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복음으로 읽는 출애굽기 그 한쪽 이야기
타국에서 나그네가 된 모세에게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모세(출 2:22)는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사위다. 사실 그는 애초에 애굽의 왕자였다. 그렇다면 아내와 아이를 낳고 사는 곳을 타국이라고 하는 모세의 고향은 애굽인가?
글쎄다... 그는 왕자였지만 원래 왕족은 아니었다. 그가 왕자가 되기까지는 놀라운 기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감히 돌아갈수 없는 땅이기도 하다.
먼저, 나그네의 기적이야기를 좀 해보자.
모세가 왕자가 되는 기적은 성공신화같지만, 그 이전까지는 목숨을 건 가족의 헌신이 있었다. 그 헌신은 모세가 성공하도록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의미하는게 아니다. 모세가 태어날 당시에는 바로가 이스라엘이 번성한 것을 위협으로 느껴 유아 살해정책을 펴던 때였다. 힘든 일을 시키고 은밀하게 산파들을 통해 죽이려던 일이 효과를 거두지 않자 취한 잔인함의 본색을 드러낸 잔혹의 시대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모세는 살았다. 태어난 뒤에 아들이니 나일강에 던져져야 했지만, 이름도 없던 아기는 잘생겼다는 이유로 집안 깊숙이 숨겨졌다. 자기 아이를 예뻐하지 않는 부모가 있을까, 자기 자녀를 순순히 죽게 하는 부모가 있을까 하는 당연함이 앞서지만, 결국 잘생겨서 살리겠다고 했던 부모는 3개월만에 포기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냥 이 아이를 버리지 않았다. 갈대상자를 구해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그 안에 두고 나일강 갈대밭 사이에 두었다. 나일강에 두었으니 서슬이 시퍼런 왕의 명령을 지켰고, 당장 아기가 죽지 않게하는 최선의 조치였다. 그리고 어찌되나 보려고 멀찌기에는 아기의 누나가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기적이라고 할수 없다.
기적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잘생겨서 지켜주고 싶지만, 태어난지 겨우 3개월 만에 버림 받은 불쌍한 아기를 불쌍히 여기는 상식적인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 앞에서 적절하게 울었다. 그리고 멀리서 지켜보던 아기의 누나가 등장하여 아기의 엄마를 유모로 추천하여 돈을 받아가며 아기를 키웠고 자란 후에 궁궐로 보내 왕자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기적을 바란다면..
일단 애굽인으로 태어나야 한다. 삼성가는 아니더라도 북한에서 태어나거나 시리아, 아프리카에서 태어나면 절대 안된다. 내가 태어나는 것을 어찌할수 없다면.. 잘생겨야 생존할 가능성이 있다. 그깟 3개월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이게 작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우성, 장동건이 있지 않던가. 아니면 성격이라도 좋던지, 금수저가 아니면 버티기 힘들다. 그런데.. 그냥 평범하다면.. 바로 죽는거다. 불쌍하지만 어쩔수 없다.
그래도 위로가 될만한 소식을 전하자면.. 잘생겼던 금수저들도 3개월이면 죽음의 가능성 앞에 놓이게 된다. 3개월은 버티는데.. 그 뒤에는 부모가 자기 죽어가면서까지 자식을 살리지 않고 내놓는다. 이럴바에는 차라리 일찍 내 살길을 찾는게 좋았을지 모른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자.
우리가 노려야 할 기회는...
버림 받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의 자비로움에 기대어 발견되어야 하고, 불쌍히 보이기 위해서 갈대상자의 뚜껑이 열릴 때 울어야 하는데 보는 이가 짜증나지 않고 불쌍히 여겨지도록 음량과 횟수를 가려가며 적절한 표정으로 측은함을 이끌어내야 한다. 우리가 태생이 히브리 흙이라는 것을 알테니.. 적절한 타이밍의 간섭이 필요하다.
비록 죽을줄 알고 나일강에 내다 버렸지만 멀리서 지켜봐주던 누이의 센스있는 도움도 필요하다. 너무 나서도 안되고 너무 소극적이어도 안되며 오해의 소지가 없어야 한다. 아이의 부모를 불러오겠다는 기상천외한 용기를 눈감아주는 바로의 딸의 관용도 필수이다.
애굽인도 아니고 잘생기지도 않았다면... 갈대상자에 정성껏 역청과 나무진을 발라주는 좋은 부모, 좋은 형제, 좋은 학교,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를 만나고 만나고 그들이 헌신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도와주어야.. 내가 살수 있다.
출처: 위키피디, 바로
아.. 여기서 잠깐...^^
이 모든 이야기는 힘으로 애굽을 정복한 바로가 위협을 느끼고 힘으로 짓눌러 삶이 고달프고 생존이 위협받는 시대의 이야기이다. 힘이 없으면 죽고, 강한자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는 오늘이기도 하다.
힘이 많던 바로가 이스라엘의 번성함에 신경을 쓰는(출1장) 이유는 그들의 복지를 걱정함이 아니다. 힘에 대항하는 이들이 나타나는지를 경계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이 가진 힘으로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굴종시키는 힘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친구와도 경쟁해야 하고 형제끼리도 비교의 대상이 된다면 힘의 세계관 안에 있는 것이다. 지식이든 돈이든 인맥이든 건강이든... 힘이 있어야 산다고 여긴다면.... 맞다. 힘의 세계관이다. 숫자를 모으고 더 모으기를 원하고, 다른 이들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삶을 살아가는 무한경쟁으로 승자 독식이 당연시 되고, 하고 싶은 일은 사치이며 생존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으면 뒤쳐진다고 외치는데 하나된 아수라장이 지금 시대이고, 딱 그 힘의 천지다.
모세는 왕자다운 의로움을 발휘하여 기적처럼 나그네가 되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자기 형제들을 보러 나갔다가 한 애굽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았다. 주위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이고 모래 밭에 감춤으로 고통당하는 자기 형제를 구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다시 자기 형제들을 보러 나갔다가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고 잘못한 사람에게 정확히 잘못을 지적했다. 서로 도우며 살자는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세는 자기가 도우려던 사람에게 애굽사람을 제거하고 제2의 바로가 되어 자신들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고, 자신이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했던 정의로운 일이 애굽 통치에 대한 반란의 오해를 받아.. 바로와 이스라엘 모두에게서 피해 도망자가 되었다.
참으로 왕자다운 기개와 의로움이었지만 시대를 잘못만나(?) 자기 형제들을 구원하고자 하고도 버림받아 도망쳤다. 그래도 여전히 의분이 강한 왕자답게, 동네 양아치 목자들에게 횡포를 당하던 미디안의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주었다. 모세는 왕자답게 약자를 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 결과로 자신들을 도와준 애굽사람으로 초대받아 미디안 제사장의 사위가 되어 정착하여 안전을 보장받고 아들까지 낳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게르솜.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다. 모세의 심경이 읽혀지는가? 기적의 왕자가 사람들을 살리고 돕기를 거듭해 도착한 곳은 너무나도 낯선 땅, 타국이다. 모세의 고향은 어디일까?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곳은 그에게 정착할수 없는 곳인가?
무엇이 문제일까?
모세는 힘의 세계관에서 위협을 받으며 기적적으로 생존했지만,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어 힘의 세계관 속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자기를 죽이려던 바로처럼.. 은밀하게 주위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힘으로 때려죽였다. 이런 그의 행동은 잘잘못을 따지는 공의가 선악으로 힘의 세계관을 대변하게 되는 세상속에서 혼란을 증폭시켰다. 비록 자신이 처한 위험한 상황을 피해 도망쳐 나왔지만 여전히 힘의 세계관안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태어난 고향 애굽에 갈수가 없다. 자신보다 힘이 센 바로가 자신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세는 이곳 미디안에서도 그냥 살기에는 괴롭다. 왕자 출신으로 그저 이 황량한 광야에서 시골아재들의 횡포만을 막으며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시시하다. 그래서 그는 도망자의 땅에서 나그네일 뿐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땅에서 타국처럼 나그네인 모세로 살아간다.
기적처럼 살아남아 왕자가 되듯, 유수 대학을 나오고 내노라하는 세계적인 기업에 취업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지식과 부요함을 누리면서도 애정을 가지고 자기 형제를 돌아보고 구원하려고 하다 실패한다. 도우려고 함께 잘 살려고 하다가 오해받아 상처받고 도망하여 홀로 남아 외로이 숨을 고른다. 그러면서도 자기 삶에 만족이 안된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겠다고 하는데 그 안에 샬롬이 없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빌어주었던 샬롬이 없다. 그저 나그네로 다시 힘을 모아 애굽을 정복하러 가든지, 그 애굽에서 내 형제 자매들을 구해내겠다고 힘을 기르려고만 한다. 그러다가 그럴 힘이 내게 없다는 것을 보고는 절망한다. 지금 내 삶은 타국일 뿐이고 나그네일 뿐이다.
이건 복음이 아니다.
잘생겨서 3개월 더 사는 것도 복음 같지만 복음이 아니다. 갈대상자에 의탁하여 생명을 연장하라 하며 저 멀리서 지켜봐주는 것도 복음이 아니다. 높으신 분들의 불쌍히 여김을 받기 위해 수많은 적절함이 만나야 하는 것도 복음이 아니다. 고통당하는 자를 구하기 위해서 힘이 있어야하고 그 힘을 사용해서 구원한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잘했다 잘못했다 재판관이 되려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강자 앞에서는 피하고 약자 앞에서 강한 삶은 복음이 아니다. 이런 삶은.. 내가 기쁘지도 않고, 하나님이 내게 원하는 것도 아니다.
모세의 인생에 복음은 하나님께 있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살리셨다. 부모가 아기를 예뻐서 키우고, 부모에게 버림받아 우는 불쌍한 아기가 불쌍히 여김받는 복음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내가 버린 아기를 다시 품에 안아 젖을 먹이고 키워서 왕자가 되게 하는 복음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그렇기에.. 인생의 해답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힘의 세계관의 허상에 고스란히 쫓기게 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살리기 위해서!! 힘이 필요하다는 환상이다. 돈이 조금더 있으면.. 내가 좀더 성공하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모이면.. 가능할 것 같은가?
그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속아넘어가는 사단이 하는 말이다.
기적처럼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복음이다.
무지막지한 힘의 상징인 바로에 대항하는 연약한 여인들(아기의 엄마와 바로의 딸)이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힘으로 구원하시지 않는다.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공의로 구원하신다. 그래서 샬롬을 주어진다.
타국이었던 땅, 나그네로 살았던 땅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면 그곳은 거룩한 땅이 된다. 타국인줄 알았던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나그네인줄 알았던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대의 타국은 어디인가? 그대는 누구로부터의 나그네인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샬롬이 임한다. 알고도 모른척 하는 이세상에서 깨닫기 힘들었겠지만 샬롬의 근원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과 함께 복음으로 살고 싶지 않은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는 주님을 만날 차례이다.
타국에서 나그네된 모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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