. 청년이 자신의 청년 됨을 말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이 소비하고 있는 청년 이야기는 실제 청년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일부 청년들의 이야기, 일부 청년들만을 위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교회 청년부나 대학생 선교단체에 속한 청년들이나 사역자가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면 좋겠다. 덮어놓고 남이 말하는 청년문제를 그냥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가? 어디까지 맞는 말이고 어디서부터는 그 표현의 함의를 벗어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타인이 제시하는 청년상이 아니라 청년 스스로, 청년 공동체가 자신들의 이야기, 자신들이 소원하는 삶을 끄집어내면 좋겠다. 그게 무엇이든 청년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청년 됨을 마음껏 발산하는 자리일 테니 말이다. 

  더 나아가서 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하나님나라가 그러한 곳이라고 알고 있다. 타락 이전이 그랬고 구원받은 이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나의 삶을 살아가도록 재촉한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타락 이후 구원이 자리잡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생득적으로 알고 있고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청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존재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서 우리는 나 자신보다 나에게 부여된 역할,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나로 여긴다. 그렇게 나는 서진이라는 이름보다 목사로 사람들을 만나고 기억된다. 서진 목사가 목사 서진으로 살아가는 것,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서 규정해주대로 사는 것은 숨 막히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사회에 의해서 주어지는 언어와 삶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살아간다. 사회문화의 영향을 받아 내가 형성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 정체성을 역할로 받아들이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해법일지 모른다. 아니면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모든 이름을 해체해버리는 게 구원의 길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각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부모와 사회에 의해서 주어지는 외부 요인에 의해서만 살아오지 않았다. 각 사람의 기질과 은사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왔다. 같은 부모, 같은 학교, 같은 나라에서 살아가지만 나와 같은 사람은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됨이 발현하여 생득적으로 아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찾아서 각자의 천로역정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과 내가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고 나면 이제는 나 스스로가 청년으로 나됨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 청년답게 사는 것이다. 남이 부여한 청년은 벗어나야하지만, 내가 나의 청년됨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래서 저자가 그토록 갈망하는 완벽한 나, 세상과 분리되는 나는 이론적으로 존재할 뿐, 실제로는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최선의 삶이다. (영혼과 육신의 경계도 그러하고 신앙과 일상도 빛과 어둠도 그 실체가 명확한 것 같아도 실은 경계를 짓기가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청년이란 이름이 청년이 아닌 이들에 의해서 거론되는 중에 의도를 가지고 이익을 위해 꼼수를 부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청년들이 자신의 청년 됨을 말할 수 있는 시대, 그런 사회가 되면 좋겠다. 그런데 나 자신을 돌아보거나 내 주위의 20대 대학생들과 내가 속한 교회의 청년들을 생각하면 분명히 미숙한 모습이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의 가능성을 현실로 살아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대학을 포기했다가 다시 진학하기로 맘먹고 무섭게 공부를 하기도 하고, 과감히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기도 한다. 박봉이지만 아르바이트를 마다하지 않고 친구들과 놀기를 즐겨하면서도 부모와 가족을 챙기는 그들이 내 눈앞에 있는 청년이다. 

  나는 그 청년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을 응원하고, 그들을 응원하는 나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