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_모음

문화와 함께하는 복음을 보며, 문화와 복음 구분하여 읽기

by 샬롬보금자리 2018. 2. 14.

문화와 함께하는 복음을 보며, 문화와 복음 구분하여 읽기


<출처: logos bible software>

이 글은 성경에 나타난 에덴동산, 시온산, 성막, 성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출애굽기 본문을 연구하다 만난 내용을 살피면서 느낀 점을 나누고자 포스팅한다. 

---------------------------------------------------------------------------

글쓴이 : Michael S. Heiser


출처: Heiser, M. S. (2012, 2016). Cosmic Garden and Mountain Imagery in the Old Testament. In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구약에 나타난 우주적 동산과 산의 이미지

고대 근동에 살던 사람들은 신들이 숲이 우거진 동산이나 산에 살거라고 믿었다. 우거진 동산이나 산은 신과 관련있는 성질인 고급스러우면서도 거리감있는 것을 반영한 요소들이다. 동산과 산은 또한 일상적인 삶의 조건과는 대조가 되기도 한다. 고대 근동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기가 없는 기후에 살았고 음식을 위해서 작물을 기르고 거둔 것에 의존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에서 신들이 사는 동산은 풍성한 물과 많은 종류의 싱싱한 식물들이 음식으로 그늘로 아름다움으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고대 근동에 살던 사람들은 산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산을 신성한 거처로 생각했다. 그들은 가축떼를 잡기 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산에 오를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산은 인간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신들에게 허락된 거주공간으로 여겨졌다. 이런 개념은 널리 퍼져있어서 자연적인 산이 없는 지역의 사람들(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같은)은 인공 산들을 만들었다. 예를들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간들이 만든 지구라트는 신들이 인간과 만나는 산 신전(mountain temple)이었다. 


산들은 또한 창조와 관련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집트인들은 창조신인 아툼Atum이   심해에 산다고 믿었다. (창조 이전에는 눈Nun, 두산백과: 고대 이집트신화에 나오는 만물의 기원인 원초적인 물로 모든 만물을 에워싸고 있는 신) 창조 때 아툼은 고대의 작은 언덕들 위의 심해에서 일어났다. 피라미드를 대체하 단층의 사원들은 이 언덕 개념을 유지했다. 숭배자들이 신전의 핵심부에서 거룩한 곳을 향해 움직일때 , 그들은 나일강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로 장식된 기둥이 있는 홀을 통과하게 된다. 그 결과 숭배자들은 신전에서 이동할때  물에서 솟아난 언덕을 여행하는 것을 흉내낸 것이다. 언덕 경사의 가장 높은 지점은 신의 집으로 여겨졌다. 


거주하는 장소외에 추가적으로  신전은 숭배자들이 희생제물을 드리고 숭배하는 장소이자 신들이 우주적 명령을 내리는 곳이었다. 고대 근동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신전은 신이 우주적 질서를 유지하고 자기 뜻을 집행하는 본부라고 믿었다. 고대 셈족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이 신성한 산위 에 있는 텐트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다. 산들은 또한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신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구약에서의 우주적인 언덕과 산 이미지는 고대 근동의 이런 믿음들을 반영한 것이다. 아주 유사한 병행구절은 고대 시리아의 한 지역이었던 우가릿에서 나온 고대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본문에서 우가릿의 높은 신인 ‘엘’은 수풀이 우거진 언덕이 있는 산에서 살고 그 산은 아주 깊은 기초들 사이에 두개의 강의 기원이 되는 곳에 있다. 엘과 그의 신성한 의회(또는 하늘에 있는 주권자들)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우주적인 산에 모여서 엘의 장막(혹은 성막)으로부터 신적인 명령들을 내린다. 엘의 공동 통치자인 바알은 그 자신의 신성한 산에 있는 거처와 신전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만나는 장소는 차파누(Tsaphanu)의 높은 곳이며, 그의 궁전은 벽돌로 둘러사인 뜰을 가지고 있는 라피스라줄리(lapis lazuli, 역자주:보석)의 깨끗함을 가진 집이다. 


우주적 동산과 산 이미지의 구약에서의 사용


구약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의 거주하는 곳이자 신전을 묘사할때 이런 묘사들을 다 사용한다.  여호와는 산에 거주하고(시내산, 또는 시온) 예루살렘 성전은 모이는 산에 위치해 있다. 시온 산은 물이 흐르는 거주지로 묘사된다. 에스겔에서, 에덴은 동산과 산을 다 의미한다. 에스겔 28:13-16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하나님의 동산, 에덴”으로 인용한다. 에스겔 28:2에서 에덴은 여호와가 자신의 하늘의 의회와 우주를 운영하는 장소인 신들의 자리로서 표현된다. 창세기에서 초록이 무성하고 물이 흐르는 동산으로 표현된 에덴은 여호와가 처음으로 인가에 대한 그의 뜻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런 모티브는 시내산의 묘사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율법을 반포했다. 이 율법들은 하늘의 주권자들인 천사들에 의해서 주어졌다.모세와 아론과 70인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시내산에 올랐을때 그들은 여호와를 보고 그와 함께 만찬을 즐겼다.(출 24:9-11) 후에, 여호와는 시내산에서 내려와서 성막 텐트에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한다.(출25-40) 그는 또한 모세와 회막에서 만난다(출33:9-11). 성막의 내부구조는 후에 성전으로 옮겨가서 여호와의 장막으로서 시내산에 있는 성전으로 나타난다.


장막과 성전 모두 동산과 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지극히 거룩한 곳에 거하신다면, 거룩한 곳의 바깥부분은 에덴 동산으로 묘사된다. 이 내부 구조의 커튼은 케루빔으로 장식되어 있는데(출 26:1) 지성소를 성소의 나머지 부분들과 분리하는 용도였다. 케루빔은 에덴동산에서 그랬던것처럼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가는 길을 지킨다. 커튼 바깥쪽은 메노라(menorah), 금촛대가 위치해 있다. 이 촛대는 생명 나무를 상징하는데, 양쪽에 6개의 가지를 가진 촛대로 나무를 상징하며 생명과 부활의 상징인 살구나무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도 역시 무성한 식물들과 많은 케루빔들이 있다. 

---------------------------------------------------------------------------

이 글을 쓴 이의 설명은 고대 근동의 신화적 개념이 구약성경에 투영되었다는 내용이다. 

물이 풍성히 흐르는 동산, 일상에서는 접근할 기회가 없는 산이 신들이 머무는 장소로 여겨졌고, 그곳에서 천상의 존재들과 통치한다는 이미지를 예로 들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회문화적으로 고대근동의 환경에서 볼때 신이 머무는 곳으로 초록이 무성한 동산이나 접근하기 어려운 산을 생각했다는 점은 쉽게 이해할수 있었고, 고대근동의 신화들과 성경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낸 것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 형식의 유사성에 대한 언급들은 자칫 구약의 하나님을 신화적 상상의 결과로 오해하게 할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고 염려가 되었다.

고대 근동 신화를 더 추적해보아야 할 일이겠지만, 신화에 나타난 신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숭배를 받는다. 자신에 대한 경외감을 높이기 위해서 인간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철저하게 분리된다. 또한 자신의 명령을 내세우며 숭배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온 하나님은 다르다. 창세기에 나타난 에덴동산에서의 삶은 인간에게 사명을 주었지만 그것이 복으로 주어졌고, 자유가 주어져 있어 무척 호의적이다. 죄로 인해 쫓겨났지만 아담에게 어떤 제사를 요구한 기록은 없고(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만 요구한 제사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볼 단서는 없다) 오히려 인간을 위해 가죽옷을 입히고 언제나 대화를 먼저 시도하시며 인간과 소통하고 가깝게 지내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으로 인용된 요소들은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것들을 반영했을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이뤄지는 자연스러운 현상과도 일맥을 같이한다. 복음은 언제나 문화와 함께 섞여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적 요소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의미를 기계적으로 복음과 만난 문화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 아티클의 저자는 그렇게까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읽는 동안 조심스러웠던 부분) 

오히려 그 당시의 문화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어떻게 역설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성품, 목적을 나타내시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월호때 노란 리본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무속적 의미가 있다고 반대하려던 것에 대해 애도와 사랑의 표시로서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한 경우처럼..)

고대근동의 이스라엘이 이해할수 있는 문화적 요소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셨지만, 정작 그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은 고대근동지역에서 보던 신들과는 그 차이가 명확하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인간들에게 주어진 명령들은 그 내용이 신을 위함이 아닌 인간들을 위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에덴동산에서의 유일한 명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고, 그 이유는 먹으면 죽기 때문이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셨는데 이는 430년간 애굽의 종살이를 하며 바로의 명령과 압제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회복/재활가이드라고 볼수 있었다. 피라미드와 신전을 건축하던 애굽과는 다르게 아무런 형상도 만들지 못하게 하셨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계명들을 지키게 하셨다. 

고대근동이나 오늘날 지구촌이나 동일한 것은..  신의 이름으로 혹은 어떤 훌륭한 명분을 내세운 "주의"나 "이론"들은 끝없이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고 불안하고 절망하도록 하나,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고 평안케 하고 소망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며 무한경쟁, 실용주의, 기계론적 역할에 익숙해져 있는 친구들이 하나님안에서 교회를 통해 샬롬을 누리길 기도한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