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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

명제로 살펴보는 제자도 "예수 따름과 자기 부인"

by 샬롬보금자리 2021. 4. 1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장 34절)


1.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

  이 성경 구절은 제자도의 대표 구절로 인용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영접하는 것을 구원의 시작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제자도라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하고(내려놓음) 내가 하기 싫은 일들로 대표되는 십자가를 지는 삶(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하는)으로 이해합니다.

과연 그런가?

  그렇게 이해하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이전세대에는 참 당연해 보인면도 있었지만 최근들어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꼭 십자가를 지는 삶이어야 하느냐? 이런 반론을 펼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행복한 일인데 너무 우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죠. 복음이라는 단어가 기쁨을 내포하고 사용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십자가를 저주의 대상으로만 보는 구약적 관점이 녹아있는 것, 혹은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자세에서 비롯되는 단편적인 이해입니다. 자기 부인이나 십자가를 삶의 어두운 요소, 어둠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예수님을 믿는 삶을 긍정적인 빛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복음 같은데서는 이런 구분이 실제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둠속을 걷는 법이라는 책에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목사는 어둠과 빛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새벽이나 해질녘을 예로 들며 어둠까지도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부인과 십자가가 죽음을 상징하고 그 죽음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하기 싫은데 어쩔수 없이 끌려가야만 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당시 상황, 문맥

  실제로 공관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뒤에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아 죽임 당하고 제 삼일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직 이 내용은 제자들에게만 공개된 내용이었는데,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는 예수님이 고난당하면 안된다고 막아섰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꽃길만 걷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꾸중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꾸짖으신 예수님은 보다 분명히 제자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제자들, 예수님이 고난 당하는 것(자신들이 고난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것이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 문맥을 생각할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은 그 의미가 좀 더 선명집니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수행을 통해 자기 욕망을 다스리는 종교적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또한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소대장 같은 모습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믿는 것,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예수님을 흠모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고 그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서두에서 말한 단순한 자기 희생이 핵심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제자도의 첫걸음이며 그 결과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제자도를 설명할때,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지는 삶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식의 설명이 많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은 논리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은 맞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고 해서 그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제자도 성경구절을 크게 2부분으로 나누어 명제로 설명해보겠습니다.(수학에서 말하는 참, 거짓을 논하는 명제)

2. 명제로 보는 참, 거짓

  일단, 명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논리학, 철학, 수학, 전산과학 등에서 '참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있는 의미있는 평서문'을 명제라고 합니다.

명제 p: A -> B, A 이면 B이다.
명제 p의 : B-> A, B 이면 A이다.
명제 p의 : A -> ~ B, A이면 B가 아니다.
명제 p의 대우: ~B -> ~A, B가 아니면 A가 아니다. 

  명제와 대우 명제는 참과 거짓이 같다. 명제가 참이면, 대우명제도 참이고, 명제가 거짓이면 대우명제도 거짓입니다. 명제가 참이라도 명제의 역, 이가 참인 것은 아닙니다(참일수도 있고 거짓일수도 있다. 논리적 보증 못한다). 

*혹시 명제, 대우 명제에 대해 더 아록 싶으신 분은 EBS 지식 클럽 동영상을 참고하세요. (설명을 잘해놓았네요)

 

대우 명제는 왜 필요할까?

[대우 명제는 왜 필요할까?] 대우 명제는 어떤 명제를 기준으로 그 결론의 부정을 가정으로 하고, 가정의 부정을 결론으로 하는 명제를 말하며 항상 참과 거짓이 같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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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도를 명제로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구분해 보겠습니다.

A: 나(예수님)를 따름
B: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

명제: A -> B
명제: 나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

  이 명제의 역, 이, 대우는 다음과 같이 됩니다.

역 명제: B->A,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나를 따르는 사람이다.
이 명제: A->~B,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다.
대우 명제: ~B -> ~A,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아니다

  읽으면서 느끼셨을수 있겠지만 흔히들 역 명제를 참이라고 착각합니다. "사랑하니까 선물을 준다"는 것을 "선물을 줘야 사랑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죠. 물론 그럴수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있죠. 필요충분 조건으로 말하자면, "선물을 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도의 역 명제를 보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이 말인즉슨, 앞서 말했던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 중에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을수 있는 겁니다. (무섭죠.. .ㅜ.ㅜ)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되어 있다'는 것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중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은 같은 의미로 이 됩니다. 

3. 사랑에서 비롯된 자기 부인, 자기 내어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자연스레 자기 욕구를 내려놓고 힘든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먹고 싶은 것보다 연인이 먹고 싶은 것을 함께 먹고 싶고, 그 사람이 원하는 일이나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그 일을 해주고 싶어 하는 것이죠. 자기를 부인해야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부인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소원이 그를 위해 수고하기를 원하는 것, 그 일에 자기를 내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는 그 사랑에 참여한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부부의 헌신과 수고가 배우자 관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무나 그를 위해 희생할수는 없죠.

  마찬가지로 제자도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일차적 수용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자기 희생이나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랑이 헌신의 전제, 조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 부인과 고난을 자처하는 삶을 사는데, 그 안에 사랑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목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예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봉사는 제자도와 연관이 없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밤낮 수고하는 남편, 부모의 희생이 참 대단한 것이지만, 가정에 대한 사랑과 자녀에 대한 사랑이 희미해질때 그 수고는 자연스레 내 수고의 댓가를 계산하며 불평하고 원망하게 되기 쉽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사랑하지 않아도 하는 그 행위 자체가 대단해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참 힘들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제자도로 읽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하기 싫어도 쳐서 복종시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예수님이 기대하는 제자(사랑하는 이)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넘치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자기 부인, 자기 내어줌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서로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주장하지 않고 영광을 서로에게 돌리고 서로를 위해 사역하시죠) 그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다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확장되어, 예수님도 그 연장선에서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이 사랑에서 비롯된 자기 비움, 자기 내어줌이라는 점이 기독교의 독특성입니다. 

  말하자면, 희생과 수고는 예수님이 제자들(그리스도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는 그 과정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음의 길로 스스로 걸어가신 것이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고통이나 희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풍성한 것입니다.

  사랑이 생명을 만들어내고, 사랑이 생명을 지키고, 사랑이 생명을 풍성하게 합니다.

  오늘 다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노래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사랑을 따라, 나도 가족과 친구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는 고통과 수고를 소망해 봅니다. 샬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