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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

욥기 2장1-13절 말씀 묵상 / 또 하루는.. 그때에

by 샬롬보금자리 2018. 1. 2.
욥기 2장1-13절 말씀 묵상 / 또 하루는.. 그때에 

G-Dragon이 부른 '삐딱하게'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제게 친절하게 알려주었었고, 얼마전에 본 영화 '강철비'에서 ost로 삽입되어서 현실의 아픔을 마주하기 버거울때 어울리는 노래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특히 그 노래 가사중에.. "하늘에다 침을.. 캬~악!!"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이 무척 불경스러우면서도, 눈물이 핑 도는 공감을 일으키기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눈물어린 '삐딱하게' 노래가 어울리는 것 같은 아픔이 절절한 본문입니다. 



1. 또 하루는..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겠느냐?)

1절은 "또 하루는" 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반복되는 일상 중에 어느 한날을 주목한 표현이지만, 오늘 본문을 이끄는 첫 단어로 읽을때는, "또"라는 반복의 의미가 크게 와 닿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어느 한 날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는 무섭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와 사단의 의심이 충돌되며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서 샬롬을 누리거나 잃어버리고 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루에 벌어진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고 사단에게 먼저 묻습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서는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사단은 욥의 온전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모든 것을 동원해서 자기 생명을 지키려고 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뼈와 살을 치면.. 그 몸에 질병이 임하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실제로.. 욥의 아내는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며..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말합니다. 

아내에게 임한 질병은 아니었지만, 옆에서 보는 것 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단이 기대한 것이었고, 충분히 그럴만한 것이기도 해 보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힘겹게 온전함을 지켰으면, 그 다음에는 뭔가 위로가 될 만한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고난이 올때 처음의 온전함을 지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원망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원망할까 싶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욥은.. 아내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을수 있다..는 것이 욥의 생각입니다.
참 대단한 욥이구나 싶고, 이 정도는 되어야… 온전하고 정직하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의 삶이구나..
인정이 됩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강한 저항감이 있습니다. 
욥의 이 고백은.. 그 대단함 만큼이나.. 철저하게 자기 고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누군가 옆에서.. 욥처럼 고백하라고 위로하려 든다면,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말립니다. 그것만큼 잔인한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 앞에서 겸허히 수용하며, 복과 화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하는 것은 누가 깨달아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사람의 의로운 관계안에서만 나오는 샬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식이나 방법으로 그것을 깨닫게 해주려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교만이며, 위선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샬롬 가운데서 고통을 수용하는 것은 참으로 멋지고.. 하나님이 기뻐할 만합니다. 

하지만, 어설픈 동정이나 위로? 또는 정답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하나님의 뜻을 포장한 자신의 깨달음을 강요하는 것은.. 
그 고난 가운데 두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나 위로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욕한다고 번역한.. 단어는.. Barak인데.. 본래는 찬양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욥기 1:21에서도 그렇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단어가 역설적으로.. 공진을 이루는 저주로 오염되어버리는 삶의 짙은 절망이 참 무섭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상하고 의도하고 있는 실체가 바로 사단임을 아니 경계가 됩니다. 
정말 근신하며 깨어 있어야겠다. 다짐이 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는 내부와 외부의 질문에..
내가 여전히 나의 온전함을 굳게 지킨다고.. 답하는 내가 되고 싶습니다.


2. 그 때에..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욥의 친구 세사람이 욥에게 재앙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모였습니다.
욥을 보고는 자신의 몸에 재앙이 임한것처럼.. 슬퍼하고 애도합니다.
소리 지르며 울고, 자기 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일 동안 욥과 함께 땅에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욥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그 고통이 심함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도 할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의 좋은 의도-위문, 위로-가 읽혀집니다.

나도 살면서 고통을 봅니다. 내 고통이 아니기에 깊게 체율하는 것이 어렵고, 또 그렇게만 살 자신이 없기에 수 많은 고통을 외면합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뉴스들을 보면, 충격적인 뉴스와 소식들을 접하며 엄습하는 고통으로 진통을 하다가 이내 그 고통을 떨치려는 안쓰러운 몸짓들을 많이 봅니다.
그렇게.. 고통을 함께 겪는 것이 너무나 힘든 세상입니다.

고통이 다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알지만, 결코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아니 대체로 피할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당하는 고통을 보면 위로하고 힘을 얻게 해주고 싶습니다. 
동시에 나 자신과 연결된 그 고통의 가닥을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섵불리 위로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채근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욥을 위로하려고 약속하여 모여든 친구들을 보니..
나 역시 이 친구들처럼 내 문제로 여기듯이 울고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온 삶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내가 죽을 것 같다고.. 내 안에서 먼저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독감으로 함께 고생하던 아이들의 짜증을 받아내고, 그 안에 담긴 고통의 절규에 함께 하는게 참 버거웠던게 기억납니다.

죽음과 생명이 결국은 핵심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라는 말은.. 죽음을 전제한 말이었습니다. 
사단이 욥을 시험할 근거로 동원한 지식도 죽음의 위력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 욥의 뼈와 살을 치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한다는 말에 담긴 확신어린 미소가 보이는 듯 합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 온전함을 지키거나 버리는 기준이 되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내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죽어가는가? 살아있는가? 살아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마주선 나를 돌아봅니다.

나에게 생명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안에서 왕노릇하는 샬롬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나의 생명입니다. 

이리 곱씹어 보니.. 욥이 말하는 내용이 좀 더 너그러이 품어집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

고통을 보며, 함께 있어줄 수 있는 방법은.. 이 땅에 그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참 생명이 하나님께 있어서 사단이 고난으로 생명을 위협하여도 정작 그 생명은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섭리아래.. 사단은 나를 의심하며 죽음의 공포가 섞인 세상에서 나를 찾아옵니다. 
나의 안위를 위해서 하나님까지도 욕할것이라며 삶의 고난의 채찍을 휘두르며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에.. 기왕이면.. 함께 땅에 앉아있어주는 세친구, 고통이 심함을 보아주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라기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음미하며... 고통을 마주하면서도 온전함을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네가 내 종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이리 말씀하시는 주님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신 것을 알기에.. 삐닥하게 노래를 부르며 눈물지으면서도 지금 다시 샬롬을 누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