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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독서모임:함께읽기

독서모임 후기(2020.05.25)

by 샬롬보금자리 2020. 5. 26.

월요일 독서모임: 모여서 함께 읽기

 

네 번째 독서모임

2020년 5월 25일 벌써 네 번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번 모임에는 6명 전체 멤버가 참여했고, 루디아님이 가져온 일일 견과, 자유님이 가져오신 방울토마토와 참외, 잔디님이 가져오신 음료까지 풍성한 나눔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다음 주에는 루디아님이 밥을 사신다고(꺄오~~~ 감사합니다) 하니 풍성함이 더합니다. 
모임을 시작하면서는 청년세대공감 프로그램에 제안하기로 한 인문실험-세대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안서를 각자 읽고 내용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함께 읽을 책을 선정해서 제안서를 제출하기 위해 각자 세대 소통에 대한 책을 추천하기로 했습니다.(수요일에 제안서를 제출한다고 하니, 오늘내일 사이에 선정이 이뤄져야겠네요). 그 외에 우리가 묻고 답한다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질문들이 보완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읽은 분량 p.44-63 읽음. 

나눔1.
우리는 갑자기 뜻밖의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가 가진 전제나 가정들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더 이상 설명해 주지 못할 때, 그리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우리가 속한 현실이 우리가 예측한 수준을 넘어가거나 혹은 달라질 때,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p.44-45 초월과 다름의 체험)
: 통제 불가능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이 경이의 배경이다. 

나눔 2.
히브리 문화와 히브리 성경의 전통 속에서 '두려움'이라는 말은 종종 단순히 무서워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두려움이란 무서움과 함께 일어나는 온갖 감정과 혼란스러움,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한 무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을 초월하는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까지도 포함한다. 이 "초월과 다름"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계시가 우리 삶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예기치 못한 습득된 인식을 지칭하기 위해 성경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p.45 초월과 다름의 체험)
: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성경에서 두 단어의 결합이지만 함께 붙어서 쓰이는 관용어구이다. (Fear of the Lord) 유진 피터슨은 이 표현을 통해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전환을 기대한다. 샬롬 복음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유사하다. 

나눔 3.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 또한 주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것에 대해서도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을 닫지 않는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섣부른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이나 진리 혹은 선함의 어떤 측면들을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도록 도와준다. (p.45)
주님을 향한 두려움은 무서움의 요소가 제거된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 우리는 여전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며, 여전히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깊고 깊은 신비 속에 있는 것이다(p.46)
: 주 경외함은 열린 결말, 열린 기대의 태도를 갖게 한다. 예를 들어, 야구 타자가 공을 치려고 들어가서 최선을 다하지만 아웃될 수도 있고 홈런을 칠 수도 있다고, 결론을 열어두는 것이다. 

나눔 4.
경이감 없이 형성된 영성이란 자기 계발의 노력에 불과하다. ... 경이로움이 없으면 영성 형성의 동기가 초조함과 죄책감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 스스로 부족하고 무가치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자신을 최악의 상태라고 인식하기도 한다.(p.48 빗나간 영성형성)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잘못한 것들을 떠올리게 하며 초조함과 죄책감을 갖게 할 것 같다...?
: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기대가 없으면, 경이감은 무서움과 같은 편에서 초조함과 죄책감을 갖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 경이감은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떻게 일하실까, 나를 어떻게 대하실까를 (애정 어린 눈망울로)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 이런 경이감이 없으면 은사와 가능성을 분석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진행과정을 평가하며 우리를 꾸미는 것으로 전락하여, 도덕적 일 중독 혹은 경건을 위한 경쟁적 열정으로 왜곡된다. 예배하고 선을 행하는데 하나님이 없다. 이건 교회나 성경과 관련된 일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연구소 사역도 자칫 이렇게 될 우려가 크다. 

나눔 5.
경이감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즉각적인 감정이다. 어릴 때 우리는 항상 경이감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은 늘 새로운 것들을 가득 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매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이런 새로운 세계를 어루만지고, 쳐다보고, 맛보면서 자랐다. 대화 가운데 나오는 낱말들이 신기했고, 달리는 것도 신기하고, 만지고 맛보고 듣는 모든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경이감으로 가득 찬 세계에 살았던 것이다. (p.48 경이감의 해체)

: 정말 생각해보면 어릴 때 그랬었다. 지금도 어린이들을 보면 그런 경이감을 회복하게 되는 것 같다. 

나눔 6.
경이감을 상실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모든 일을 점점 잘하게 되고 우리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주변 환경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었을 때 이런 경이감의 상실이 가장 지속적이고 철저히 유지되는 곳은 바로 우리 일터다. 일하는 곳에서 경이감을 키우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일터에서는 지식과 능률이 최고의 가치를 발하기 때문이다.(p.49)
: 우리가 일을 잘하기 위해서 환경을 장악하는 것은 필요하고 당연하다(하나님이 명하신 다스림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열려있어야 한다. 일하는 곳은 예측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일터에서는 하나님을 빼고, 종교적인 태도를 배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만족의 결과를 원하는 것 같다. 

나눔 7.
일은 우리의 최선을 요구하고 그런 우리에게 인정과 만족으로 보상한다. 우리는 중요한 일, 곧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며 사람들의 삶을 낫게 만드는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일은 우리를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고 가족을 부양할 돈을 제공해 준다. 일은 그 자체가 경이 로움의 대상이다. 우리는 피조물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니의 창조 활동 속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p.49)
: 무엇을 하고 싶은가?! 소명, 은사가 결국은 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창조 때 의도한 일이 이런 형태였을 것이다. 타락 이후 이런 일이 고통을 주고, 고통을 통해 열매를 얻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이후에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는 이런 일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나눔 8.
일을 시작하고 몇 주 혹은 몇 달이 지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나 확신, 생각들은 우리 삶의 무대 뒤로 물러나고, 끊임없는 요구, 새로운 자극, 깊은 만족감으로 채워진 우리의 일터가 그 중심을 차지한다. ...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이 차지하던 우선순위는 아주 조금씩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일에 그 자리를 내어준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우리 일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 모든 기도는 부활의 경이에서 벗어나는 순간, 일종의 우상숭배가 된다. ... 우리는 이처럼 악의 없고, 자연스럽고, 경건한 행동을 우상숭배라고 부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 물론 처음부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때 그 순간 우상 숭배의 씨가 자라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우리가 우상숭배의 삶을 살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ㅠ.ㅠ
: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우상숭배의 가능성을 완벽히 제거할 수는 없어 보인다.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우상숭배를 거론하며 우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 경외함의 태도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이어서 거론하는 기독교적 우상 숭배를 하는 것 대신, 본질적으로 주 경외함을 가지라는 이야기일 듯.

나눔 9.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낸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이 대개 노골적으로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신비를 용인하지 않는 그런 정황이다. ... 기술이야말로 오늘날 우상숭배를 부추기는 주된 요인들 중 하나다. .. 대중들의 생각 속에 미신, 곧 몽매하고 배우지 못해 신화와 주술에 머무는 원시적이고 유아기적인 사고방식을 연상시키는 우상숭배가 이제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 시간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비 인격적 물건들이 우리에게 통제와 지식이라는 거창한 약속을 던지고 잇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우리의 삶에서 신비와 경이와 경외의 느낌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있다. (p.54-55,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
: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배제한 세상은 정작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들을 원한다. 의료기술이나 과학기술을 통해 건강하고 온전한 생명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참된 만족을 누리고 싶어 한다. 진정한 생명, 참된 기쁨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것들이다. 

나눔 10.
나는 감히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의 주요 무대는 바로 우리 일터라고 주장한다. ... 성경이 우리의 영성 형성을 위한 책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다른 해답은 있을 수 없다. 곧 거룩한 안식의 날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제시된 결정적인 해법이며 또한 경이감을 북돋우기 위해 교회가 줄곧 실천해 왔던 태도다. (p.56 부활의 경이를 북돋움)
: 안식의 날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할 수 없던 것을 잠시 내버려 두는 것,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 아닐까?!
십자가라는 엄청난 비극과 공포와 실망은, 세상을 만드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문맥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나 그들이 하고 싶은 일 중 어느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또 하고 계시는 창조와 구원보다 우선되지 않는다. (p.58)
: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언급된 안식 명령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쉬신 것과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근거로 안식을 지키고 타자에게도 안식하도록 하라고 한다. 
그들 너머 존재하는 신비로움에 경이감으로 응답하는 능력, 이해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는 것에 놀랄 줄 아는 능력이 준비되었던 것이다.(p.59)

: 하나님을 향한 감각, 하나님의 사랑에 공명되는 시간, 생명, 삶

나눔 11.
일 없이 안식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안식일이 없이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다. ..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는 이 일이라는 문맥은 세 번 반복되는 표현을 통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던 일", "그가 하시던 모든 일",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 하지만 안식의 가장 독특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다음 네 동사들이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 일터가 우리 삶의 전부일 수는 없다. 하지만 안식일은 일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일에 바탕을 둔, 그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안식일이 없다면, 일터는 곧 하나님의 임재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곳이 된다.(p.60,61)
모든 관계를 기능적인 것,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역할의 수준으로 축소해 버릴 때 일터는 우상을 만드는 곳으로 전락한다. 일터를 단지 우리 자아의 무대,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곳으로 축소해 버릴 때도 우리 일터는 우상을 만드는 곳이 된다.(p.62)
: 실제로 생각해보면 일이 성취 수단이 될 때, 분명히 즐겁기는 한데, 본질적인 것은 못 얻는 것 같다. 
: 일의 의미를 바로 알기 위해서 아무 이유 없이 일을 그만둬보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보다 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알라는 말이었다. 

나눔 12.
안식의 날은 우리가 얻게 될 유익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안식의 날은 하나님에 관한 것, 그분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안식의 일차적 관심은 우리가 무엇을 할까 혹은 하지 말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성하고 쉬시고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p.63 하나님을 향해 열린 태도)
: 안식의 날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일단은 정말 쉬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 의미 없이 학교를 오가는 것처럼 교회를 오고 가는 생활이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서울은 이미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는 것이 보편화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에 안식이 깃드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세상에 함몰되어 간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에 뿌리내린 무엇인가를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1과 부활의 경이 내용 요약:(p.27-63)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완벽한 공식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삶을 형성하는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영성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형성해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을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예측하고 통제할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부활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부활로 끝나는데, 여기에는 경외감과 친밀감이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이 두가지가 균형있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경이감은 어떤 예측이나 전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본문에 나타난 부활에 의한 영성형성의 특징을 다음 5가지로 뽑을 수 있습니다. (1) 부활이 일어날 때 예측한 사람이 없다. (2) 이일에 전문가가 있을수 없다.  (3) 주변적 인물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 (4) 조용한 곳에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 두려움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기대대로 할수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것들을 하나로 설명하자면 두려움(경이감)이 이 전체를 대표합니다. 갑자기 뜻밖의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더 이상 설명해주지 못할때,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히브리 문화와 성경은 두려움이라는 표현을 단순히 무서워하는 것 이상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두려움이란 무서움과 함께 일어나는 온갖 감정과 혼란스러움,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무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포함합니다. 이 두려움, 초월과 다름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Fear of the Lord)은 하나님의 임재/계시가 우리 삶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예기치 못하게 알게 된 것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일에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을 닫지 않으며,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영성 형성의 중심이라면, 이 과정을 규정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바로 경이감입니다. 경이감 없이 형성된 영성은 자기 계발의 노력에 불과하며, 경이로움이 없으면 영성 형성의 동기가 초조함과 죄책감에 의해 좌우될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일에 대한 몰두 혹은 그러지 못한 자책감) 영성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경이감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즉각적인 감정입니다. 어릴 때 우리는 항상 경이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세상은 늘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어 보였고, 모든 것을 신기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일을 점점 잘하게 되고, 우리 자신과 공동체, 주변 환경을 장악할 수 있게 되면서 경이감을 놓쳐버립니다. 일터에서 우리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가 아는 일을 하도록 교육받고, 그렇게 하면서 돈을 법니다.

  본래 일은 우리의 최선을 요구하고 그런 우리에게 인정과 만족으로 보상합니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일은 우리를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이렇게 일은 그 자체가 경이로움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활동 속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소명, 은사, 타락 이전 혹은 회심 이후의 하고 싶은 일은 여전히 이런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일의 현장에서 이런 경이는 물러나고, 끊임없는 요구, 새로운 자극, 깊은 만족감이 우리의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일에 대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도 하지만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맙니다. 일부 회심을 경험한 자들은 일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상의 흙탕과 반복되는 지루함을 헤쳐 나가는 삶으로 돌아갑니다. 대신 기독교 시장에서 잘 포장된 영성의 소비자들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 역시도 우상숭배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우상숭배는 우리가 부활에 의해 조성된 새로운 삶을 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 할 때 가장 큰 유혹이 되어 그것을 막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한 우상 숭배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은 우리의 정체성이 대개 노골적으로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신비를 용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보와 기술을 통해 통제와 지식을 제공하며 우리 삶에서 신비와 경이와 경외의 느낌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그런 일터에서 경이감, 곧 깜짝 놀라 선뜻 하는 일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활짝 열린 눈과 벌린 손으로 "초월과 다름"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부활에 의한 영성의 주요 무대는 바로 일터입니다. 경이로움을 달가워하지 않는 일터에서 우리가 경이감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거룩한 안식의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중 어느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창조와 구원보다 우선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안식의 날을 지킴으로 우리 너머 존재하는 신비로움에 경이감으로 응답하는 능력, 이해할 수 없고 예상할수 없는 것에 놀랄 줄 아는 능력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제일 처음에 하나님은 일하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그 후에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일 없이 안식일을 제대로 이해할수 없고, 안식일 없이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 속에는 일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일을 완성하시는 하나님, 쉼을 즐기시는 하나님,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관계를 기능적인 것, 곧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역할의 수준(자아실현의 무대,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곳)으로 축소해 버릴때 일터는 우상을 만드는 곳으로 전락합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 속에 자신의 형상을 이루어 가시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이 바로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안식의 날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안식의 일차적 관심은 우리가 무엇을 할까 혹은 하지 말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완성하시고 쉬시고 복을 주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우리가 충분히 인식할수 있고 참여할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부활의 경이를 볼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일손을 멈추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라움과 열린 마음으로 우리 너머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우리가 만들어 낼수도 없고 통제할수도 없는 것에 의해 모양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일과 일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계속해서 하고 계시는 일에 응답하며 그 일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  재 요약.

  부활은 내 마음대로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 부활 사건의 목격자들은 경외감과 친밀감을 동시에 경험했다. 참된 예배가 그러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초월과 다름을 볼 때 두려움(경외)을 느낀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영성형성의 중심이라면, 이 두려움(주를 경외함, Fear of the Lord)이 그 핵심이다.

  본래 일은 최선을 다하는 무대이고, 성취를 맛보며 타인과 세상을 섬기는 현장으로서 경이감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일을 하라고 요구하고, 그렇게 돈을 번다. 끊임없는 요구, 새로운 자극, 깊은 만족감이 경이를 대체한다. 그렇게 되면 정작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을 잃어버리는 우상숭배의 현장이 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일터가 아닌 기독교시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을 배우려는 소비 역시 우상숭배이다. 

  우리가 부활의 영성을 형성해야 하는 곳은 바로 일터이다. 하나님도 일하셨다. 비록 일터가 신비를 용인하지 않는 곳으로 부활의 영성에 적대적인 곳이 되었지만, 우리는 경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안식의 날을 지킬 수 있다. 우리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능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시고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을 지키는 것이다. 부활의 경이를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일손을 멈추고 침묵을 지키는 것, 놀라움과 열린 마음으로 우리 너머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낼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부활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영성형성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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