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나눔. 이 글은 코로나 시대의 변화와 대책에 대한 글입니다. 김규배 목사(유튜브 채널: 김규배큐티한남자)의 글을 기고받아 나눕니다. 코로나 시대의 불확실성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수용하고, 가정과 교회에서의 사랑과 평화를 기대하자고 합니다. 샬롬 복음이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준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글이라 여겨집니다. *다만, 종말론적 입장과 대책에 대한 내용은 연구소의 방향과 다를
코로나 시대, 어떻게 살아갈까?
들어가는 말: 코로나 관련 책을 읽고
2020년은 코로나로 시작해서 코로나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코로나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어보게 되었다. 마침 지금 일하고 있는 단체에서도 코로나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보니 코로나에 관련된 많은 기사들과 칼럼을 검색하고, 읽어보고,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책들과 자료들이 말하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정리되는 듯했다. 기왕이면 이것을 글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읽은 것 중에서 신학서적 2권, 일반서적 2권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신학서적)
(일반서적)
이 책들을 읽으면서 확인하게 된 차이점은 오직 하나였다. 코로나에 대한 대책!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루기로 하고 먼저 이 책들이 말하는 공통점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듯하다.
1. 코로나 책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
(1) 코로나로 인한 위기인식
모든 책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두고 이는 보통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미 피부로 겪고 있기도 하고, 이 사실은 너무나 대중적이어서 어느 책의 어느 작가의 목소리를 들어도 쉽게 공감되고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니 자세한 이야기는 패스한다.
(2) 코로나로 인한 생활의 변경 = 뉴 노멀(New Normal) 시대가 왔다.
이 책들이 주장하는 선명한 공통점은 코로나로 우리의 일상이, 생활이 변경되었고 이것이 새로운 일상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가장 강렬한 주장은 코로나 사피엔스라는 말인데, 코로나로 인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 외에도 21세기가 시작된 것은 2000년이 아닌, 코로나 이후라고도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가 시작된 것과 같은 것으로, 인류사에 충격을 주는 것과 더불어 국제 정세와 경제 및 일상생활 등 전체적인 흐름을 바꾸는 사건이 있어야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3) 코로나로 인한 생활의 변경 예측 내용
책을 읽으면서 일반서적이 제시한 코로나 관련 예측이 간결하고 알기 쉬웠다. 여러 가지 예측이 나왔으나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비대면과 경제산업, 환경. 이 세 가지였다.
1) 비대면
코로나 이후에는 교육과 의료, 경제, 레저, 종교를 비롯한 모든 생활권에 비대면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었다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형태의 비대면 위주의 삶이 우리의 미래의 일상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2) 경제산업
코로나로 인해 직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재택근무가 활성화되었고, 각종 새로운 산업의 기회가 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변화는 많은 실직사태를 가져올 것이고, 경제는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코로나로 인한 이런 대량 실직과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나오고 있고, 나와야 하지만 대부분의 정책은 한시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는 언발에 오줌누기, 카드깡 수준이어서,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이 차후 2-3년 뒤에는 오히려 경제산업의 발목을 잡고, 큰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는 전망이다. 지금 대부분의 국가에서 내놓는 물량적 대책은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경제적 요구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정치인들은 끝내 자기가 선출되어야 하기에 위기상황에서 현재 국민을 위한 선심을 쓰는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쓰나미처럼 몰려올 위기를 막을 돈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고 굉장히 암울하게 전망하는 이유이다. 코로나 이후 비대면 및 산업구조 개편, 중소기업의 몰락 등으로 실직 인구가 늘어나게늘 되어 있는데, 어느 기간 정도는 각종 혜택과 복지정책으로 해소해줄 수 있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국가 부채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세수를 확대할 수밖에 없는데, 세금을 거두어 들일 대상이 없다는 것에서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돈을 만들어내는 산업의 부재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가 마주하고 있는 인구 절벽으로 실질적 노동 인구가 극감하고 있는 현실에서 코로나 사태는 노동 인구의 절벽을 극대화시켰고, 정부의 재정 마련에 빨간불이 너무 급하게 들어온 상황이다. 그래서 경제산업에 대한 전망의 핵심은 코로나로 인해 지금 위기를 마주하고 있지만, 코로나 이후 2,3년 뒤에 있을 위기가 진정한 코로나가 만들어낼 위기라고 예측하고 있다.
3)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신학 서적보다는 일반 서적에서 더욱 두드러진 반응은 바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다. 코로나의 사태의 원인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환경의 변화 혹은 파괴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 선한 영향력을 주었지만, 자연에는 반대로 악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위협이 되어 등장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더 큰 경고는, 이런 일을 겪고도 인류의 태도에 반성이나 변화가 없으면 또 다른 코로나가 계속적으로 나와 인류의 위험사태는 지속될 것이고, 이는 인류 생존에 극심한 위협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코로나 시대 이후에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경제산업, 정치에서 환경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2. 코로나 논란에서 보이는 자기주장 방식
코로나라는 주제에 관련된 여러 책들을 보면서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조금 재밌는 현상인데, 일단, 신학서적 경우 상대방의 견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반서적도 자기와 다른 예측을 폄해하는 경행이 있다. 굉장히 독선적인 자세를 유지함으로 자기주장의 권위를 살리는 어법을 선택한다. 오늘날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얻는 방법으로 비판에서 시작한다.
관심이 좀 더 가는 신학 서적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학서적은 서로 대립하는 큰 구조는 대체로 2가지이다. 먼저는 코로나를 종말론적으로 보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코로나를 새로운 기회로 보려는 유토피아 세계관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이 코로나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아포칼립스 세계관으로 코로나를 바라보면 이 상황에서 필요한 대책은 회개가 우선된다. 유토피아 세계관으로 코로나를 바라보면 아름다운 전통을 만든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실패한 것이니, 기존의 방법을 수정하고나 새로운 방법으로 대체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종말론의 차이
최근에 개인적으로 종말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다 보니 이 두 가지 관점이 갖는 차이점의 이유를 알 것 같다. 먼저, 종말론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이 있다. 이 관점들의 차이가 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맞물리는 천년왕국의 존재 유무와 시기이다.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오셔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이다. 후천년설은 지상에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진 이후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무천년설은 계시록에 나온 천년왕국은 상징적인 것일 뿐, 실제 역사 가운데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천년왕국은 없다는 것이 다.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오기 전 환란은 극대화되고, 세계는 더욱더 악해진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인의 삶의 노력과 무관하게 세상은 멸망해 나간다. 하지만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은 지금을 천년왕국으로 여기기에 기독교인은 무단히 노력하여 이 땅에 천년왕국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오시기 때문이다. 무천년설은 여기에 더해 교회가 이 일을 이루면 자연스럽게 이 땅에 천국이 도래한 것으로 본다.
이 중에 무엇이 맞느냐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고, 교단이 구분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무엇이 옳은지 경험하지 못했기에,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은 미래에 관한 성경적 예측을 하는 것은 각 개인이나 교회가 판단할 수 있는 자유라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 안에서도 종말론에 대한 관점에 따라 요구하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향은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신앙서적의 결론은 저자가 어떤 종말론적 관점을 가지냐에 따라 달라진다.
(2) 나의 입장
이 이야기를 쉽게 말하면 '천국을 기다리느냐? vs 천국을 만드느냐?' 혹은 '말씀 성취를 기다리느냐? vs 말씀 성취를 스스로 이루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무엇이 더 성경적이냐?라는 물음을 하는 것은 섣부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천국을 기다리며, 말씀 성취를 기다린다. 이 말인 내 삶에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복음을 나누는 삶, 교회를 섬기는 삶을 살고 싶다. 이렇게 개인의 삶에서 말씀을 성취해 나가며 살아야겠지만, 내가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끝내 성취를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이다.
아포칼립스는 요한계시록의 제목이기도 하고, 종말이라는 뜻으로 유토피아는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의 세계관은 유토피아는 없으며 오직 아포칼립스만 있다.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심판받을 것이다. 점점 더 악해질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세상은 교회 밖 세상이 아니다. 교회를 포함한, 성도를 포함한 모든 것이다. 교회도 악해지고, 성도도 악해질 것이다. 시간이 흘러 역사가 진행할수록 세상은 점점 어두워질 것이다.
3. 코로나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코로나에 대해 한 목소리로 문제점과 바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 신학 서적과 일반 서적이 보여주는 차이점인 대책을 이야기해보자. 대책은 저마다 주장하는 바가 달랐다.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코로나에 대한 대책
1) 코로나 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이 책이 말하는 대책은 파라볼라노이, 위험을 무릅쓰는 자가 되자는 것이다. 전염병의 위기 속에서 죽음을 극복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병자를 섬겼던 초대교회 모습처럼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를 저자는 교회의 공공성 회복이라고 명명하였고, 자신의 저서 페어 처치와 성자와 혁명가에서 이론과 실천을 소개했다고 한다.
2) 포스트 코로나와 한국 중심 시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쓴 이 책은 진정한 목회 회복과 설교의 회복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광복 목사)이 세운 신학과 설교를 활용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대부분 가정에서 예배로 모였으니 이번 상황이 그저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이번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21세기 원격 목회를 대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지금 대부분 진행되고 있는 건물 제도 목회 역시 최선을 다해 지속해야 하고 모든 설교에 교재를 만들어 성도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3) 코로나 사피엔스, 코로나 이후의 세계
이 책들은 코로나 19 상황에 대한 분석과 위험성을 말할 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대책은 말하지 않는다.
4) 결론
이상의 다양한 대책들에서 보여주는 차이점은 사실 한 가지 원인을 갖는다. 모두가 코로나의 위기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공감을 가지고 있지만, 새로운 대책은 없다는 것이다. 기존 자기들이 주장했던 것을 코로나가 입증했으니 자기주장이 옳았고, 그러니 기존에 자기가 주장한 것을 꼭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끝내 새로운 대책은 없다. 정치, 사회, 경제, 환경, 종교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바는 같다. '기존에 내가 제시한 것이 코로나로 인해 입증되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기존부터 주장해온 자신의 의견이 대안이며 해결책이라는 결론이다. 즉 새로운 답은 없다. 기존에 저자가 주장했던 것의 보강용, 혹은 입증용으로 코로나 사태를 이용하는 것 같다. 새로운 답을 얻고자 코로나 책을 읽겠다면 말리고 싶다.
(2)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전문가의 예측과 끝내 답이 없는 결론을 보고 있자니 더 답답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던 것을 기준으로 내 생각을 정리해봤다.
1) 경제
경제는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다. 국가도 돈이 없고, 개인도 돈이 없다. 이런 상황에는 교회도 돈이 없다. 얼마든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못할 상황이 된다.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정말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공공성과 더불어 자기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공공성을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우선적으로 자신을, 자기 가족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재정의 집중이 필요하다. 막연히 구제를 하는 게 아니라 내 가족, 내 친구, 내가 다니는 교우들을 돌봐야 한다. 이것이 확장되는 공공성, 희생의 섬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각자가 각자를 돌볼 때 그것을 하나의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원이 점점 커지고, 중심점이 많아져야 한다. 중심점을 가진 원들이 많아질 때 그 반경이 겹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실제로 각자의 가족을 돌보는 일은 사회를 돌보는 일의 기초이다. 그 파동이 내 가족에서, 내 이웃으로, 내 동네로, 나라로, 국제로 커져가야 한다. 이 가치가 넓게 펼쳐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 가족 먼저 돌봐라!
교회 내 실직자들이 존재하고, 살림이 어려운 사람이 더 늘어난다. 그들을 먼저 구제하라. 교회는 교인을 먼저 돌봐야 한다. 그것도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더 이상 재정이 없기 때문이다. 재정은 점점 없어질 것이다. 이제 불필요한 재정은 줄일 수밖에 없다. 이제 교회는 공갈빵처럼 속은 비었으면서도 뭐가 있는 체해서는 안된다. 술빵처럼 뻑뻑해야 한다. 그 내실이 다져져야 한다. 즉 필요 없는 재정을 정리하라! 그리고 교회 내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먼저 도와라!
2) 비대면 사회
또한 비대면 사회를 대비해야 한다. 원격 교육은 교육의 기회를 극대화시켰다. 이제 세계 누구도 하버드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교육의 질, 학생의 질은 어떻게 되겠는가?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배움이 아니다. 인격과 예의 가르침이 포함된 영역이다. 사람 냄새나는 것이 진짜 교육이다. AI는 교사를 대체할 수 없다. 대체해서는 안된다. 원격 교육이 효과를 보려면, 원격강의를 받는 동안 조력자가 있어야 하고, 교육이 효과 있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교회가 원격교육의. 조력자 혹은 담당자 역할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기존의 공부방 형태가 아니라, 원격 강의를 도와주는 공부방 사역은 이 시대 좋은 사역 방법이 될 수 있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예배의 질과 예배를 받는 성도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도 재택을 해야 한다. 기동력을 높여야 한다. 교회 건물 중심 사역을 벗어나야 한다. 성도들의 가게를 적극 활용하여 만남을 유지해야 한다.
후속 대책으로 세이비어 교회 방식을 이야기하고 싶다. 세이비어 교회의 방식은 교인의 지적 상승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만나서 성경을 공부하고, 공부한 성경을 토대로 지역사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는 것이다. 찾는 방법은 소그룹 토론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그룹은 스스로 일을 한다. 재정이 교회로 몰리지 않고, 소그룹에서 해결된다. 교회 헌금은 소그룹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이것이 진정한 재택이며, 원격이고, 비대면 사회 안에서 교회의 역할을 찾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 둘을 위해 사역자는 공부해야 한다. 바른 신학, 목회를 공부해야 하고, 사회 경제도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경험해야 한다. 또한 매우 영적인 상태가 되어야 한다. 대규모 집회가 아닌 소규모, 가정, 개인의 영성을 책임지고 관리해주고, 조언해주고, 이끌어 주는 영적인 목사가 되어야 한다.
4. 나가는 말: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한 삶 살기
코로나가 무서운 이유는 단 하나다. 불확실성! 코로나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불확실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불확실하다. 교회의 미래도 불확실하고, 지금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역사와 성경은 언제나 확실해 보인다. 역사와 성경이 말하는 것은 심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심판을 맞이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이다. 목회자는 이것을 성경과 역사를 통해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시대에 목회자는 사랑과 인과 예를 가르쳐야 한다고 권하고 싶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알아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인(어질 인, 인격)과 예(예절 예, 사람 사이의 태도)는 이미 우리 문화에 녹아져 있는 유교적 요소이기도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의 한 모습의 구체적인 한 예시일 수 있다.
모두가 불안한 시대, 더 큰 위기가 닥쳐올 시대는 사랑과 인과 예가 없어지는 시대이다. 각박함 가운데 미움과 증오가 살아남는 시대이다. 첨예하게 대립된 상황에서 사랑과 인과 예를 말하면 서로에게 공격받게 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시를, 십자가를 기꺼이 지어야 한다. 모두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오직 그 길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과 인과 예를 통해 그 간격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교회가 그 안에서도 희망과 소망의 씨앗을 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딥 임팩트라는 영화가 있었다. 당시 재난영화가 굉장히 많이 나왔는데, 영화들은 모두 끝내 심판을 극복하는 모습을 다루었다. 그런데 딥 임팩트는 조금 다른 것이 재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 안에서 나는 다른 영화와 다른 감동을 기억한다. 심판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 중에서 아버지와 딸, 다른 가족들이 멸망의 단계에서 사랑을 선택하며 함께 겸허히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들은 나에게 감동으로 기억된다. 심판은 이미 예정 된 사실이지만, 심판을 받으며 심판 전에는 미처 얻지 못한 사랑과 평안을 찾는 모습이야말로 참된 교회의 역할이다.
목사로서 나는 코로나 시대 세상이 얻을 수 없는 사랑과 평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가져다 주기 원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더 지성적으로, 더 영적으로, 더 면밀하게 그들에게 다가가기 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주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이제부터라도 진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심판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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