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자정 불가능하다(배덕만)를 읽고 기독교와 삶을 생각하다
한국일보에서 개신교 회복 주장하는 신학자로 '기독교 역사학자 배덕만 교수'의 이야기를 읽는다. 기독교가 사회의 일부로서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게 실감 난다. 더 나아가 '전광훈 교회 시대'로 비틀어진 기독교에 대한 우려가 넘실대는 시대에 다른 기독교의 목소리를 만나서 반가웠다. 이런 일을 학자들이 앞장 서주는 게 감사하다.
내용은 ‘개신교 회복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라는 다소 생소한 모임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그에 대한 더 깊은 인터뷰를 담은 모양이다. 배덕만 교수가 짚어내는 대한민국의 상황,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은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역사학자의 눈으로 본 전광훈과 개신교의 위기는 주목할만하다. 더불어 그가 제시하는 문제의식과 대안도 심정적으로 진실함에 귀가 기울여진다. 다만 그 원인에 대한 진단과 그 대안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인터뷰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점을 정리해볼까 한다. 먼저 배덕만 교수의 인터뷰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개신교: 전광훈류의 목사들과 반공주의 기독교?
정치적인 목사로 기독교 정치판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부류가 있다. 전광훈은 이런 부류의 행동대원이었다가 지금은 보스가 된 케이스다. 그는 청교도영성수련원을 만들어 부흥회를 다니며 큰 교회들과 관계를 맺고, 기독당 실무를 담당했다. 자연스레 우익 성향 거물 목사들과 연결되었고, 이후에는 이를 기반으로 황교안 같은 정치인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가 다니는 부흥회는 성령체험을 도구로 헌금 많이 걷고 사람을 늘리는 것이다. 그의 내면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하려는 욕망이 종교적으로 나타난 형태이다. 이런 그의 욕망은 청교도영성수련원으로 카드회사, 장례회사, 화원 등의 사업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가. 전광훈의 성장과 개신교의 자정 실패
전광훈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몰락 시기에 회장이 되고 광화문에서 문제인 하야 집회를 통해 성장했다. 한기총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대표회장을 할 수 있었는데 금품 살포 등 선거 과열로 한기총 해체 운동이 벌어지고 큰 교회가 빠져나가는 사이에 전광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된 이후에 자유한국당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보수교단 대표 상징성이 남아있던 한기총의 이름을 걸고 전광훈이 대통령과 싸움에 앞장섰다. 이때 보수 세력에게 지지를 얻었다. 그 이후에 사랑제일교회는 전국구 교회가 되었고 일부 대형교회와 김문수 김무성 같은 정치인들이 찾아오면서 스타로 거듭났다. 어려운 난국에 유일하게 득을 본 사람이 전광훈이다.
전광훈 목사에 대한 이단, 금권선거, 막말 등의 논란이 있었지만 자정 되지 않았다. 배덕만 교수가 보기에 교계의 자정은 불가능하다. 교회사에서 자정이 성공한 적이 없다고 한다. 루터도 가톨릭을 바꾸지 못했고, 이후에 가톨릭은 신학적으로 철옹성이 되어 내부자를 단속하고 말 안 들으면 이단으로 몰았다. 조선시대 유학이나 일제 치하 동학이 한때 세를 얻었지만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니 거의 사라졌다. 개신교도 이렇게 가다가는 한 세대를 못 버틸 것이라고 한다.
나. 우익과 손잡고 성장한 기독교와 위기
한국교회는 광복 이후부터 남한에서 국가를 세우는 과정의 핵심에 있었다. 상당수 북한에서 내려오신 분들(서북지역)이 중심이 돼 1~5공화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면서 개신교가 양적, 질적으로 급성장했다. 광복 직후 5% 미만이었던 교인이 30년만에 20-25%가 되고, 정부 관료, 변호사, 의사, 언론인, 기업인의 교인 비율은 훨씬 높고, 대통령 선출에도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80년대 이후 민주화, 다원화 되는 한국사회에 여전히 반공을 외치며 이주민과 미투 운동, 차별금지법을 용납 못하는 사상적, 문화적 수구 주의자로 남았다. 한국교회는 19세기, 1945년 이전에 머물러 있다.
이와 더불어 교회의 성장이 정점에 오른 2000년대에 들어 수많은 일탈 현상이 드러났다. 교회 세습, 배임 횡령, 성추행, 교회 재산을 둘러싼 법정 투쟁이 주류 교회에서 일어났다. 이를 두고 개독교 표현이 나오고 내부자들은 교회를 떠났다. 이런 현상에 대한 위기감으로 기독교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제기는 많았지만 개혁이나 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불순분자로 몰아 자정의 목소리를 막았다.
다. 개신교의 변화 가능성은 낮다
개신교는 쇄신을 하기 위한 구조적 한계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위게질서가 있다. 상급 기관의 결정에 따라 통제가 된다. 하지만 개신교는 교황 제도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상위 기관이 아예 없다. 이단이라고 몰아내도 새 교회를 세우는 식이다. 18세기 이후로는 정교분리로 국가도 개입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한국 기독교는 반공주의가 신학적 정체성보다 중요하다. 광복 전 북한에 개신교의 70%가 서북지역에 있었다. 지주들이었던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밀리고 교회와 고향을 빼앗기고 월남했다. 냉전체제에서 남한은 우익 사회가 됐고 이북 출신들은 더 적극적으로 반공을 내세웠다. 정권을 잡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은 불법 선거, 쿠데타 등으로 정통성이 부족하니 지원세력으로 기독교와 손을 잡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느끼고, 노무현 정권의 사학법 개정은 기독교 사학이 전체의 8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특권을 없애는 것으로 여겼다.
정치권은 우익기독교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다가, 문제가 되면 거리를 둘 것이다. 그러나 전광훈을 통해 교회 내부 문제를 다독이고 입지를 다진 교회들, 특히 대형교회 목사들이 보수집회에 돈과 인력을 공급했던 것이 개신교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라. 대형교회, 개신교 주류의 근본주의가 문제
전광훈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이다. 그를 가능하게 한 판 자체가 문제다. 전 목사를 지지하고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목사들도 다수는 얼굴마담에 불과하고 교회의 실권은 장로들, 헌금을 많이 내는 핵심 의사결정 그룹이 쥐고 있다. 상위 1% 안에 드는 기득권 세력이 대형교회를 움직인다. 이들이 국민의 힘(자유 한국당)과 정치적 이념, 계급적 지위가 일치한다. 우익에 속해 혜택도 보고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고 그들이 교회를 움직이고 있다.
전문적으로 말하면 '근본주의적 개신교'가 문제다. 종교학자나 역사학자들은 한국 개신교의 70%가 근본주의 성향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김대중 정권부터 문재인 정권까지 강력하게 반정부 목소리를 냈다. 태극기 부대는 그 극단적이 버전일 뿐이다. 개신교 인구 중 60-80%가 '친 전광훈' 성향이다. 7-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NCCK)나 진보적이라는 감리교나 기독교장로회도 대부분 보수적이고, 지역교회들은 보수교단과 차이가 없다.
근본주의는 1800년대 후반 유럽에서 진화론을 비롯한 새로운 과학이 교리와 성경의 권위를 위협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교회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근대주의 , 세속적 인본주의를 반기독교, 반종교로 몰고, 성경 말씀을 순수하게 유지하려는 생각이다. 근본주의 신학은 미국에서 만들어져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이식됐다. 그래서 좌파정권이 교회를 해하려 한다고 주장하면 쉽게 받아들인다. 나이가 많을수록, 근본주의 신앙 색채가 강할수록 쉽게 받아들인다.
마. 대안 :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위한 새 우물
루터와 칼빈이 가톨릭 자체를 바꾸지 못했지만 나와서 새 교회를 세운 것처럼 우물을 새로 파야 할 것이다.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견디다 보면, 지지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다. 10년전에 한국교회가 이상하게 가는 것에 제동을 걸려면 교인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대안적 신학교육 기관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를 만들었다. 일반 신도를 대상으로 한 야학 같은 건데 지금도 400명 정도가 수업을 듣고 있다. 교회 안에서 느끼는 갈증이 그만큼 심하다는 뜻이다.
종교의 출발은 이기적이다. 내 생존과 번영을 위해 초월자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이 욕망이 더 자라면 종교가 이익집단이 될수 있다. 세상이 상생의 세상으로 가려면 이기심을 넘어서는 초월적 가치가 필요하다. 그 버튼이 정의, 공의, 자비, 사랑이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같은 고등 종교가 미신과 다른 점이다. 수많은 이익집단이 혼돈스럽게 싸울 때 서로 용서하고 공존하자는 얘기를 하며 초월적 가치를 보여주는 게 종교의 보편성 공공성이다.
기독교의 고유성은 삼위일체나 예수의 양성론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에 면면히 내려오는 가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가진자들의 배려다. 성경은 가난한 자들에게 혁명을 일으키라 하지 않는다. 그들을 돌보라고 가르친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으니 예수에게 하듯 소외된 자들에게 하라고 가르친다. 130년 전에 우리나라에 개신교인이 한 명도 없던 때 누군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교회를 안 가는 이유도 이걸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변화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8. 내가 아는 기독교, 복음으로 사는 삶
배덕만 교수가 지적하는 전광훈류의 목사들이 보이는 정치적 행보, 부흥회를 통해 종교적 열망을 채우고 돈과 사람을 끌어모으는 지적은 모든 기독교는 아니지만 분명 우리 기독교 안에 있는 모습이다. 아무리 명약이라도 2% 독약이 섞였다면 그것은 독약이 된다. 속물주의 사회에서 기복주의 신앙, 성공주의에 물든 교회가 휘청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미국이나 선교지도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개인들의 구원을 얻는 등용문으로 소비된다.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으니 살기 위해 신앙을 갖는다. 지옥보다 천국에 가야 하니 죽기 전에라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 기왕이면 복을 받으면 좋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 잘 보여서 복을 받고 싶어 한다. 주로 그 복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돈이나 성공, 자녀의 미래, 건강 같은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건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고, 하나님이 복을 주는 것은 명확하다.(요3:16, 창 1:28) 하지만 살기 위해 예수를 따르고,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거기에만 머무르면 정작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감성팔이 소재가 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상은 어릴 적 청년시절에 가졌던 열정으로만 추억된다. 유대인들의 종교,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로서 기독교는 생존을 위해 복을 위해 모인 집단이 아니다. 태초의 창조부터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과 자연스레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사랑함의 결과이다. 구약과 신약은 온통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이야기,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에서 비롯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만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인 이슈이다. 역사적으로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왕이나 제사장들, 신약시대의 바리새인이나 12제자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야기는 현실 정치의 배경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현실 정치적인 면은 보수냐 진보냐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유진 피터슨이 사용하는 '주 경외함 Fear of the Lord')이 기준이었다. 말로만 고백하는 신앙이 아니라 주 경외함이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을때 선지자들은 나라 국방이나 경제면에서는 강성해져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을 꼬집었다. 예레미야는 오히려 이 나라가 망해야 산다고 울며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배덕만 교수가 지적하는 '전광훈류의 목사들과 우익과 손잡고 성장한 기독교', '반공주의가 신학보다 앞서는 기독교'는 사실 기독교와는 무관하다. 그저 기독교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의견과 행동일 뿐이다.(하나님 편에서 그들이 교회에 속해있는가는 우리가 논할 범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말한대로 조금의 이물질이 전체를 못쓰게 만든다는 면에 있어서는 마냥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맞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배덕만 교수가 지적하는 우익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성도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인본주의를 배격한다는 우려에 대해 심정적 동의를 하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을 형성하는 과거의 역사가 중요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들러가 말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하기로 원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본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기 마련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마 7:14).
우리는 완벽한 인생을 살고 싶지만, 사실 완벽한 인생이란 없다. 무균실 속의 이상적인 결과 같은 삶을 꿈꾸지만 한세대만 지나도 그 평가는 공과 과를 함께 헤아리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도 천추의 한이 많은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 경외함의 자세로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 안에서 흘러 나오는 샬롬을 맛본 뒤에 가족과 친구와 교우와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여기에 좋은 친구, 좋은 교회가 있다면 더 수월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새 우물 같은 새 교회가 시작될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분리를 외치며 나아가는 진리 싸움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세 아들이 나뉘어 다투고 내 방에서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종국에는 울면서 '형을 내쫓아달라'고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그럼에도 부득이 헤어질 때가 있을 수 있다. 아마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시작되고,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나뉜 것이 그런 흔적들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이건 새로운 우물이라기보다는 본질로의 회복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의 회복인 것이다. 적어도 개신교 목사인 내 이해로는 그렇다.
가진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것을 기독교의 본질로 언급하는 심정은 공감하지만, 그것은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결과이지 그것이 조건 혹은 앞선 명제가 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신앙, 우리의 행복,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삶에 샬롬이 있어야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을 도울 수 있다. 그 와중에 넘치는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가난한 자들이 배격당하지 않고) 행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이며 대안이 될 것이다.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극우 보수 기독교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더불어 코로나 시대에 비대면 예배로 전환한 교회들, TV나 핸드폰으로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 성도들의 고충이 크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가족에게 내 친구, 내 교우, 이 나라, 이 세대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근본주의 신앙의 자랑인 성경을 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성령 하나님을 통한 기도와 일상에의 참여가 필요하다. 사랑이 차오르면 고개를 들어 친구와 가족에게 카톡을 남기고 목소리를 듣고 함께 한적한 길을 걸으며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면 좋겠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 샬롬이다. 마음껏 슬퍼할수 있고 다시 꿈꿀 수 있는 샬롬. 그 행복을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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