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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

[소감]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by 샬롬보금자리 2019. 8. 30.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14. 종교-다윗과 웃사 (p.223-241)를 읽고. 

 

유진피터슨의 글은 참 좋다. 분명히 글을 읽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오래된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이 하얀 천막에 비취어 흥미를 자아내는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이야기가 선명해지고, 하나님이 보인다. 

 

오늘 읽은 내용은 다윗이야기 중에서 법궤를 가져오다가 웃사가 죽은 이야기를 가지고 종교에 대해 말한다. 그의 표현대로 옮기자면, "모든 신앙 집회 장소에는 "하나님을 주의하라"는 푯말이 붙어 잇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이 이야기의 시작이고, 그 이야기에 담긴 의미는 하나님께 주목하기 위해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와 시간에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련된 장소와 시간은 영광스런 장소와 시간이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장소와 시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웃사는 법궤를 만져서 죽었고, 다윗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날 춤을 추었다. 

 

1. 법궤 - 일상에서 구원과 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법궤는 모세가 하나님께 명을 받아 만든 것이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고(돌판),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만나), 그들을 구원해 주신다(지팡이)는 사실을 기억할수 있게 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증거이다. 이스라엘에게 법궤는 그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의 계시된 성품에 분명하게 그리고 역사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구심체였다. 

하지만, 히브리 백성들이 그것(그리고 훗날의 성전)을 마술적 힘과 행운을 가져오는 물건인 양 다룰 때면, 선지자들은 사력을 다해 그들과 맞섰고, 비인격적 유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적 하나님을 섬기라고 도전했다. 이렇게 법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증거하기 위해 존재 했다. 

 

법궤는 단순히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계속해서 사람들의 삶에 쓰이는 물질(돌, 도기, 나무)을 재료로 삼아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에서 이와 가장 유사한 것이 성례전이다. 성례전은 평범한 물질을 재료로 삼아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물질 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일상(물, 빵, 포도주) 속으로 들어오셔서, 바로 거기서 구원과 성화의 일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p.233)

 

2. 웃사는 왜 죽었을까?

다윗은 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게 했다. 제사장이었던 웃사와 아히오(웃사의 동생)가 이 법궤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그들은 소들이 끄는 짐수레에 법궤를 실어 오던 중에 소들이 뛰었고,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붙들었다가 쓰러져 죽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를 치셔서 그가 죽었다고 한다.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6-7)

 

이야기의 틈새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실수 있는 분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셨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유진 피터슨의 말을 빌리면, "때때로 성경은 답변보다 질문을 줄 때가 많다!". 이야기에서 이런 틈새(자세한 설명이 없는)는 그것은 우리더러 그 빈 곳을 채워넣으라는 암묵적인 초대라고 한다. 무리가 없는 범위 내에서(우리의 상상력 발휘는 본문의 맥락에 비추어 무리가 있으면 안된다) 얼마든지 기도하는 상상력을 발휘해 본문의 세계로 들어가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하나님을 지키는 웃사

유진 피터슨이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이 웃사가 죽은 이유에 대해 상상한 것 중에서) 주목한 역사적 통찰은 이런 것이다. 주제넘게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려들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이 보기에 '웃사는 하나님을 상자에 넣어 가두고, 세상 오물이 묻지 않도록 하나님을 지킬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양 나서는 사람'이다. 교계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고 일침을 가하는데 한국교회 말고도 그런 교회들이 있다는데 놀랐다. 어디든 안그러랴마는... (죄인들과 무지한 대중으로부터 하나님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인줄 알고 사는 자들.. 웃자..)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유진 피터슨은 웃사의 반사적인 행동-소가 비틀거리자 법궤를 고정시키려고 손을 뻗은 행동-이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라고 한다. 웃사가 자신을 법궤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여긴 오랜 망상이 자연스레 나온 것이다. 유진 피터슨의 설명대로 모세의 율법은 법궤는 사람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되고, 법궤에 부착된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서 운반해야 한다. 그런데 웃사는 이러한 모세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블레셋식 최신 혁신기술 -황소가 끄는 수레)을 이용한 것이다. 황소수레는 레위인들보다 법궤를 운반하는데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비인격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구별된 사람들 대신에 효과적인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인격적인 수단을 밀어내고 비인격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p.235)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

유진 피터슨은 웃사를 거룩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효과적 방법론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대표격으로 꼽았다. 웃사는 하나님을 책임 관리하는 담당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하나님을 집어 넣고 계속 가두어 놓았다. 유진 피터슨은 이런 삶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라고 단정한다. 인간이 만든 신성하고 거룩한 것들에게서 생명이 있을리가 없다. 거대한 금신상이든지, 높은 산에 고즈넉한 종교건물이든지 그것은 인간을 위축(두려워)하게 하지만 생명을 주지(사랑하게)는 못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책임 관리하는 대상이 아니시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건물을 짓고 성전이라고 거룩을 부여하고, 권사님들만 올라가서 강단 청소를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책임지신다. 

 

유진 피터슨은 종교는 이런 일의 온상이라고,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할때의 첫 마음, 즉 삼가는 마음과 경외감, 사랑과 믿음의 정신은 신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부식되어 문드러졌고 마침내 흔적도 남지 않게 되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3. 하나님을 기뻐하는 다윗

웃사의 정 반대편에는 다윗이 있다. 유진 피터슨은 다윗을 평생 위험속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함께 살았고 하나님 안에 살았던 사람으로 이해한다. 다윗은 결코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지 않았고, 그에게 하나님은 구원자와 주권자이시며 목자와 바위였다고 한다. 다윗은 자신의 어려운 삶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활짝 열고 그분을 신뢰하며 호연지기를 가지고 대범하게 사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화내는 다윗

실제로 다윗은 웃사가 죽자 하나님께 화를 냈다. 유진 피터슨은 다윗이 하나님께 화를 내고도 죽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했다. 화를 내는 다윗은 찬양하고 있을때의 다윗 못지 않게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다윗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모습이며 하나님과 실제의 관계를 맺는 모습이다. 화가 나고 속상함과 두려움..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이기에 온전히 꺼내놓을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다윗에 대해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다" 대신 웃사에 대해서는 "결코 하나님께 화를 낸 적이 없고 예의 바르고 깍듯했다"고 한다. 인격적이지 않은 관계이니 거룩이라 앞세운 하나님에 대한 비인격성만 남았을 뿐이리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6:8-9)

 

다윗은 춤을 춘다

유진 피터슨은 다윗이 춤을 추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 안에서 다윗이 자신의 이해력과 통제력을 초월한 삶, 그 신비와 영광에 다가갔다고 보았다. 사랑으로 제정신을 잃을 때, 너무도 충만한 의미를 발견할 때,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될 때 춤을 춘다는 것이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은 왕으로서 행하는 종교적 직무나 국가 예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은 그저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란다. 맞다. 너무나 맞다. 이런 춤을 본 적이 있다. 나도 그리 찬양한 적이 있고 그 찬양이 너무나 그립다. 

 

유진 피터슨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열기 전까지는 결코 온전한 우리 자신일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실재에 주목하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반응하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예배, 종교집회는 우리가 자아집착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주목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일예배나 성경공부에만 계셔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주목하기 위해 따로 떼어놓은 시간과 장소라는 것이다. 이런 시간과 장소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그분께 주목할 가능성이 없다고 조언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다시 그런 시간과 장소를 지배하려 들고, 하나님을 그 시간과 장소에 가두려들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웃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는 위험 표지판을 여기저기서 발견하는 모양이다. 

출처: John the baptist artwrok

4. 소감: 하나님과 춤추는 삶

일전에 선배가 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하나님과 춤추는 삶을 말했었다. 춤을 추면 높고 낮음이 사라진다고 한다. 계속 위치가 바뀌기 때문이고 역할이 바뀌기도 하는 모습이 과연 그러하다. 삼위 하나님이 그리 춤을 추시듯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되심 같이,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과 춤을 추는 삶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서 있음직 하다. 그 하나님과 춤추는 삶을 다윗의 춤에서 보며 나도 춤을 추려 한다.

 

춤을 출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 일상에 있는 것들로 구원하시고 성화를 이루신다는 점이다. 참으로 평범하면서도 새롭게,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 사실만큼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세속을 당해낼 어떤 비법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초월을 주장하는게 아니다. 일상에 다가와 손내미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런 점에서 볼때, 내가 춤출 때 주의할 점은 내게 있어서 웃사의 비극은 멀리 있지 않으며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숨막혀 죽을듯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내 몸도 소돔을 돌아보며 소금기둥이 되어버리는 롯의 아내마냥 세속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서 시작했는데 그 구원을 이어나가려고 내 스스로를 하나님의 인격에서 멀어지게 하는 어리석은 종교성이 꽤나 커보인다. 예배와 성경공부, 큐티와 기도, 샬롬복음으로 성경을 읽고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이 하나님 보다 더 가까이 있을때 숨막히는 부정과 고독을 경험한다. 조심해야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다윗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던 것처럼 내가 그리 사는 꿈을 꾼다. 요즘 세대를 보며 훌륭한 찬양팀이 앞에서 분위기를 돋구어야 찬양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편으로는 이런 현실이 마음 아프게 들리지만, 역설적으로 감사하게도 들린다. 나 역시도 주일 오후에 그 뜨거운 찬양에 폴짝 폴짝 뛰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양복이 땀에 흠뻑 젖어들던 그 찬양이 그립기 때문이다. 사실 여전히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내 코 앞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에게로 관통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밤과 낮이 뒤바뀐 것마냥 언제 힘을 주고 언제 쉬어야 할지를 잊어버린 것 같다. 채움과 비움이 리듬을 잃어버리고나니 엉크러진 책장마냥 자리를 찾기가 힘들다. 유진 피터슨이 어깨를 토닥이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며 그 힘들고 어지러움을 이야기 해보라고 권하는 것 같다. 앉아서 굳어져만 가는 머리를 혹사할게 아니라.. 일어나 걸으며 하늘을 보고 춤을 추고 싶다. 못치는 기타지만 둘러메고 왕되신 주께 찬양하고 싶고, 아이들과 오랫만에 춤을 추고 싶다. 

 

책을 덮으며, 영화관을 나서며 감도는 여운을 간직하려는 것처럼 머문 사색을 정리하니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프린트로 뽑아서 컴퓨터와 문 앞에 붙여놓아야겠다. 

그리고 춤춰야겠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