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복음으로 보는 죽음: 참 인간됨의 역설
1. 들어가는 말: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삶
사람은 삶과 죽음을 경험합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이를 입증했습니다. 위대하다고 칭송받고 여전히 사랑 받는 위인들도 수 많은 사람들의 바램과는 달리 결국 죽었고,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사람들이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떵떵거리고 살았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우리 역시도 지금은 분명히 살아있지만 사람이기에 앞으로 죽음을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이런 한계를 인식한 사람들은 크게 2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먼저는 죽음을 반기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아직 살아있으지만 죽은 것처럼(곧 죽을 것처럼) 살아가거나, 자기 스스로 삶을 끝내는 선택(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울한 이들만이 아니라 여한 없는 인생을 예찬하고 아름답게 죽음을 지나 이 세상에 남아있는 자들은 헤아릴수 없는 세계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의 사람들, 인류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죽음을 좀처럼 반기지 않습니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제의 바램은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인류는 이전보다 생명을 수십년 연장시켜놓았고 불치병이라 여겨지던 질병들도 하나 둘 정복해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예 죽음과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나이 드는 것(Aging) 조차도 허용하지 않을 기세로 노화를 방지하는 일(Anti-aging)에도 민감하게 대응해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은 고대부터 있어왔던 당연한 반응인것 같지만, 모더니즘 이후에 더 구체화되고 실제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자본주의(돈, 맘몬), 실용주의, 합리주의가 인간 자신을 기준삼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고(삶과 죽음, 선과 악, 빛과 어둠, 젊음과 노쇠함 같은) 끊임없이 이런 가치들을 대립시키며 사람들이 욕망하는 미래를 위해서는 나쁜 것을 제거하고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오늘날 현대 사회는 과학기술을 통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이루려고 하고 있고, 그런 시도들을 지지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로 대표되는 크고 작은 네모난 유리화면(TV와 스마트폰)을 통해 건강한 삶,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매혹적으로 선전하는 광고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이것들을 보고, 본 것을 믿으며 , 그 본것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그것을 위해 소비합니다. 그 뒤로도 만족할 틈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갖기 위해 본래 목표로 제시하던 건강과 행복을 얻기 위해 그것들(건강과 행복)을 희생하는 경제적, 시간적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휩쓸려 갑니다. 내 삶에 대해서 도무지 어떤 은혜와 만족은 바랄수 없고, 그것들 조차도 돈을 내고 시간을 투자해서 배워야 한다고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죽음을 피하고 싶어서 죽음을 감수하거나 죽음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삶이 일상이며 정상적인 삶, 당연한 삶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세상,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세상,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다스리기를 원하는 세상이란 무엇일까를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완성된 외부의 정답이 아니라 완성되어가는(formative) 삶을 추구해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복음에 집중하는 샬롬복음을 통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살펴보고, 복음으로 사는 삶의 실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2. 죽음으로 완성되는 삶
지난주에 저와 창세기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던 청년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청년이 존경하던 전도사님이 암투병 끝에 소천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정되어 있던 일대일 성경공부를 미루고 장례 예배를 다녀와서는 '죽음'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그냥 시간 속에 묻어두지 않고 소감을 글로 끄집어 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소감'이라니... 이전에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소감이었습니다. 죽음을 둘러싼 감정과 소망을 들으면서 그 가운데 복음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 소감을 촉매로 샬롬복음으로 보는 죽음을 생각해 보고, 참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과 실재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소감을 쓴 청년에게 다른 이들과 죽음과 복음에 대해 나눌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여기에 공유합니다.)
(1) 죽음이란.. (장례식에 다녀오고 나서 쓴 소감기도문)
1) 죽음이 가져오는 낯선 눈물
2019년 11월 24일 주일 오전 10시 30분에 전도사님이 1년 암투병을 하다 하나님 곁으로 갔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분주히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가려고 바쁘게 나서는 중에 날아든 문자 한통이 제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했습니다. 목사님은 주일 낮예배 설교를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한 전도사님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고,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다가 애써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2) 죽음에서도 피어나는 감사
전도사님은 한달 전에 급격하게 건강이 안좋아져서 병원에 다시 입원을 하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시기 전날에 목사님의 기도를 받은 뒤에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다 마치니 병상에 누운 전도사님의 손이 사르르 풀리더니 눈을 감으셨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 임종의 상황을 설명해주실 때 전도사님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 느낄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도사님이 육신의 고통중에서도 마음에 평화를 머금고 하나님께로 가신것 같아서 주체할수 없는 아쉬움과 슬픔을 넘어서는 감사가 나왔습니다.
3)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영원함
저는 항상 주일마다 저를 보며 웃어주시고 저를 항상 안아주셨던 전도사님의 따뜻한 품은 절대 잊지 못합니다. 저에게 기도할때는 소리내서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해주셨던 그 모습을 아직도 생생합니다. 전도사님이 자신의 아픈 몸을 이끌고 교회에 나와 기도하셨던 모습, 암투병 중에도 만날때마다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시고, 걱정하지 말라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셨던 모습, 그 순간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앞으로도 잊혀질 것 같지 않습니다. 비록 그 모습은 다시 볼수 없겠지만, 전도사님의 헌신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사님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평안한 영원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4) 죽음이 가져오는 삶의 의미
장례예배를 다녀오면서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깊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세월이 티끌같은 시간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빠르게 모든 것이 그져 스쳐지나가는 듯한 짧은 세월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니 이 세상이 모두 헛되게 느껴졌습니다. 이 세상을 아둥바둥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무슨 의미일까 싶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사는 삶과 세상이 잘못되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죽음을 가까이에서 만나고나니, ‘하나님 없는 삶은 정말 한심한 인생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이상 세상적인 욕심에 내 소망, 소원에 집착하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5) 기도 - 진정한 삶
주님, 죽음을 마주하고 보니 내가 그동안 살아온 생명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이 주 은혜임을 오늘도 고백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소식으로 힘들었던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니.. 마냥 답답하고 화가 나던 제 마음이 녹아내리네요. 억울했던 마음이 사랑과 이해로 바뀌었습니다.
주님, 제 삶이 지금의 이 자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지금의 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주님이 없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나를 남들과 비교하는 삶이 아닌, 열등감 느끼는 내가 아닌 진짜의 내모습대로 보여지는 제가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이 남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해주세요. 그렇게 살수 밖에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제 삶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주님 없이는 못삽니다. 아무것도 아닌 저를 죄인인 저를 주님이 주관하여 주시고, 일으켜주세요. 부르시면 ‘네’하고 어디든 가겠습니다. 저를 주님의 자녀로서 사용하여 주세요. 지금 가진 것 모두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주님 앞에 바로 설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소감을 나누고 자연스럽게 한참을 죽음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이 청년은 이전에도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영향을 주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그냥 넘길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상에서 질병이나 죽음을 외면하고 분리시켜 문제로 취급하는 시대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고백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그런 문제거리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만날 소중한 사람의 죽음, 그리고 나 자신의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실존의 근거인 하나님 앞에서의 눈물과 탄원, 감사와 소망의 역설을 짚어가는 것은 무척 중요할 것입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죽음
1) 하나님이 계획한 인간의 생명과 죽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유일하게 하나님 자신의 모습,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동물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만들어진 유한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생령(살아있는 존재)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심장이 뛰고 몸을 움직일수 있는 기계적인 육체 이상의 존재로 빚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 만이 하실수 있는 마땅한 권한인 '다스림'을 인간의 사명(창 1:26)과 복(28)으로 주셨습니다.
26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온갖 가축과 들짐승과 땅 위에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자."
27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워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창1:26-28, 쉬운성경)
인간이 다스리게 하자는 하나님의 계획은 실제로 에덴동산에서 실행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스림(돌보고 지키게 하심)을 시작하는 순간에 죽음을 경고하셨습니다.(창2:17) 바로 이 부분이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아직 실행된 적 없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절대성을 갖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더 강력한 핵폭탄이 만들어져서 엄연히 존재하지만 아직 실행된 적이 없고, 꼭 폭파시켜야 하는 필연성을 갖지 않은 것 같은 죽음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15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동산을 돌보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16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마라. 만약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2:15-17, 쉬운성경)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죽음을 경고할때 이 죽음은 무척이나 낯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온전하시고 영원하신 분으로 참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무엇인가 부족할 가능성, 단절되는 죽음을 생각하고 경고하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마치 공기가 일상인 지구에 사는 사람이 어느날 공기가 없을 것을 상상하는 것 같은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창의력 갑오브 갑이셨으니..) 하나님도 죽음을 본적이 없고, 사람도 죽음을 본적이 없는데 죽음을 경고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고 불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과는 달리 아마 동물이나 식물은 죽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이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어벤져스 영화를 보면서 히어로를 흉내내기도 하지만, 지금 내 존재를 위협하는 임박한 어떤 죽음의 형태를 내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영원히 살것처럼 착각하고 하루 하루를 담담하게 살아가는 우리 처럼 말입니다.
이 당시에 사람이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생명을 기본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대로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돌보고 지키게(다스리게) 하시면서, 사람에게 땅위의 모든 식물과 열매를 먹을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중에는 생명 나무의 열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 열매를 먹으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고 그 이유까지도 알려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시면서 의도한 사람의 삶은 생명이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것이었고, 죽음은 구지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아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미리 주의를 준 예외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죽음, 하나님이 미리 경고하신 죽음의 의미는 '징벌적 죽음'이 아니라 '인과적 죽음'이라 여겨집니다. "너 내말 안들으면 죽여버린다!"는 위협이 아니라, "너 그렇게 하면 죽을꺼야.. (그러니 먹지마)"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악과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와 관련해서는 '샬롬복음으로 보는 자유, 참 사랑의 절정'에서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런 의도와 배려와는 별개로 생명나무와 죽음에 대한 경고를 통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은 유한함을 내포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크게 2가지 근거를 찾을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인간과 동물에게 양식, 먹이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에게는 온갖 씨 맺는 식물과 씨가 든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양식으로 주셨고, 땅의 온갖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의 생명있는 모든 것에게는 푸른 식물을 먹이로 주셨습니다(창1:29-30). 동물과 사람은 플라스틱이나 기계처럼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을 먹고 에너지를 얻어 생명을 연장하는 존재였습니다.
29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 위의 온갖 씨 맺는 식물과 씨가 든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그러니 너희는 그것들을 너희 양식으로 삼아라.
30 또 땅의 온갖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다니는 생명 있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푸른 식물을 먹이로 준다." 그러자 그렇게 되었습니다.
(창1:29-30, 쉬운성경)
또한,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창2:9)가 있었다는 것이 자신 안에서 온전한 생명이신 하나님과는 다른 생명의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인간은 자존하시는 하나님과는 달리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과 다른 인간이 가진 그 생명의 한계가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가깝게 살게 하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실행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한 '생명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으며 삶을 지속하게 해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들을 그 곳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창2:9, 쉬운성경)
(이는 마치 내가 사용하는 물건이 내 주변에 있을 때(내가 사용할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살아있고, 서랍이나 옷장안에 갖혀있는 것 같이 나와 상관없이 존재할때 그 존재의 의미는 나와 관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 못지 않게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이 가진 생명을 다 주시고 공급하셨지만, 인간이 하나님과 같을수 없는 한계를 명확히 알려주심으로 인간으로서 생명을 풍성히 누리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고(기원), 그 생명을 연장하는데 필요한 양식을 주셨고(생명나무까지), 생명을 앗아갈수 있는 죽음의 가능성(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을 경고하셨습니다.
2) 약속된 죽음, 단절된 생명
아담과 하와는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의 계획과 죽음으로부터의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생명을 누리며 죽음을 보지 않는 삶을 계속하지는 못했습니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났는지 자세히는 알수 없지만 아담이 130세에 셋을 낳은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리라 추측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에서 죽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것은 뱀의 유혹(창3:4-5)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뱀의 유혹과 거짓말을 듣고 죽음이 약속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לקח:take) 먹었습니다(אכל:eat)(창3:6). 자신을 사랑과 신실함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자신이 다스려야 할 뱀의 말을 들어서 여자가 스스로 선택해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편도 그 상황을 보고 막지 않고 동일하게 받아서(לקח:take) 먹었습니다(אכל:eat).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죽지 않아.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고 너희 눈이 밝아지면, 선과 악을 알게 되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까 봐 그렇게 말씀하신 거야."
6 여자가 보니, 그 나무의 열매는 먹음직스러웠으며, 보기에도 아름다웠습니다. 게다가 그 열매는 사람을 지혜롭게 해 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 열매를 옆에 있는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으며, 남자도 그것을 먹었습니다.
(창3:4-6, 쉬운성경)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고, 여자는 뱀이 속여서 먹었다고 항변하지만(창 3:12-13), 뱀이 거짓말로 유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강제로 먹인 것이 아니라 여자가 보고,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게 해줄 것 같다고 여겨서 스스로(능동) 그 열매를 따먹고 남편에게 주었고, 남자도 받아서 먹은 것입니다.
이 능동적인 행동의 결과로 남자는 자기 때문에 저주 받은 땅에서 평생토록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고(이전에는 조건 없이 먹었었는데)(창3:17),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창3:22) 반드시 죽는다는 죽음은 즉각적인 죽음으로 집행되지 않았지만, 양식을 먹어 생명을 연장하던 사람은 수고를 통해 양식을 마련해야 했고, 보다 온전하고 완전한 생명나무의 열매는 더 이상 먹을수가 없게 되면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러므로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창3:17, 쉬운성경)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뻗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창3:22, 쉬운성경)
이렇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며 누리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아직 실행되지 않았지만 언제든 실현될수 있는 죽음을 현실속에 내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으로 비유하면, 언제나 필요할 때 충전할수 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아직은 배터리가 남았지만 충전할수 없는 유한한 삶, 곧 약속된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3) 실현된 죽음 - 살인, 사망이 왕노릇 하는 삶
죽음을 가져온 최초의 인간은 아담이고 선악과를 먼저 먹은 것은 하와이지만, 성경에서 최초로 죽은 사람은 아담이나 하와가 아닙니다. 그들의 아들 아벨입니다. 그의 형 가인이 아벨을 들로 불러내서 쳐죽였습니다.(창4:8) 그의 죽음은 아직 배터리가 남은 스마트폰을 박살 낸 것 같은 폭력에 의한 희생이었습니다. 이렇게 최초의 죽음은 살인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들에 나가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창4:8, 쉬운성경)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자신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가인이 매우 화가 나서 안색이 변했고, 하나님은 이것을 간과하지 않고 죄가 문 앞에 엎드려서 너(가인)를 원하지만 더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죄를 다스리라고 알려주셨습니다.(창4:7)
4 아벨은 처음 태어난 아기 양과 양의 기름을 바쳤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매우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왜 안색이 변하느냐?
7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창4:4-7, 쉬운성경)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지내면서도 자신이 다스려야 할 뱀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의 유혹과 거짓말에 이끌려 죄를 지은 것처럼, 가인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죄를 다스리지 않고 그 죄의 지배를 받아 생명을 빼앗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신 것처럼, 아벨의 피에 대한 심판으로 농사하는 자였던 가인을 땅에서 떠도는 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누리던 안정감을 없애는 실직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중년들의 사회적 죽음같은 혼돈의 시간을 지내면서 하나님이 허락한 생명 안에서 삶을 살아가며 참된 삶(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아가는)을 살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신의 벌이 너무 무겁다', '주께서 저를 땅에서 쫓아내셨다'고 하나님의 심판의 부당함과 '자신이 죽임 당할 것'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항변합니다. (창 4:13,14) 이에 대해 하나님이 표를 주어 가인의 죽음을 면하게 해주시자, 그는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에 정착해서 성을 쌓고 지내게 됩니다. 결국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로 죽음을 실현시켰고, 동일한 방법으로 자신이 죽을 것을 염려하며 목숨을 보전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참된 생명을 포기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생명을 유지하려 함으로 오늘날 인류가 보여주는 교만과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이 벌은 제게 너무 무겁습니다.
14 주께서 오늘 저를 땅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저는 이제 주를 만나 뵐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땅에서 떠돌며 유랑할 것이고, 누구든지 저를 만나는 사람은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나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시를 해 주셔서, 가인이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6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서 살았습니다.
(창4:13-16, 쉬운성경)
성경은 가인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인의 후손이었던 라멕을 자세히 보여줌으로 죄가 더욱 확산되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해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재촉하는지는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라멕은 최초로 2명의 아내를 가졌고, 그들에게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자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인이 형벌을 받도록 보호해준 것을 기만하며 자기중심적인 모습으로 대합니다.) 이런 라멕의 모습은 오늘날 자기 중심주의(자기 민족주의)로 나타나는 나와 타인, 우리와 그들로 구분하며 자기 우호적인 태도로 타인을 배척하는 모습에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끔찍한 교만과 생명에 대한 경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아담을 통해 죄가 들어왔고, 그 죄를 통해 죽음이 시작되었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죄를 지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알려줍니다(롬 5:12). 그 결과로 이제는 죄로 말미암아 시작된 죽음은 사람들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롬 5:14).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죽음이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추워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말하는 것처럼 힘든 상황에서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에게 주신 다스림의 권한은 행사되기 어려워졌고, 죽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지배 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를 통해 사망이 들어온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롬5:12, 쉬운성경)
그러나 사망은 아담 시대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아담이 지은 죄와 똑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마저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입니다. (롬5:14, 쉬운성경)
4) 마지막 죽음 - 예수 그리스도의 새생명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죽을수 밖에 없는 인생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참 인간의 삶을 사셨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 사신게 아니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는 삶을 사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게 하신 참된 다스림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아담이나 가인과는 다르게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고 하셨습니다(막 10:45). 아담이 지은 죄, 가인이 지은 죄, 그리고 그와 같은 죄를 스스로 짓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할 죽음의 마지막 죽음입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막10:45, 쉬운성경)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로 이제는 누구든지 주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면 죽어도 다시 사는 새생명을 누리게 됩니다(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힌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살기 위함입니다. (롬6:4, 쉬운성경)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아담이 지은 죄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하는 것을 중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생명안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을 받은 신자가) 왕노릇하게 해주셨습니다(롬5:17). 그 결과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부여되었던 통치권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15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아담이 지은 죄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죽었다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 넘쳤습니다.
16 또한 하나님의 선물과 아담의 죄는 차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이 오게 되고 모든 사람을 정죄에 이르게 했으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많은 범죄 때문에 오게 되어 많은 사람에게 의롭다 함을 받게 하였습니다.
17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의롭다고 여기시는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생명 안에서 더더욱 왕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롬5:15-17, 쉬운성경)
이 통치권의 회복은 죄가 권세를 가지고 죽음을 내세워 왕노릇 하던 것을 뒤집어서 은혜가 왕노릇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롭게 하심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할 것입니다(롬5:21). 태초에 창조시부터 유한한 인간에게 이미 주어졌었지만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생명, 그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고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하였듯이, 은혜는 의를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왕노릇 할 것입니다. (롬5:21, 쉬운성경)
(3) 참 인간됨의 실존, 죽음
유진 피터슨은 다윗에 대한 그의 책에서 죽음을 인간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가 소개하는 '인간'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을 통칭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다윗 이야기에서 인간적(human)이라는 단어와 그리스도인다운(Christian)이라는 단어가 동의어이다'(p.10), '모름지기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가장 살아있다'(p.16)라는 그의 표현이 이런 그의 인간이해를 보여줍니다.
삶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 죽음은 한계다. 인간이란 말의 의미는 언젠가는 죽는 존재라는 뜻이다. 죽음은 우리의 인간됨을 입증해준다.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p.343)
이런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유진 피터슨은 죽음을 인간의 비인간화를 막는 보호장치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시도가 초래한 죽음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자리를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유혹은 하나님처럼 되기를 시도해보라는 것이다. 인류에게 주어진 최초의 경고는 만일 그렇게 시도할 경우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시도를 하고 우리 모두는 죽는다. 죽음은 우리의 인간됨을 보호하고 보장해 주는 장치다. 인간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 하는 우리의 시도는 결국 우리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떨어 뜨린다. 죽음은 우리가 완전히 비인간화되는 것을 차단시켜준다.
따라서 참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숙고해야 한다. 죽음의 문제에 대해 충분히 주목하지 않고 그 주제를 회피하거나 완곡하게 다룬다면, 우리의 삶은 빈곤해질 수 밖에 없다. 죽음을 부인하는 것은 삶을 회피하는 것이다. (p.344)
따라서 유진 피터슨이 이야기하는 죽음은 앞에서 살펴본대로 아담이 가지고 있던 생명의 유한성으로서의 죽음을 염두한 것이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새생명을 얻어야 하는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유진 피터슨은 죽음에 대한 비인간적인 태도 3가지를 거론합니다.
1) 해결해야 할 문제거리
다윗의 노년에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의 죽음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취급했습니다.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취하는 태도인 것은 분명하나, 이 시대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죽음 = 나쁜 것'이라는 인식에 뿌리 내린 결과입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을 이전처럼 움직이도록 하려고 했고, 그게 안되자 기적적인 치유책을 찾아나섰습니다. 하지만 두가지 방법 모두 다윗을 이전의 다윗으로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태도는 마치 자신은 다윗과 같은 운명으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교만하고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신하들이 죽음을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로 취급할수록 다윗은 문제거리로 전락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거리로 취급할때 이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방관자로서 유능하고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 자신의 힘과 돈으로 무언가 구하고 사들이고 처리하게 된다. (p.348)
2) 타인의 죽음을 성공 기회로 삼기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는 다윗이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다윗이 죽어야 자신이 왕이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려도 다윗이 죽지 않자, 스스로 왕이 됩니다. 다윗이 죽은것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아도니야의 성공에 있어서 다윗은 걸림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도니야가 잃어버린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존중, 그 생명에 대한 존중은 그 생명을 제한하는 죽음을 존중함을 통해서 완성될수 있습니다.
타인의 삶은 나의 삶에 대한 제한일 수 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의 삶을 가장 많이 제한한다. 아이들도.. 배우자도.. 부모도 제한이다. 사소한 불편 정도의 제한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일에 따르는, 힘들더라도 피할 수 없는 주요 조건으로서의 제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신으로서 살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에, 때때로 그런 제한거리들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런 제한들이 사라지면 자신이 마음껏 왕 행세를 할수 있으리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삶의 제한을 존중하고 죽음을 존엄하게 대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해준다. (p.350)
3)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다윗이 죽어갈때, 밧세바는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약속한대로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잇게 하는 일입니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안되기 때문에 다윗이 죽기 전에 다윗의 약속대로 솔로몬이 왕이 되게 하는 일을 한겁니다. 다윗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안타까움보다는 다윗이 죽기전에 처리해야 하는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태도입니다. 아비삭은 다윗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있지만, 밧세바는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할 뿐 죽어가는 다윗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밧세바는 단지 책임을 다하는 행동을 한 것 뿐이다.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책임과 관계되는 한 그녀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다윗의 죽음이 임박하자 밧세바는, 다윗이 약속을 지키게끔 해서 나라가 계속 '다윗의'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해 정당하지만 염려에 가득 찬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p.352)
4) 죽음에 대한 바른 태도
다윗의 죽음에 대한 이상의 세가지 반응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고 성령님이 주시는 복을 받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과는 거리가 멉니다. 유감스럽게도 유진 피터슨은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바로 이처럼 죽음을 맞이한다고 꼬집습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거리', '잡아야 할 기회', '수행하고 바로 잡아야 할 책임'으로 취급당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을 모른다면 그럴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모른다면 그럴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생명 만큼이나 죽음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유진 피터슨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참으로 그리고 철저히 인간적인 삶의 실재- 죽음을 근본적인 경험과 폭넓은 은유로 삼는 삶-를 상세히 익히고 느끼는 일이다"고 말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다윗의 이야기를 너머 시편22편('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나온 시편)을 인용하며 예수님의 죽음을 인요하며 죽음에 대한 바른 태도를 제시합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죽음에 대해 회피하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은폐하는 일 없이 죽음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태도'입니다. 죽어가는 다윗 곁에 머물렀던 아비삭같이 아무런 이유나 필요가 없이도 그저 그 찬란하고 지고지난했던 인생을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예수님 곁에 머물렀던 여인들처럼 아무것도 할수 없고, 어떤 성공보다는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것을 자신의 할일이며 있어야 할 곳으로 여긴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22편을 통해서 죽음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자들의 조롱을 하나님 앞에 탄원했고, 언제 어떤 변화가 계기가 되었는지 알수 없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생명력 넘치는 삶에 대한 찬양으로 전환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실제로 죽고 부활하기 전임에도, 부분적으로 이 부활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 굳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부활은 현세 삶의 일부다. 시인 웬델 베리는 "부활을 연습하라"고 말한다. 다윗은 부활을 연습했다. (p.362)
3. 샬롬복음으로 보는 보는 죽음, 참 인간됨의 역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빚은 것만이 아니라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창조자로 주권자이심에도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돈이나 힘이나 어떤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마땅한 사랑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신실함의 충성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이었고,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하나님과 같은 영원을 함께 누릴수 있도록 생명 나무의 열매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자유를 주셔서 억압된 복종이나 기계적인 순종이 아닌 참된 사랑의 자기 내어줌의 순종,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리는 다스림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은 자신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이 다스려야할 뱀의 말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 선악과를 먹어도 되는지, 눈이 밝아진다는게 무엇인지 묻는대신에 하나님과 같이 될수 있다는 가능성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충성의 관계, 사랑의 관계가 깨지면서 그 안에서 누릴수 있던 생명은 다시 본래의 인간의 유한함의 죽음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끝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 대신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타인의 생명을 파괴하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지키려는 한계 안에 갖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두려워하며 자신 안에서 왕노릇하도록 내어준 죽음입니다.
비록 아담이 죄를 짓고, 우리 역시 우리의 죄로 인해 죽을수 밖에 없는 숙명아래 놓여있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얼룩진 인생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고후 5:17). 이 온전히 새로운 존재됨은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은 이미 회복되었습니다. 아직 온전하지는 않지만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는 다시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수 있는 자녀로서(롬8:15)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요1:2).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고후5:17, 쉬운성경)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두려움에 이르게 하는, 노예로 만드는 영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을 의지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롬8:15, 쉬운성경)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권세)을 주셨습니다. (요1:12, 쉬운성경)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말은 어떤 제약도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참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몇년을 살고, 얼마나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며 무엇을 누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우리의 생명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썩어질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영생이 아니라 죽을수 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누리는 값진 생명, 하루를 살아도 원없이 만족스럽고 아름답고 보람된 삶의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그 생명으로 살면서 해야 할일은 내 생명을 스스로 연장하고 내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와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손과 발이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합당하도록 정복하고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우선으로 하는 것에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순결한 신부로 여겨주실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은혜가 왕노릇하고, 생명안에서 우리가 왕노릇 하는 소망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참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이룰 것입니다.
사람은 삶입니다. 사람을 이루고 있는 자음 'ㅅ', 'ㄹ', 'ㅁ'이 모음'ㅏ'와 만나서 이루어지는 조합이 그 어원을 따라가다보면 만남직합니다. 한국어를 넘어서는 문화에서도 사람이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시간을 삶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생명을 잃어버리고 삶을 더는 이어가지 못하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 나에게 약함이 있고 제한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기억하는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 같은 삶이 아니라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미 우리 보다 먼저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역사와 기억에 살아있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붙들고 참 생명의 삶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참된 생명의 샬롬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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