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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세상에생명을주는예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2장 요약

by 샬롬보금자리 2021. 3. 4.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2장 요약

(p.31-67)

부활절 예배, 한국 정교회

2장. 성만찬

그리스도의 십자가 p.31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삶의 완전한 표현이셨다. 세상의 모든 삶이 예수님의 삶 안에 하나로 모아져 있다. - 그리스도가 세상 생명이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독생자, 요3:16)

2.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배척받았다. (생명인데 죽임당했다.(역설))

3. 우리(인류)는 더 나은 문명으로 발전하려고 한다. 그런 의도대로 인도적인 사회(UN에서 조정하고 평화를 지키고, 인류 번영의 기술을 공유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사회복지, 인권보장, 환경보호 등)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4. 그러나 그리스도가 배척 당했을 때, 이는 실은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배척했다는 것은) 영원한 사실로 남아있다. - “그리스도는 세상의 종말때까지 고통 가운데 계신다” 파스칼. (믿지 않는자들, 배척하는 자들의 현재성에 의해)
TP.  선악과 사건이 종말의 시작(생명나무와 단절, 실낙원) 아닌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 자들의 결국이 그런 상황에 있다. 

5. 현재상황. (저자가 말하는) 지금의 기독교는, 사람들이 기독교적인 삶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마치 십자가 사건이 없었던 것이 될수도 있다는 식으로 설교할때가 많다. : 사회복음, 자력구원, 선행강조, 예수님 사건 간과한 성공, 풍성한 삶 대한 기대?를 가리키는 듯. 

6. 세상이 개선될수 없다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곳이 될수는 없다는 말이다. / 복지국가와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7. 기독교는 세상을 정죄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미) 스스로를 정죄했다.(예수님을 버렸다)

8.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런 종말의 증인이어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자연적 기쁨의 종말, 모든 만족의 종말, 합리적 행복추구로서의 삶의 종말을 증언하는 증인이어야 한다. / 그리스도를 죽인 세상안에는 기쁨과 만족이 없다는 말. 

9. 현대 철학이 말하는 실존적 불안, 정말, 부조리 같은 말에 신경쓸 필요없다. 
/ 저자의 의견은, 그리스도가 생명인데,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래서 참 생명(삶)이 없다, 십자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말.
/ TP.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철학을 진지하게 대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철학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지 않을까? 역사를 하나님의 신적 계시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10. 기독교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잊고 살만하다고 생각하고 살기도 하더라. 실은 그리스도가 죽은 세상에서 자연적 삶은 종말을 맞았다. 
/ 저자가 하려는 말은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삶(생명)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강조.
/ 다른 관점을 고려하면.. TP. 예수님의 죽음을 죽임의 관점에서 본 것, 하지만 예수님의 자발적 죽음을 통한 대속 역시 조명해봐야 한다. 

기쁨의 성례 p.33

(완전한 삶의 표본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죽은(죽임당한) 이 세상에서는 “자연적 삶”이 종말을 맞았다)
1. 하지만 실제 기독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쁨의 선포였다. 지상에서 가능한 유일한 기쁨을 선포해왔다. 기독교는 기쁨의 선포를 떠나서는 도저히 이해될수 없다./ 모든 기쁨과 만족, 행복의 종말의 운명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기쁨.

2. 교회가 이 기쁨을 잃어버렸을 때, 이 기쁨에 대한 믿음직한 증인이 되기를 그쳤을 때, 교회는 세상을 잃어버렸다. /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쁨이 없다. 니체의 비난.

3. 기독교의 모든 다른 요소들(교회, 선교, 선교 방법 등)이 흘러나오고 의미를 얻는 것은 이 기쁨에 의해서다. *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기쁨의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4. 이 기쁨은 우리가 정의내리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수 있는 것이다. 그 유일한 방법은 교회가 처음부터 해왔던 성례, 성만찬(the Eucharist)이다. 성만찬은 예전(liturgy)이다. 

5. 예전에 대한 오해 [1] 예전중심적 마인드를 가진 이들은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여김, [2] 예전을 교회가 정말로 해야 하는 것에서 벗어난 심미적, 영적 일탈 행위로 여김. -> 예전적인 쪽과 비예전적인 쪽
 / 예전을 “제의적”(cultic) 범주로 축소시켜 이해하고, 예전을 삶의 “속된” 영역들이나 교회의 다른 활동과 구분되는 예배 행위로 정의하는 오해 때문이다. 

6. 예전, 헬라어 레이투르기아leitourgia의 본래의 의미: [1] 사람들이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 이상의 무엇이 되도록 해주는 공동의 활동을 의미함.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가 되도록 하나가 되게 하는 활동 의미) [2] 전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한 사람 혹은 몇몇 사람들이 행하는 기능/ 사역을 의미, [3] 고대 이스라엘에서 선택된 소수의 사람이 메시아 오심에 대해 세상을 준비시키는 공동의 일 [4] 교회 그 자체가 레이투르기아다. 즉,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좇아 살며 그분과 그분의 나라에 대해 증언하는 사역과 소명이다.

7. 따라서 성만찬은 단순한 종교활동(세속주의의 관점에서 일상과 구분된 종교적인 활동)이 아니다.(마침-더이상 종교활동은 없다. 성만찬으로 기쁨에 참여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교회가 하나되게 하는 것,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8. 예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첫째 조건은 “예전 신심(liturgical piety, 예배의 경건)’에 대해 잊는 것이다. 

9. 성만찬은 성례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기되는 질문들이 있다. [1] 성례가 중요하고 말씀은 안중요한가? [2] 성례에 참여한다고 저절로 기쁨을 누린다는 성례주의 마법을 신봉하는 것은 아닌가? 이는 기독교의 영적 성격을 배신하는 것이 아닌가? /성례만 중요하게 여기느라 다른 말씀과 기도, 교제, 봉사 같은 것들의 영적인 성격을 간과한 것 아닌가? 
 
/ 이 책의 목적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게 아니라, 그 질문들이 제기되는 맥락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10. *결론. 성만찬은 교회가 주님의 기쁨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그렇게 그 기쁨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세상 속에서 그 기쁨의 증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바로 교회의 소명의 핵심이며, 교히의 본질적 ‘레이투르기아’이며,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성례다.

여정의 시작 p.36

성만찬 예전을 하난의 여정, 하나님 나라 차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으로 이해하자. 현실도피,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세상의 실재(죄로 인한 죽음과 주어진 새생명)을 보고 누리는 것이다. 이 예배는 집을 나서는 떠남부터 시작이다. 이 예배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고 천국을 경험하는 승천의 예전이다. 내 삶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 바로 성례의 출발점이고, (천국을 경험한 자로 기쁨과 평화의 증인이 되도록) 그 변화시키는 힘과 실재를 경험하는 조건이다. 

1. 성만찬 예전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그것을 하나의 여정, 입장 행렬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만찬이 하나님 나라 차원속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 실제로 orthodox 예배를 찾아보면 입장장면이 포함된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우리가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으며,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궁극적 실재를 볼수 있게 된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실재 속을 더 깊이 들여다 볼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세상과의 분리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세상의 실재(세상의 죽음, 세상에 부여된 새 생명)을 보고 누리는 예배

3. 이 여정은 예배를 위해 집과 침대를 떠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어떤 성례적 행위가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은 교회를 이루러 가는 길, 하나님의 교회로 변모되는 길에 오른 것이기 때문이다. 

4. 예배에 나오는 행위의 의미: 이전에는 그저 세상 속에 있으면서, 함께 했을 뿐이지만, 예배를 위한 떠남은 “한곳에 함께 모이라는” 부름, 그들의 삶, 그들의 세상을 가지고 와서, 지금까지의 그들 이상의 존재가 되라는 부름, 새로운 생명을 사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라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5. 함께 모임의 목적은 단순히 자연적 공동체에 어떤 종교적인 차원을 덧붙이는 것, 자연적 공동체보다 좀더 나은 것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이 모임의 목적은 교회를 충만케 하는 것이며, 모든 것의 마침이요 모든 것의 시작이신 분(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을 현재 가운데로 모시는 것이다. 

6. 이처럼 예전은 세상으로부터의 참된 분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기독교를 현대인들에게 이해될수 있고, 받아들여질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라는 점, 그래서 제자들도 부활이후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분을 알아본다는 것, 그분의 현존의 기쁨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실재 속으로 전향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7. 주님의 영화롭게되심(glorification)은 그분의 낮아지심, 십자가 사건과는 달리 확실하고 객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1] 오직 세례반(세례식 때 사용하는 성수를 담는 그릇)에서의 신비한 죽음을 통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서만 알려질수 있다. [2] 오직 교회의 충만을 통해서, 함께 모인 교회(믿는자들)가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부활 생명을 나눌 때 비로소 알려질 수 있다. 

8. 승천의 예전.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전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도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신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승천이야말로 세상 속에서 그들이 행하는 선교, 세상에 대해 그들이 행하는 사역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천국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생명 속에 잠겨드는 경험을 가지기 때문에).  
/ 승천의 예전후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얼굴이 그 나라의 빛, 그 기쁨과 평화를 반사했고, 그래서 그들은 참으로 증인들이 될수 있었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이론이 아니었다) 
//Tp.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나? 그 나라의 빛, 기쁨과 평화를 반사하나? p.39
 /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를 만나지 못하고 그저 동일한 옛 세상을 만날 때가 너무 많다. 이는 우리가 제자리에 머무는 것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송영 p.40

(頌 칭송하다 송, 榮 영화,꽃 영; 예배 시작과 끝에 들어가는 기도형식의 찬송)

하나님 나라의 복됨을 선언 – 그곳을 갈망하며 그곳으로 나아가는 시작을 알림-하면, 회중은 동의의 뜻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하며 참여한다. 그 이후에 공동찬양과 공동기도를 하는데 십자가의 죽음보다는 그로인해 부여된 기쁨에 초점을 맞춘다. 어린아이처럼 자유롭게 이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아름다움을 나타내려고 노래, 의식, 예복, 향을 사용한다.

1, 정교회 예전은 장중한 송영“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나라는 복되도다. 이제와 영원히, 세세 무궁토록”으로 시작한다. 
  - 우리의 목적지를 선언한다.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그곳을 향해 간다. 
  - 하나님 나라를 복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갈망과 관심, 우리 전 삶의 목적과 의미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최고 궁극적 가치로 선언한다는 의미다. 
  -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다. 
// 그런 의미로는 사랑한다는 고백이 적절해 보인다. *사랑은 동경의 대상일뿐만 아니라 나와의 관계를 전제한 말이기 때문에.

2.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 삶의 궁극적 목적지가 하나님 나라인 것을 동의한다는 의미, 
  - 이 응답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할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 이 응답을 통해 응답한 사람들이 ‘에클레시아’(교회)가 된다. 

3. 기쁨의 ‘공동찬양’과 ‘공동기도와 간구’를 드린다. 
  - 십자가에 대한 강조도 중요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더 부각되어야 한다. 
  - 노래와 의식, 예복과 향 등 예전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이런 기대의 기쁨, 기쁨의 기대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 그런것들이 있어야 한다는게 아니라,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아름다움(미)는 필요한 것이나 실용적인 것, 쓸모있는 것이 아니다. 
  - 정교회 전통에서는 교회를 지상에 있는 천국이라 말한다.. 아이같은 기쁨의 회복이며 세상을 변모시킬수 있는 유일한 힘, 자유롭고 거침없으며 아무 사심 없는 기쁨이다. 
  -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술과 아름다움을 통해 그 나라를 표현하고 가리켜 주고 싶어한다. “최상의 의미에서 예전은 모든 것이 그림이고, 멜로디이며 노래인 어린아이의 삶이다.”

입당 p.43

(enterance: 집례자가 제단을 향해 나아감)

입당이란 집례자가 제단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 세상에서 장차올 세상,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집례자가 제단까지 가는동안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사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거룩은 이세상을 초월한 천국, 하나님에 대한 경외(두려움과 사랑)를 의미한다. 

  1. 집례자가 제단을 향해 나아감. “이세상(옛세상)”에서 “장차올세상(새 세상)”으로 이동해가는 움직임이다. 동시에 예전에서 핵심적인 움직임이다. 
  2. 더 이상 성전과 제단은 없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제단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다. 예배때 앞에 있는 제단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교회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통행로이자 천상의 성소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다. 
  3. 집례자가 제단에 다가가는 행위는 “은혜”가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란 새로운 존재, 하나님 나라, 장차 올 세상을의미한다)
  4. 집례자가 제단에 다가가는 동안 교회는 찬송한다(하나님 보좌에서 천사들이 부르고 있는 찬송에 참여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불멸하시는 하나님”(찬송 내용)
  5. 사제의 찬양 “거룩하신 하나님, 스랍의 거룩한 삼중 목소리로 찬양받으시고, 그룹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며, 하늘의 모든 천군천사들에게서 찬미 받으시나이다”
  6. 천사: 천국, 저 위와 저 너머에 있는 영광스럽고 불가해한 실재를 나타내주는 존재들이다. 
  7. 천국: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찬양이 영원토록 울려 퍼지는 곳
  8. 거룩하신 하나님. 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신앙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 TP. 학자들과 철학자들을 잘라내는 듯한 느낌이 있다. 

  - 거룩이란 단어를 통해 하나님이 절대적 타자라는 것, 즉 그분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갈증과 갈망의 궁극적 대상이라는 것, 우리가 알아야 할 전부라는 것을 표현한다. 
  - 거룩은 교회가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의 천상적 영광 앞에 서서 드리는 말이요 노래요 반응이다. 

말씀의 예전 p.45

집례자인 사제가 제단에 도착해서 등을 돌려 회중을 보며 평화를 빈다.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이 평화는 그리스도가 주신 평화(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낭독을 위해 복음서를 가지고 올 때 그리스도가 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할렐루야를 외치기도 했다. 말씀의 예전은 복음서 낭독과 설교로, 정교회에서 성례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으로 여긴다. 

1. 집례자인 사제가 등을 돌려 사람을 본다.
  - 교회의 승천을 앞서 인도했고, 그 움직임이 목적지(제단/천국)에 도달했다. 
  - 사제는 자신의 예전을 통해, 교회안에서 부여된 기능과 순종을 통해, 사제이신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에 나타내고 현존케 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말한다. “평화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2. 그리스도안에서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오신다. 그분은 성육하신 하나님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킨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과의 교통)이시다. 
  - 사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그분의 세상에서 이루신 그 평화, 우리가 교회로서 들어간 그 평화를 우리에게 선언하고 수여하는 것이다. 

3. 이런 평화(사제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가 이룬 평화를 빌며) 속에서 말씀의 예전이 시작된다. 
  - 저자(슈데만)는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성례와 구분하는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교회는 말씀의 예전을 성례적 행위로, 성례를 복음적 행위로 보며, 이는 성례를 말씀의 현시(표현)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표현한 것이 성례라는 입장이다. / 하지만 카톨릭은 정교회와 유사하게 7성례를 이야기하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말씀과 성찬’ 2가지만을 성례로 보고 있다. 말씀을 성례로 인정하고 있고, 그 말씀(예수님이 직접 제정하신)에 나온 성찬을 성례로 인정한다. 
  - 말씀의 선포는 최고의 성례적 행위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모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 복음서의 인간의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나라의 현시로 변모시킨다. [2] 말씀을 듣는 사람을 말씀을 담는 그릇, 성령의 전으로 변모시킨다. 

4. 매주 토요일 밤 부활절 철야예배 때, 복음서(성경책)는 장중한 행렬과 더불어 회중 한가운데로 옮겨진다. (큰 성경책을 보이게 팔을 들어서 책을 들고 옴)
  - 주님의 날(부활)이 선언되고 현시된다. 
  - 복음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히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 자신, 곧 부활의 능려고가 기쁨 자체이다. 
  - 과거에는 복음 선포에 앞서 “할렐루야”라고 외치기도 했었다. 성경책을 들고 온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가 이곳에 오셨다고 보았기 때문에 기쁨을 표현한 외침이다.

봉헌 p.47

봉헌은 떡과 포도주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만이 성찬으로 보면 아쉽다. 초대 교부들은 전체 과정을 성만찬으로 보았다) 봉헌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삶, 우리 자신, 세상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 특히 음식으로서 떡과 포도주를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어진 것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봉헌함으로 성례의 집례자(제사장)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룬 회복에 근거한다. 음식을 드리는 것은 하나의 희생제사다. 사랑은 희생이다(인간은 자신이 가치와 의미를 상대에게 두고 그에게 삶을 바치며 그 안에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발견한다) 

우리는 봉헌을 통해 세상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이것을 그리스도안에서 그분을 기억하며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봉헌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봉헌되어야 할 모든 것은 이미 그리스도가 봉헌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봉헌하는 이유는 그분 외에 봉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참생명, 모든 존재하는 것의 충만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래서 “봉헌하는 분도, 봉헌되는 분도 그분이시다” 

“주 하나님이여, 당신의 나라에서 기억하소서” 기억은 사랑의 행위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며 그 하나님의 기억과 사랑이 이 세상의 토대다. 그리고 성례전을 통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기억한다. 세상과 모든 사람, 창조세계 전체를 기억하고 그것들을 사랑안에서 하나님께로 가져간다. 그렇기에 성만찬은 세상의 생명인 사랑의 회복이다. 

신적사랑 p.51

떡과 포도주를 제단위에 놓고 천으로 덮어놓아져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돌려놓으신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고백드릴 수 있도록 먼저 서로 사랑합시다” + 평화의 입맞춤을 한다. 이는 사랑의 표현이다. 이 사랑은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부으신 신적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이다. 사랑이 없으면 교회는 존재할수 없다. 그리스도는 이 사랑을 주셨다. 

1. 떡과 포도주가 제단 위에 놓여있는데 천으로 감추어져 있다.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신 그 생명 전체가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채 놓여있는 것이다. 

2. “우리 모두 한마음이 되어.. .고백드릴 수 있도록 먼저 서로 사랑합시다”. + 평화의 입맞춤(the kiss of peace)
  - 이것은 기독교 예전의 근본적인 행위들 중 하나다. 
  - 교회가 참으로 교회이고자 한다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부으신 신적 사랑의  계시가 되어야 한다. 이 사랑이 없다면 교회안에서 그 어떤 것도 유효하지 않다. 

3. 그리스도의 성만찬의 내용은 다름 아닌 그 신적 사랑이다. 
  - 이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사랑이다. 
  - 우리가 이 사랑을 잃어버렸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사랑을 주셨고, 이 선물은 바로 교회다. 

4. 교회는 사랑을 통해, 사랑 위에서 비로소 교회가 되며, 이 세상에서 교회는 신적 사랑에 대해 “증언”하며, 그 사랑을 표현하고, 그 사랑을 지금 여기에 현존시킨다. 그 사랑이 창조하고 변모시킨다. 

마음을 드높임 p.52

집례자 “우리 마음을 드높입시다”라고 함 - 우리 자신을 봉헌물과 함께 드높이는 것, 천국으로 올라가는 승천을 의미한다. 이 높임/승천으로 인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새 생명의 음식이 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회중은 “주님께 우리 마음을 드높입니다"라고 응답하고, 집례자는 “주님게 감사드립시다"라고 감사를 제안한다. 

1. 성만찬은 ‘아나포라’, 우리의 봉헌물과 우리 자신을 “드높이는” 것이다. 
  - 이는 교회가 천국으로 올라가는 승천이다. 
  -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에만 집중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일이 왜, 언제 일어나는지만 보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생각하는 이유는 먼저 우리에게 무언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 떡과 포도주가 의미있게 되는 이유는
     [1] 교회가 그리스도를 따라 승천했기 때문에
     [2]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분 나라의 식탁에 받아주셨기 때문에
     [3] 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종말(Eschaton)에 들어갔기 때문에, 

감사와 처음기원 p.53

이제 회중은 “감사드림이 합당하고 옳은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만찬은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 감사는 완벽한 인간(회복된, 온전하게 된)이 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는 실제로는 그리스도가 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한다. 이렇게 감사를 합당하고 옳은 일로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전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신앙이란 부족해서 갖는 것이 아니라 충만과 사랑과 기쁨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풍성한 삶을 살고 받는 것(충만과 사랑과 기쁨)이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다. 성만찬 기도(the great Eucharistic prayer)의 시작, 시작의 기도, 서문을 낭독한다. 여기에는 감사와 찬양이 담겨있다. (그 이유와 근거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감사와 찬양으로서의 성만찬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과 회복하셨을 때 주신 새로운 생명의 형식이며 내용이다. 

1. 성만찬에서 감사의 표현은 완벽한 인간(회복된, 온전하게 된) 상태다.  
  - 성만찬은 낙원의 삶이다.
  - 성만찬은 하나님의 창조, 구속, 천국 주심에 대해 인간이 할수 있는 유일하고 충만하고 참된 응답이다. 
  - 성만찬에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완벽한 인간은 그리스도다. 그 분안에서 우리가 참여한다. 

2. “감사드림이 합당하고 옳은 일입니다” 회중. 
  - 감사드리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자기 양도”를 통해 비로소 참된 종교가 시작된다. 
  - 신앙은 지적추구의 산물이나 삶의 좌절과 불안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이 아니다. 또한 신앙은 무언가의 부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 신앙은 궁극적으로 충만과 사랑과 기쁨에서 나오는 것이다. (합당하고 옳은 일입니다..의 의미)

3. 풍성한 삶을 살고 받는 것이 하나님의 초대에 대해 할수 있는 유일한 응답이다. 
  / 이제는 충만하고 사랑과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1장에서 말한 새생명, 새로 주어진 삶이 이것이다.

4. 사제는 성만찬 기도(the great Eucharistic prayer)를 한다. - 서문(처음기원) :감사(찬양)

  “ 우리가 주님을 노래하고, 복되다 이르며,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찬미함은 합당하고 옳은 일입니다. 주님은 ..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분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은.. 주님은.. 하셨습니다. ... / 이 모든 일로 인해 우리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

  - 이 부분은 성만찬 신학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 성만찬을 다루는 신학이 성만찬적이기를 그치고, 성례에 대한 이해 전체로부터 성만찬적 정신을 앗아가 버린 꼴이 되었다. 
  - 제정의 말씀(기념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과 성령 임재기원(떡과 포도주에 성령이 임재한다)에 대한 논쟁만 봐도 성례신학의 비성만찬적인 단계가 드러난다.   
  - 성만찬 전체가 진행되는데 있어서 이 처음기원-감사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5. 그리스도의 성만찬, 성만찬의 그리스도는 우리가 승천하여 하나님 나라 식탁에 참여하는 “돌입” 사건이다. 
  - 왜냐하면, 성만찬(감사와 찬양)은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켰을때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의 형식이자 내용자체이기 때문이다. / 성만찬에서 표현되는 감사와 찬양은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풍성한 삶)의 형식이자 내용이다. 

6. 처음기원은 장차 올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서문,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다. 
  -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장차 올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다고 고백하고 선포한다. 

삼성창 p.56

이제 다음으로는 거룩을 세 번 부르는 삼성창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그리고 그리스도에 주목한다)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감사, 성만찬, 찬미)을 통해 비로소 창조세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거룩의 찬양(삼성창)이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이고 마침이며 목적지이며 완성이다. 거룩의 찬양이 창조의 시작이며 원리이다. 

기억의 기도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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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 p.60

1. 여기까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늘로 오르는 것, 장차 올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승천의 성만찬이다. 

2.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유월절 식탁에 도달했다. 
  -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것, 곧 우리의 음식, 우리의 삶, 우리 자신, 세상 전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서 봉헌했다. 

3. 그런데 이제 이 모든 것이 다시 새로운 생명의 선물로 –필히 음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4. 이는 내몸이다. 이는 내 피다. 받으라, 먹으라, 마시라
  - 수 많은 학자들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논하면서,. 실체인지, 우유성인지를 논했지만, 그런 시각 자체가 성례를 시간, 실체, 원인 같은 이세상 범주들로 축소 시키는 것이다. 

/ c.f 성찬에 대한 의견들
쯔빙글리 – 기념하는 것이다. 가톨릭 – 실제 몸이다. 칼빈 – 영적 임재다. / 성령이 임해서 십자가를 생각하게 하는 은혜의 방편이다.

5. 중요한 점은 성만찬 예전은 그 전체 예전이 성례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그 예전 전체가 하나의 변모시키는 행위, 하나의 승천 움직임이었다. / 이런 승천의 목적은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데리고 나와 장차 올 세상의 참여자들로 만드는 것이다. 
  - 지금 이 세상- 그리스도를 정죄했고 그렇게 해서 자기를 정죄한-에서는 어떤 떡, 포도주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수 없다. 

6. 그러나, 교회의 예전은 ‘아나포라’, 드높이는 행위, 하늘로 오르는 행위다. 교회가 교회됨을 이루는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 그 천국이란, [1]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시작한 것, [2] 오순절에 교회의 생명으로서 교회에 주어진 것, [3] 교회가 향해 가고 있는 목적지로서의 새로운 시대, 
  - 여기에 가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7. 그러나 이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과 다른 “별개의” 세상이 아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전해진, 그러나 우리 안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한 동일한 세상이다. 
  - 그리스도가 자신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엡1:23)” 곳은 지금과 동일한, 그러나 구속되고 회복된 세상이다. 

8.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음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과의 교통, 그분 안에서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우리에게 음식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신이다. 
  -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새로운 생명의 새 음식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자신이다. 
  - 처음부터 우리의 모든 배고픔은 그분을 향한 배고픔이엇고, 우리의 모든 떡은 다만 그분을 가리키는 상징이며, 그분 자신이 그 상징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9. 그분(그리스도)은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서 사셨다. 먹고 마시면서 이 세상의 음식이 그 분의 몸이 되고 그 분의 생명이 되었다. 완전히 성만찬적인 삶을 사셨다.
  - 그 삶은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변모되고, 하늘로 올려졌다. / 하나님의 생명으로 받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았고, 새 세상/ 하늘로 올라갔다(승천)
  - 이제 그분은 이 영화롭게 된 삶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신다. “내가 홀로 행한 일을, 이제 나는 네게 준다. 받으라. 먹으라...”

10. 이제 그분의 손에서 이 떡을 받는 지금, 우리는 그분이 모든 삶을 들어 올리셨고, 삶을 그분 자신으로 충만케 하셨고, 삶을 본연의 삶으로, 즉 하나님과의 교통, 그분의 현존과 사랑의 성례로 만드셨음을 깨닫는다. //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하나님과의 교통,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의 예배로 사는 것이.. 지난 시간 답. 
  - 이 세상에서는 “초자연적인” 것이 거기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연적인” 것으로 계시된다. 
  - 교회가 예전안에서 교회됨을 이루는 것은, 우리를 “거기로”(하나님 나라) 인도하고 우리를 참된 우리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성령 p.63

1. 떡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로 현시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2. 정교회는 성만찬 성물의 변모(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가되는 것)가 제정의 말씀이 아니라, 에피클레시스-성령임재를 기우너하는 기도-를 통해 성취된다고 주장해왔다. 
  - 이 교리를 정교회 내에서도 오해하고 있기도 하다. 
  - 이 교리의 취지는 어떤 “원인” 대신 다른 원인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 성레의 종말론적 성격을 계시해주는 것이다. 

3. 성령은 오순절의 “끝날 곧 큰 날”에 임한다. 
  - 성령은 하나님 나라를 시작시킨다. 
  -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천국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평강과 희락이다/롬14:17)

4. 성만찬에서 우리의 천국 승천을 인치고 확증하시는 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모시키고, 그래서 우리가 봉헌한 성물을 성령안에서 교통으로 현시하는 분이 성령이시다. 이것이 바로 축성이다. (거룩하게 하는 것..)

중보기도 p.64

1. 우리가 성찬을 먹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것은 중보기도다. 
  -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처럼 된다는거이고, 그분의 삶의 움직임을 우리것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 따라서 그리스도처럼 중보의 삶을 살아야 한다. 

 2.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집단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영원의 신비로운 황활경을 맛보려는 이들을 위한 단체가 아니다. 

3. 성반 위의 떡과 성작안의 포도주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죽음을 상기시켜 준다. 

4.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승천해서 누리는)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기억하고 기도하도록 만든다. 
  - 성령과의 교통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든다. 

5. 성만찬은 일치의 성례이며, 진리의 순간이다. 
  - 세상을 특정하고 제한적이며 부분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아네서 실제 모습 그대로 보게 된다. (외면하거나 오해하지 않는다)

6. 중보는 여기서 시작되며, 바로 여기에 교회 선교의 참된 시작이 있다. 
  - 우리가 모든 세상 근심을 버리고 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 그때가 실은 이 세상의 참 실재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 나와 있을 때 다시 들어가서 도울수 있다. c.f 육아, 일

7. 성만찬 기도의 마지막은 주님의 기도에서 종합되는데, 그 간구들은 모두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온전히 헌신할 것을 내포하고 있다. 

8. 이 성찬 참여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은 다만 선물로서 값없이 주어지는 신적 선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 이것이 바로 정교회에서 성만찬 성물(떡과 포도주)을 거룩한 선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9. 가장 큰 겸손과 순종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 기쁨과 감사와 더불어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물을 먹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원하셨던 성만찬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떠남 p.66

1. “평화 가운데 떠납시다”(집례자)
  - 예전의 마지막 명령이다.
  - 이제 세상 속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 이제 빛의 증인, 성령의 증인으로 나가야 하고, 교회는 선교를 시작해야 한다. 

2. 성만찬은 여정의 마침, 시간의 마침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시작이 왔고 전에 불가능했던 것들(기쁨과 만족)이 다시 우리에게 가능한 것으로 계시되었다. 
  - 세상의 시간은 이제 교회의 시간, 구원과 구속의 시간이 된다. 

3.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가 승천의 예전에서 시작하는 이유다. 
  - 그래야만 선교의 예전이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