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독서모임: 모여서 함께 읽기
여섯 번째 독서모임
점점 무더워져 가는 6월 8일에 여섯 번째 모임을 이뤘습니다. 하나, 둘, 하나, 하나 이렇게 도착하셨고, 퇴근 후에 모이는터라 삶의 무게와 피곤함, 한낮의 더위에 지치기도 했지만, 루디아님이 고급 아이스크림을 섬겨주셨고, 자유님은 직접 만든 식빵과 보금자리 딸기잼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맛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부활의 식사 나머지 부분을 읽어오기로 했고, 단락별로 이야기를 나누며 진도를 뽑았는데^^ 마지막 부분은 시간에 쫓겨서 한분씩만 소감을 나누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다음에는 읽어오기 없고, 원래 취지대로 함께 읽고 나누기로 했습니다.
오늘 읽은 분량 p.77-103(부활의 식사)까지
나눔 1. 우리를 변화시키는 평범한 식사(p.77-78)
- 성경에서 삶의 내용과 모양을 습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음식을 준비하고 서로 나누며 함께 먹음으로써 부활의 삶을 실천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따라서 접대를 소홀히 하는 문화는 부활의 배고픔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p.77-78)
: 오늘날 교회에서 식사를 하는 게 이 부활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가? 본래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성찬을 나눴다. 예수님이 모일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성찬을 먼저 먹고 나중에 먹는 것 때문에 분쟁이 있어서 바울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또 다른 식사 접대에 관한 것은 구약에 나오는 "환대"와 관련이 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보여주는 나그네에게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하는 것은 약자를 돌보는 문화이며, 하나님이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현대 교회의 경우에는 외국 한인교회는 사모님의 요리 솜씨에 따라 교회 부흥이 판가름 난다고도 한다. 유학생들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식사를 하는데, 말씀보다 음식이 맛이 있어서 친구를 데려온다고도 한다.
: 부활의 배고픔이란 무엇인가? 앞서 말한 부활의 삶을 실천함과 더불어서 부활은 하나님이 (다시) 주신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고, 부활의 삶을 실천은 그 은혜를 알고 나누는 삶을 의미하고, 부활의 배고픔이란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지 못할 가능성 - 감사를 하면 감사가 많아지지만, 감사를 잃어버리면 더욱 불행해지기 쉬운 것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나눔 2. 부활의 목전에서(p.79-81)
- 그들(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부활의 목전에서 "생명이 있는 땅"을 걷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 대화 속에서 흩어진 단편들에 지나지 않던 내용들을 하나로 모아 성경에 기록된 보다 크고 포괄적인 계시의 그림 가운데 맞추어 주셨다. ... 성경은 보다 넓고 통일된 그림을 보여준다. (p.80)
: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을 못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공감).
: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어떠함(생명 있음)을 알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이 세상을 설명해주고, 통일된 그림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이 설명해주시는 것 같은 말씀의 이해가 필요하고 사모하게 된다.
나눔 3. 새로 발견하는 부활의 의미(p.85-86)
- 부활이란, 당신이 그런 것을 믿는다면, 다음 세상의 삶과 관계된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죽고, 묻히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이 땅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분명 하늘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라고 사람들과 부대끼고 일해오던 바로 그 땅에서, 함께 자랐던 사람들과 더불어 지금까지 걸어온 바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p.85)
: 부활은 미래, 내세에 관한 것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서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가능성을 열었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말로 읽힌다.
- 이제 부활은 그들 자신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그들의 삶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들은 이 사실을 예수의 부활 자체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부활을 통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 제자들이 지금껏 품어 왔던 부활 개념은 이제 "생명이 있는 땅에서"의 생명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p.85)
: 일상이 부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당시 제자들에게나 오늘 우리에게나 모두 새롭다. 생명 있는 땅(이 세상)에서의 (초월적,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새로운) 생명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정말 이변화는 혁명적인 것 같다.
: 일상이 정말 부활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실패, 근심, 망함, 죽음이 우리 삶에 없을 수 없지만, 부활을 생각할 때, 그 부활이 내게 관련된 것이 될 때 소망이 생기고 생명을 회복하는 것 같다.
- 일곱 제자들이 다시 고기잡이에 나서게 된 이유는.. 예수의 부활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과 나누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깨달음을 실천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다시 일상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 물론 나는 그들이 이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의 '영성훈련'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고기잡이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p.86)
: 보통은 이 부분을 두고 제자들이 부활을 보고도 불신해서 고기잡이로 돌아간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유진 피터슨의 견해가 새롭기도 하고 너무 수긍이 된다. 기존의 해석은 일상으로부터 분리된(일상은 뭔가 신앙이 없어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영성훈련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의 결단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주 경외함이 필요하다.
: 고기잡이에 실패했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어려움을 대변한다. 제자들도 일상이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고기 잡으러 갔지만 고기잡기가 어려웠다.
나눔 4. 아침 식사가 준비됐다(p.86-87)
- 영적 체험이 충만한 사람들이 설거지를 당신한테 미루어 버릴 때의 기분이란!(p.87)
: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헤엄쳐서 가버리고 난 뒤에 나머지 제자들이 고기잡이를 마무리하고, 노를 저어와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공감된다. 예배드린다고 다 가버리고 남아서 식당을 정리할 때, 수련회 다녀와서 정리하고 있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식사하러 가버렸을 때 너무 외롭고 내가 바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라도 함께 있어주면 큰 위로가 되고 오히려 힘이 났었다.
- "아침 식사가 준비됐다" ...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께서 식사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다. 그분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말씀하시며 일하시고 사람들을 영접하실 때 사용하신 곳이자, 복음서 기자들이 즐겨 선택하는 배경이 바로 식사자리다. (p.87)
: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만나서 식사하셨다는 게 참 좋다. 은사 집회, 할 일 분담 이런 게 먼저가 아니었다. 밥 먹고 합시다^^
: 대학시절 선교단체에 속해 성경을 가르칠 때, 후배들에게 그렇게 밥을 많이 사줬었다. 밥을 먹으면서 나누는 교제는 성경공부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인격적인 사귐을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서로에게 대해 더 깊이 알게 해 주었다.
나눔 5. 일상이 우리를 만들어 간다(p.88-89)
-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은 특별히 준비된 환경이라든지 세심하게 선택된 시간이나 장소 등에 좌우되지 않는다. 원칙은 오히려 평범함이다. ... 음식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먹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려면 음식을 먹고 영양분을 섭취해야 한다.. 이것이 창조의 본질이다. .. 하지만 우리는 즐기기 위해 먹기도 한다. ... 친구와 함께 나누는 점심 식사는 대화와 영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더 없는 기쁨을 선사한다. (p.88)
- 함께 먹는 행위는 적어도 순간적으로나마 거만함을 해소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 손님 접대의 전통에는 정직한 관계의 형성, 인격적 존중, 서로 주고받으면서 느끼는 서로 간의 즐거움이 담겨있다.(p.88-89)
- 영성형성을 위한 기독교적 훈련이 우리 삶의 일상성과 분리된 어떤 방식을 구상하거나 조직하려 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p.89)
: 평범한 일상이 부활에 의한 영성형성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것이 참 좋다. 일상을 잘 살고 싶다.
: 식사의 두 측면, 먹고살려고, 즐기려고... 단순 반복하는 그 먹는 식사가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하나님이 주신 생명, 부활의 영성을 형성해 가는 것이라는 것이 무척 새롭다. 특히, 거만함 해소, 정직한 관계의 형성, 인격적 존중, 서로 간의 즐거움이 있는 식사 하고 싶다.
: 이 책을 통해 무엇보다도 일상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신학적 강조, 세상을 이끄는 문화나 가치들도 일상에 비추어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눔 6. 진짜 떡과 생선(p.89-91)
- 예수님의 두 번의 식사(엠마오 식사, 갈릴리 아침식사)는 본래적인 의미의 식사였다. 이 식사들은 영적 계시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p.89)
- 성경에는 음식이라는 상징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욕구를 형상화하는 절묘한 비유들이 많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시 63:5),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p.90)
- 하지만 부활의 식사는 전혀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이 이루어지는 일차적 장소는 우리가 하루의 일과 중에 갖게 되는 매일의 식사라는 것이다. 식탁에서 수저를 들 때마다, "거기 있는 소금 좀 주시겠어요?"라고 말할 때마다, 혹은 밥을 한 주걱 더 갖다 먹을 때마다, 우리는 영성 형성의 의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상황 속에 있는 것이다. 누가와 요한은 우리에게 이런 식사 시간들을 보다 중요하게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주일예배, 성경공부, 수련회 가는 일이 중요하지만, 일생을 두고 본다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의 식사에 소리 없이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만큼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없을 것이다.(p.91)
: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도 우리 식사에 함께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식하는 "주 경외함"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나눔 7. 부활을 받아들이고 부활에 참여하기(p.91-93)
- 두 식사 이야기 모두 부활을 인식하거나 깨닫는 일이 지연되고 있다. ... 우리는 그 이유를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는 데 있어서 그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란 강제나 기술적 조작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저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차원, 그리고 그 선물 속으로 참여라는 차원이 존재한다. (p92)
: 강제나 기술적 조작으로 되지 않고 선물로 된다는 점이 와 닿는다. 우리의 신앙을 눈 뜨게 하고 갱신시켜주는 훈련 프로그램이나, 예배 형식(예전)이 중요하지만 그것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로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주 경외함으로 바라보게 되고, 은혜를 사모하게 된다.
- 이 두 이야기 어디에서도 부활은 제자들을 압도하지 않는다. 억지로 부활의 인식과 고백을 끌어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을 무기 삼아 제자들에게 자기를 예배하고 충성을 바치라고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 바울 조차도 부활 이야기를 할 때는 대부분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실천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실천(practice)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포괄하는 단어들 중 하나다. (p.92-93)
- 부활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와 몇 시간이나 함께 있으면서도 사태의 진상을 알지 못할 수 도 있다. 그들이 믿게 된 것은 부활을 받아들이고 부활에 참여하며 관여하면서였다. 식사는 바로 이런 체험을 위한 이상적인 정황을 마련해준다.(p.93)
: 신앙의 본질적인 측면이다. 헌신이든 믿음이든 억지로, 강요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것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열심으로 행한 얼룩들이다. 부활은 어떤 무브먼트의 기초가 아니라, 일상의 삶을 사는 생명력이다. 부활을 받아들이고 참여하고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주 평범해 보이는 우리의 식사에 있다는 것, 그 식탁에 함께 하는 예수님의 임재를 놓치지 않고 싶다.
나눔 8. 마술이 아니다(p.93-94)
-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 예수의 부활을 작동시킬 수 있는 확실한 도식은 없다. (예수님이 초대받기도 하고, 예수님이 초대하기도 한다) .. 정확한 방식대로, 정확한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난리법석을 피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부활에 의한 영성형성 과정에는 외워야 할 공식이나 준수해야 할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임하시는 것은 우리의 초대에 응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우리를 초대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p.93-94)
: 따라서 우리가 할 기도는 예배나 모임 가운데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오소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왔습니다", "주님의 생명을 맛보게 해 주십시오"이지 않을까?!
나눔 9. 식탁의 주인은 언제나 예수님이다(p.94-95)
- 두 식사 모두 식탁의 주인이 예수님이었다. ... 식사의 성격과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몫이다. ...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식사에서 으레 형성되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영성 형성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는 정황을 마련해 준다. (p.94)
우리는 식사에 온전히 참여하면서도(능동), 온전히 수동적 입장에 머문다. 실제 식사에서 이 모두 "온전히"는 함께 뒤섞여 있어서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식탁에서 주인의 역할은 독재자의 역할과는 다르다. 친절하고 노련한 주인의 식탁이라면 손님들은 매우 자유롭고 편안한 식사를 즐길 것이다. (p.95)
- 식사의 주인은 언제나 예수님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성 형성을 "책임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메뉴를 결정하는 것도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취향과 입맛에 따라 식탁의 내용을 맞출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당당하게 앉아 그 식사를 즐기며, 실제로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 자체에 개입하게 된다.(p.95)
: 우리의 영성형성은 참으로 온전한 능동과 온전한 수동이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내가 빠질 수 없다. 사실, 이런 관계는 사랑이 그렇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내가 사랑한다고 사랑할 수 없다. 상대방이 받아줘야 한다. 혹은 반대로 상대방이 내게 아무리 구애해도 내가 그를 사랑하기로 할 때 비로소 참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 노련한 주인의 식탁.. 자유롭고 편안한 식사.
나눔 10. 식탁문화가 해체되고 있다(p.95-97)
- 함께하는 식사는 우리가 음식이라는 생리적 욕구, 대화와 친밀감이라는 사회적 욕구, 전통을 이어가고 가치관을 전수하는 문화적 필요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일 것이다. (p.96) : 우리나라의 잔치는 아침에, 서양의 파티는 저녁에 ^^ 우리 교회 식사는 점심에?
- 함께하는 식사는 종종 드러나지 않고 또 우리가 볼 수도 없는 희생이라는 체험이 진하게 스며들어 있다. 하나의 생명이 희생되어 다른 이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다. ... 우리는 주고받음을 통해 일어나는 복잡한 희생의 세계에 개입하게 된다. 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먹여 살린다. 우리는 결코 자족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는 생명을 먹고살며, 이 생명은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p.96)
: 함께 하는 식사의 의미, 식사에 담긴 희생.. 음식만이 아니라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이들의 섬김도 담겨 있다.
- 이런 역할을 통해 우리는 우리 가족 및 전통과 친밀한 유대를 유지하고, 친구나 손님들에게 시간을 내며, 배고픈 이들에게 도덕적 의무를 수행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식사를 통해 우리는 예수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며 그분이 살았던 그 정황과 여건 속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p.97) : 우리의 일상이 예수님의 일상과 같았음을 상기하는 것은 무척 중요해 보인다.
-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서 식사는 그 중요성이 매우 축도되어 있다. 패스트푸드(대화 여유 상실), 식당의 증가(집에서 음식 할 시간 감소), 텔레비전(친밀한 관계와 대화를 없앰), 간편 냉동식(집안 특유의 조리법 증발) : 현실이다.
- 하지만 우리 모두는 여전히 음식을 먹는다. : 예전보다 어려워졌지만 아직도 기회는 있다.
나눔 11. 주의 만찬, 우리의 삶을 위한 패턴(p.98-103)
- 식사와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의식은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다. ... 이 의식은 기독교가 태동할 때부터 우리 예배의 중심을 차지해 왔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 세계에서는 모든 식사를 일종의 작은 성례로 간주하는 전통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p.98)
- 예전의 형식 - 각기 다른 네 번의 식사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네 개의 동사들이 차례로 반복 사용됨 - 음식을 "가지사", 하나님께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심"(p.99)
- 일찍이 기독교 공동체가 태동할 무렵, 성도들의 예배는 바로 이런 성례전적 형식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패턴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 형식이 규정하고 있는 것은 단지 예배뿐이 아니다. "생명이 있는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자체가 식사, 곧 이 중심적이고 지배적인 부활 식사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p.100) : 우리의 예배, 우리의 일상의 식사가 모두 부활 식사와 연관이 있다.
- 예수께서는 드리는 것을 취하신다. 우리의 떡, 우리의 물고기, 우리의 포도주, 우리의 염소, 우리의 양, 우리의 죄, 우리의 좋음점들, 우리의 일, 우리의 여가, 우리의 강점, 우리의 약점, 우리의 배고픔, 우리의 목마름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받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식사자리에서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가져간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것을 취하신다. 우리 자신을 받으시는 것이다. (p.100): 예배를 비롯한 우리 삶의 의미, 하나님이 취하신다. (take: 맡으신다)
- 예수께서는 우리가 가져가는 것과 그것을 가져가는 우리를 두고 축복하시며 감사를 드리신다. ... 그분(예수님)은 우리를 드리며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삼위 하나님의 관계 속으로 이끌고 가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것을 비판하거나 정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신다. "가져왔다는 게 고작 물고기 두 마리뿐이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 예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간 것을 떼신다.(break) .... 거짓과 위선으로 단단해진 속과 딱딱하게 굳은 껍질로 예수님께 나아가지만, 그분은 우리(우리 삶)를 산산이 부숨으로써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우리의 죄, 죄에 사로잡힌 우리를 수술하신다. 고통스럽지만 나음을 얻고 회복하며 생명을 누린다.
- 그다음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가져간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을 다시 나눠주신다. (give back)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가져간 그대로가 아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라는 찬송이 노래하는 것) 우리가 식탁에서 거룩해진 몸과 거룩한 피를 먹고 마시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의 식사인 것이다. :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시 내어주신다. 나는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했었는데, 하나님은 내게 죽음이 아닌 삶을 살라고 하셨고, 그 삶을 살게 해 주셨다. 하나님께 내어드린 삶을 다시 받아 온전한 '나'로 주체성 있게 살고자 한다.
본문 요약(p.78-103)
부활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초월적 사건이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위인 식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에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예수님과도 대화를 했지만 못 알아봤다. 그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뒤에 예수님이 떡을 축사하시자, 그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이후에 제자들이 부활을 내세에 대한 것이 아닌 이 땅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고 난 뒤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아침식사자리로 부르셨다. 이 두 가지 식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5가지이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었고, 영적 계시를 위한 것이 아닌 평범한 식사였다. 두 번의 식사 모두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다. 이 식사에 예수님이 초대되기도 하고 예수님이 초대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예수님이 식탁의 주인이라는 점이다.
지극히 평범한 식사는 이미 생존의 필요와 즐거움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함께 먹는 주인과 손님 사이에 거만함을 해소하고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의 식사에 소리 없이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알아차리고 이 식사 시간을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를 알아보는 것은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제나 기술적 조작으로 되지 않고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의 차원이 있다. 억지로 고백하게 하거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한 예수를 보고 그 부활을 받아들이고 부활에 참여하고 관여하면서 참된 고백과 믿음이 나오게 된다. 식사가 이런 체험을 위한 이상적인 정황을 만들어 준다. 마술처럼 어떤 순서나 조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식탁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식사의 성격과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몫이다. 식사에서 으레 형성되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영성 형성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는 정황을 마련해준다. 주인이라 해도 손님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손님은 완전히 주인에게 의존하게 된다. 우리는 식사에 온전히 참여하면서도 온전히 수동적 입장에 머문다. 친절하고 노련한 주인의 식탁이라면 손님들은 매우 자유롭고 편안한 식사를 즐길 것이다. 우리가 식탁의 주인처럼 취향과 입맛에 맞추라고 요구할 수 없지만,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당당하게 앉아 그 식사를 즐기며, 실제로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 자체에 개입하게 된다.
식사와 부활에 의한 영성형성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의식은 주의 만찬이다. 기독교 초기부터 예배의 중심이었다. 예수님이 네 번의 식사에서 보이신 패턴은 4개의 동사로 대표된다. (가지사-축사하시고-떼어-주시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과 그것을 두리는 우리를 받으신다. 작다고 꾸중하지 않고 온전히 받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우리를 주님의 손으로 찢으신다(떼다 break). 거짓과 위선의 딱딱한 삶을 산산이 부수신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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