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복음의 핵심
- "일상, 부활을 살다" 옮긴이의 글을 읽고
"일상, 부활을 살다" 독서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OT 이후에 첫 모임이었는데, 옮긴이의 글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습니다. 특히 2015년 이후 출판사가 '복있는 사람'으로 바뀌면서 옮긴이의 글과 서문이 추가되었는데, 복음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지내다 보니, 제 마음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 글을 통해 정리하고자 합니다.
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먼저, 이 책을 번역한 권영경 교수님(이후 옮긴이)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분들과 교분이 두터우시고, 실제로 한국 신약학계에서 명망 있는 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또 실제로 제가 접한 유진 피터슨의 글을 탁월하게 번역해주셨습니다. 독자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옮긴이가 이 책에 대해 소개한 글에서 유진피터슨의 책을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부활"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 부활을 능력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같았고, 이는 한국적인 정서를 반영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사실 유진 피터슨의 글에서 부활이 능력인 것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능력의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옮긴이가 덧붙인 '하나님을 믿는 이유와 복음의 핵심을 소개한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아마도 한국어 번역본을 읽을 독자들을 고려한 것이거나, 본인도 미처 인식하지 못한 한국적인 정서가 반영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를 보완 혹은 재진술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만이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생명의 능력이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런 능력으로 우리의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정의했다. (롬 1:16, 고전 1:18,24) (일상, 부활을 살다 p.15 옮긴이의 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6)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린도전서 1장)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코로나 19 상황을 지나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찰할 지점을 안내해주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에 대한 답이 무엇이냐가 우리의 신앙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옮긴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하나님만이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 생명의 능력을 복음의 핵심으로 꼽았습니다. 제가 읽기에 여기서 강조되는 단어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아주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야 하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처럼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능력의 복음은 사실은 복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저 결과에 대한 보장만 있을 뿐입니다. 조건부 신앙 같은 공식이 제시되고, 이는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완벽한 공식('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날 천국 가는 것이 가장 완벽하다' 같은..)의 한 예가 됩니다.
2. 능력의 복음
옮긴의 글에서 느껴지는 한국적인 정서는 (제가 보기에는) 바로 "능력"과 "결과"에 주목하는 점입니다. 능력이나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한국사회는 능력-영향력에 목말라 있고,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시한다는 말입니다. 돈이나 생산성을 논하는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이나 예술 같은 영역에서 다뤄지는 추상적인 가치들도 수치화되고 가시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결국은 얼마나 대단하냐, 성공 가능성 같은 말로 비교하고 더 할지 그만 할지를 구분 짓는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와 기독교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례로 목회자에게서도 능력을 찾거나 스스로 그 능력을 구비하려는데 마음이 있고, 교회 안팎에서 교회 건물의 크기, 성도의 숫자를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헤아리는 것이 상식처럼 통용됩니다. 이런 정서들에 고스란히 노출된 성도들도 자신의 능력, 자신이 속한 집안, 회사, 교회에 관심이 높습니다. 실제로는 개발도상국보다 더 부요하지만 그에 따른 평안 없는 편안한 삶을 살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옮긴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와 복음의 핵심을 무엇으로 제시하는가에 대한 이 글은 유진 피터슨이 책에서 밝히는 영성형성의 개념이 세속화되고 있고, 교회조차도 주변 문화와 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비슷해졌다고 탄식하는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를 하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시급한 사안에 속한다. 우리 주변의 문화가 영성 형성의 개념을 끊임없이 세속화시키고 있는 상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가 속하여 살아가고 글을 쓰며 가르치는 무대인 교회조차도 주변 문화와 대항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비슷해져 버렸기 대문이다. (p.30)
모든 능력은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능력은 실제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땀 흘려 수고함으로 얻은 땅의 소산, 학업의 결과, 성장은 응당 내 스스로 그 업적을 이룬 것 같아 보여도, 그 일이 그리하도록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제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10년 동안 박사학위를 받고 이제 원하던 학교에 임용이 되었는데 췌장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다면 정말 그러합니다. 정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편 127:1)는 말씀이 실감 납니다.
하나님을 능력으로 이해하는 신앙의 한계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는 능력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발전하게 합니다. 또한 어쨌거나 살리는 능력, 생명의 능력은 좋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거기에 두면 우리 삶은 혼란에 빠집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그 안에서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기도하던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의 능력을 왜 베풀어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넘어선 원망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원인을 찾으려 하는 합리주의적 사고는 그 학생이나 부모, 혹은 그와 관련된 누군가의 죄 때문에 징벌하신 게 아닐까 몰아세우고 우리로 절망을 깊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능력의 복음을 구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능력의 바른 이해
성경에서 말하는 능력(옮긴이가 인용한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에서 말하는) 그 능력의 본질은 십자가입니다. 세상은 부끄러워하나 우리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능력은 남들보다 앞서고 난 뭘 해도 안 죽는 불사의 능력이 아니라, 기꺼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능력,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능력은 능력인데 세상이 주목하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능력의 복음을 찾아야 합니다. 얼마나 고통당하지 않느냐의 능력이 아니라 얼마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느냐의 능력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관점, 아니 온 세상도 아니고 미국과 그 뒤를 따르는 실용주의 합리주의에 매몰된 한국의 관점에서는 그래도 살리는 생명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에 지나치게 목매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능력이 아닌 무엇이 우리에게 복음이 될 수 있을까요?
2. 사랑의 복음
사랑 없는 결혼, 하나님 없는 천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저는 우리의 복음을 사랑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결혼의 참된 이유, 가족의 참된 이유를 사랑에서 찾아야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결혼에서 사랑이 아닌 다른 현란한 조건들만 남게 되면, 그 결혼의 가치는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의미로 타락하고 맙니다. 건강이나 외모, 경제력 등이 결혼 조건이 될 때, 결혼 이후에 불의의 사고로 그것들을 상실하게 되면 배우자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그저 이 세상에서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좋은 아파트에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맛있는 진귀한 음식들을 잔뜩 먹고 즐겁게 노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며,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다른 무엇도 필요 없는, 그 무엇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천국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사랑받는 자가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은 본래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로 다가올수 없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 그 사랑 받는 줄을 아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사랑을 듣고 경험하기 전에, 율법을 접하고 거룩을 요구받으면 사랑이 왜곡됩니다. 사랑을 머리로만 배우면 알기는 하는데, 그 사랑을 믿는 삶에 깃드는 샬롬이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이 사랑을 아는 자 받은 자가 그 사랑을 소개해주고 직접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잘 알 수 있도록 성경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하지만 그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율법과 복종의 질서를 뽑아내는 자들과 이단들의 훼방이 만만치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기도, 그 사랑에 반응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자격 없는 나, 사랑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나를 사랑해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고 믿는 자는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집니다.
사랑의 순종
이 사랑에 관해 조금 더 진술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건적인 복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예배할 일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녀와 친구를 부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순종, 사랑의 순종을 기대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부터 줄곧 기대할 필요 없을 것 같은, 기대하면 안 될 것 같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니다. 조건적 사랑을 훌쩍 뛰어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듯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참으시고 기다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이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나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지금까지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내야만 하는 삶이 아니라, 하고 싶은 삶을 삽니다. 사랑하고 있는데 더 사랑하고 싶은 삶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복음입니다.
3. 복음의 핵심.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은 능력의 복음이 아니라 사랑의 복음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복음의 핵심을 논의할 때, 생명의 능력은 복음의 기초라기보다는 결과,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결과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에게서 넘치는 사랑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어 다스리게 하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부부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사랑의 결과로 생명이 잉태됩니다. 교사나 목사나 어떤 성도라도 사랑이 없이는 단 한 명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옮긴이가 말한 문장에서 시작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복음의 핵심"은 이렇게 수정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 사랑의 능력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도 그분을 사랑하는 제자,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멸망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지 않으실래요? 여전히 궁핍하고,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곤고한 중에 있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와 함께 하는 가족과 동역자들을 사랑하는 삶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런 사랑받고 싶고, 더 받고 싶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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