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1장 요약
(p.13-30)
1장. 세상의 생명
가. 생명의 본질 - 생명이란 무엇인가?
(*키워드,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 생명, 기쁨)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 이 말은 유물론 철학자 포이어바흐가 인간의 자연적인측면(물질적인 존재)을 강조한 말입니다. 저자 슈데만은 이 말을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주요한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1] 인간은 먹어야 하는 존재다.
하나님이 먹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이세상을 먹으라고 주셨다(창1:29 내가 온 지면의 .. 모든 채소와..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먹되 그냥 먹는게 아니라 잔치로 먹는 풍성한 삶, 생명으로 살게 하셨다. 성경을 보면, 창조와 종말 모두 이 잔치 이미지로 그려진다.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눅 22:30).
[2] 문제제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죽으셨다고 할때, 그 생명이란 무엇인가?
- 두가지 답변이 제시됨, (1) 종교적인 삶, (2) 세속적인 삶.
(1)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종교적인 삶이라고 이해한다.
/ 이런 삶은 흔히 영성 세계로 일컬어진다. 그래서 선교(사역)의 목적은 "삶의 소란스러움과 고통스러움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서 영혼의 안전함을 느끼고 평화를 누리는 삶, 속세의 삶을 견디고 고난을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건강하고 헌신된 삶, 깊은 종교심을 통해 "미소를 잃지 않고" 살수 있도록 "영적인" 삶 속으로 회심시키는 것"이다.
-> 이런 이들은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적인 삶을 강조하게 되고, 자연스레 먹고 마시는 삶(세속적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긴다. 그들에게 이 세상, 일상은 유혹이나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혹은 그가운데 견디기 위해) 경건과 인내로 살아내야 한다.
(2) 다른 부류는 예수님이 세상에 주신 생명을 세상의 생명을 개선시킨다는 말로 이해한다.
/ 이들은 (1)에서 말한 영성주의자들과 반대쪽에 있는 행동주의자들로 세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기독교가 세상을 잃어버렸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인간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며 '찬양이나 예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인종차별 문제 같은 진짜 문제들을 충분히 다루지 않은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고 한다.
*용어설명(p.16)
사회복음(Social Gospel): 흔히 개인구원(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개인을 구원)보다 사회 구원(사회악과 부조리 척결을 통해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자)을 강조한다. 신학. 인권, 노동복지, 부의 평등, 교육, 사회봉사, 정치개혁을 추구하는 진보적 입장, 교회의 사회참여에 중점을 준다. - 책에서 말하는 "사회복음의 단순한 낙관주의나 도취"라는 표현은 이런 사회운동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실존적 불안- 실존주의는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독일에서 일어난 철학으로 데카르트 이래로 주체(인식하는 나, 이성을 가진 나)와 객체(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도식으로 이해하는 흐름안에서 실존(주체)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존적 불안은 그 실존주의가 말하는 불안으로, 이 세상을 인식하는 자신에 대한 근거없음, 자신의 세계가 없어질 것,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에 대한 불안을 의미한다.
신정통주의(neo-Orthodoxy) 신학 - 과학적 사고의 증대 속에서 성경의 역사성을 의심하고 성경비평(성경이 편집되었다)을 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확대될때, 바르트, 틸리히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신학이다. 성경비평과 과학적 탐구를 허용하면서도 그 위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초월성을 강조하여 성경과 신앙을 강조함. - 합동, 고신 장로교단에서는 자유주의와 같은 부류로 여김. / 이 책에서 "역사에 대해 비관적이고 현실주의적 관점을 말하는 신정통주의"라는 말은 현실의 물질적 세계(과학탐구로 인식하고 논의할수 있는)를 인정하되 그것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배제한다는 의미에서(비관적이라고) 하는 말이다. - 저자는 이런 신학이 기독교를 다시 조명받게 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현실세계에서 배제하게 되었다고 본다.
-> 저자는 이런 두가지 입장 모두, 정작 '그리스도를 위해 되찾아야 하고, 기독교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삶'이 무엇인지, 그렇게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되찾고(사회개혁완수) 기독교적으로 만들어(영성생활)사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 그 답변은 살기 위해서, 충만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다. 하려는 일을 하고 나면 완벽한 기쁨이 찾아와야 한다. (영적이든 사회개혁이든 우리의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무엇에 대한 기쁨이란 말인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영성화(사람들을 영적인 향연으로 초대)하든 혹은 우리 종교를 세속화(우리가 세속적인 향연에 참여하던) 하든, 세상의 참 생명,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주심으로써 세상에 주셨다는 그 생명의 본질은 여전히 우리 종교가 포착하지 못하는 곳에 있다. - 이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 내 자신에 대한 기쁨이지 않을까 싶다.
* 더 깊이 생각해보기.
인간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존재다. 즉, 인간은 세상을 자신의 몸 속에 받아들여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살과 피로 변모시켜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정말로 그가 먹는 그것이다. (p.14)
/ 먹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하며, 세상을 몸 속에 받아들여 자기 자신으로 변모시켜야 한다고 하며 인간은 그가 먹는 그것이라고 정의한 점이 곱씹을수록 풍성해진다. 인간을 무너뜨리는 중독이나 거룩하게 하는 성화도 그 사람의 하루 하루, 그 안에 포함된 한번의 선택들이 모아져서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 나는 오늘 무엇을 먹는가? 무엇을 먹기 원하는가?(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는가? 나는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가?!) 숙고하게 된다.
나. 인간의 본질 - 인간은 대체 무엇을 왜 먹는가?
(*키워드,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 이름/송축, 제사장, 성만찬(하나님께 받아서 하나님께 바친다), 의식으로서의 식사)
[1] 이분법으로 보는 사람들
: 초월은 없다 vs 초월은 있다. 초월을 논하기에 먹는것의 의미는 육체적(물질적,자연적) 먹는 행위 그것 뿐이다.
이 질문은 유물론자인 포이어바흐(초월을 부정하는 비기독교인)나 그와 맞서는 종교적인 사람들(상부구조, 초월을 강조하는 기독교인)에게는 부적절한 질문이다. 이들에게 먹는것은 물질적인 작용일뿐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심은 "상부구조"가 있는가하는 것 뿐이다.(영적인 것 vs 물질적인 것, 성스러운 것 vs 속된 것, 초자연적인 것 vs 자연적인 것 - 이런 도식의 진위만 따짐)
[2] 성경의 관점
: 이 세상은 우리를 위한 음식, 우리를 위한 생명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이런 이분법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경의 관점에서 인간이 먹는 음식, 인간이 취하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과의 교통(communion, 친교, 성찬)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물질적이든 영적이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그 모두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그래서 인간의 삶을 하나님과 교통이 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 이런 설명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 세상을 긍정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인간의 타락에서 조명하는 바로는 좀 부족함을 느낄수도 있다)
[3] 인간의 본질
(1) 인간은 먹어야 사는 존재다. 그런데 인간이 먹어야 할 궁극적인 대상은 하나님이다. 우리 삶의 모든 배고픔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이다.
(2)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점은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음식과 생명에 대해 하나님을 송축(bless 축복, 찬양)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 다른 피조물들도 배고픔을 느끼고 무엇인가를 먹으며 살지만, 인간처럼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못한다).
/ 찬양의 방법 - 이름 지어 부름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히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해주는 수단 훨씬 이상의 것이다. 어떤 것에게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에게 주신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그것의 존재의 위치와 기능을 안다는 의미다.
다시말해, 어떤 것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은, 그것에 대해(about it/ 그것을 만든 하나님을 찬양) 또 그것을 가지고(with it)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복되고 성화된(sanctified, 거룩한) 세상을 받은 인간이 할수 있는 유일한 자연적인(초자연적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우리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삶에서 할수 있는) 반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곧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세상을 보고, 감사와 찬미의 행위를 통해 세상을 알고, 이름 짓고,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고 감사하며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
->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해주는 이성적, 영적 특성은 하나님을 송축할수 있는 능력(= 자신의 삶을 이루는 목마름과 배고픔의 의미를 알수 있는 능력)에 초점이 있고 궁극적 완성이 있다. - 그래서 인간을 호모 아도란스(찬미하는 존재)이며, 인간을 '제사장'으로 이해한다.
(3) 인간은 제사장으로서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를 통해 세상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존재다.
/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받아서, 다시 그것을 하나님에게 바친다. c.f 성만찬 행위
/ 인간은 제사장으로서 성만찬 행위로 자신의 삶, 세상으로부터 받은 삶을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으로 변모시킨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
/ 세상은 성만찬 재료이고, 인간은 이 우주적 성례의 제사장이다.
[4] 하나님과 교통하는 먹는 행위에 대한 본능적 태도
: 식사는 여전히 하나의 의식.
수세기에 걸친 세속화 과정도 인간의 먹는 행위를 아직 완전히 실용적인 그 무엇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식사에 정중히 임한다. 하나의 의식으로서 먹고 마시는 것 이상의 삶을 경축하는 "자연적 성례"로 남아있다. 우리에게 식사는 단순히 몸의 기능을 유지시켜 주는 행위를 훨씬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못하면서도 경축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느끼는 성례적 삶을 향한 목마름과 배고픔이다.
다. 인간의 타락 - 생명을 잃어버림
(*키워드, 세상 그 자체와만 교통, 하나님 경시, 닫힌 원, 세상의 종, 생명을 잃어버림)
[1] 금지된 과일
: 그 자체와만 교통하는 일
성경의 인간 타락 이야기(선악과 먹은 이야기)에도 그 중심에 음식이 등장한다. 인간은 금지된 과일을 먹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복 주시지 않은 과일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먹는 행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니라, 그 자체와만 교통하는 일이 될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인간이 세상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 삶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 버린 것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인간은 세상을 사랑하되, 그것이 하나님을 투명하게 비춰 주는 것으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사랑해왔다.
// 예배 자체, 성경 자체, 기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율법주의, 성공이나 건강, 세상에서의 안정이 목적이 되는 세속주의 모두 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니라 그 자체와만 교통하는 것이 될수도 있다.
[2] 원죄
: 하나님을 경시 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워짐
그것이 만연한 태도가 되어 버렸고, 이제는 인간이 세상을 하나님의 현존으로 충만한 것이 아닌 불투명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이게 되었다. 세상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성만찬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시가 쌓이고 쌓인 것이 바로 이 세상을 망쳐 놓고 있는 원죄다. 이런 도식 안에 있는 종교는 이 세상을 치유하거나 구속(회복, 구원)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종교는 하나님을 "속된" 세상과 반대되는, 소위 "성스러운"(영적인,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축소시켜버리는 태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속주의의 결과이다.
[3] 한계
: 마시고 먹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선물들로 받아들이지 못함.
타락한 세상 속에서 현재 인간은 그렇게 할수 있는 제사장적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세상에 대한 그의 의존성은 하나의 닫힌 원이 되어버렸고, 그의 사랑은 참된 방향에서 빗나가 있다. 인간은 여전히 사랑하지만 여전히 배고프다. 그는 자신 너머에 무언가에 의존하는 존재임을 알지만 그의 사랑과 의존은 세상 그 자체만을 향한다. 그는 세상의 공기나 음식등은 그 자체로는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 곧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선물들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에야 비로서 생명을 가져다 줄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다만 생명의 외양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이다.
[4] 결과
:인간은 세상의 제사장이기를 그쳤고 이제 세상의 종이 되었다
세상 자체를 목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그 자체가 가치가 되고, 그래서 결국 모든 가치를 잃고만다.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현존의 '성례'일때 비로소 그 의미가 충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다만 그 자체로 대하면 결국 그것은 스스로 파괴되고 만다.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끊어져 있을 때 자연세계는 다만 죽어가는 세계일 뿐이다. 음식자체를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먹는 행위는 죽어가는 세상과의 교통일뿐이며, 결국 죽음과의 교통이다.
/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먹지 않는 것은 결국 죽은 것들(죽음)을 먹는 것이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말한것처럼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땅(흙)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 인간은 생명의 생명(참 생명, 생명의 정수, life of life), 인간의 삶을 신적인 삶으로 변모시켜주는 능력을 잃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잃어버렸다)
/ 실낙원(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사건)은 서늘한 시간, 곧 밤에 일어났다(창3:8 날이 저물어 바람이 서늘할때... 새번역) 삶이 성만찬이어야 했던 에덴동산을 떠났을때 아담은 온 세상을 어둠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바로 지금 인간의 모습이 그러하다.
라. 예수 그리스도 -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 분
(*키워드: 타락의 참 본질, 모든 종교의 마침,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 분, 생명)
[1] 이 책이 음식 이야기를 꺼낸 이유
: 성례적, 성만찬적 같은 용어들의 잘못된 의미들(종교적으로만 제한하는)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분법적 구조(자연적인 vs 초자연적, 성스러운 vs 속된)안에 갖힌 종교와 삶을 대립시키는 구조안에서 성례, 성만찬이란 용어들을 이해한다. 그런 관점에서는 궁극적으로 삶은 구속 될수 없으며, 종교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2] 원죄의 요지
: 하나님을 배고파하기를 그침, 세상을 하나님과의 교통의 성례로 보지 않음
이 책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배고파하기를(그분만을 배고파하기를) 그쳤다는 것, 인간이 자신의 삶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세상 전체를 하나님과의 교통의 성례로 보기를 그만둔 것이다. 인간 타락의 참 본질은 현재 인간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해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균형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물질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 타락은 비성만찬적인 세상에서 비성만찬적인 삶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는 것이다. 본래 이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과 세상을 두고 선택하느냐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
[3] 기독교 복음
: 하나님은 인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어둠속에서 낙원을 찾고 있는 인간에게 빛(예수 그리스도)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이 행동은 잃어버린 인간을 되찾는 구조행위만이 아니라, 태초부터 착수하셨던 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시며, 자신에게 있는 갈망의 참 대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려는 일이었다. -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서의 삶을 살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진리 자체이시며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많은 부분적인 진리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성육신을 인간에게 미리 맛보게 하셨음을 믿는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구도자 안에 현존하신다고 믿는다. - 이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를 만인구원설, 종교다원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4] 모든 종교의 마침
: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의 마침(end)이다. 사마리아 여인이야기(요4:17-23)를 통해서 예수님은 종교제의에 대한 관심을 예배 자체로 바꾸셨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기독교가 하나의 제의나 종교로서 제시된 적은 없다.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어 뜨리셨다. 그분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 분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성스러운 장소나 성전이나 제의 등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그분 안에서 모인 새로운 백성들 자체가 유일한 진짜 성전이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5] 교회
: 교회 자체가 천상의 새 예루살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다.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에 오시고 현존하신다는 사실이, 그분이 전에 계셨던 장소들보다 훨씬 더 중요시되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과거에 존재했던 분으로 기억하기보다, 현재 자신들과 함께 계신 분으로 경험했다.
[6] 생명
:종교 안에서는 다만 상징이 되고 간청되던 것,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되찾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종교는 완성에 도달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모든 종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모든 갈망들에 대한 참 해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인간은 잃었던 생명(종교 안에서는 다만 상징되고 지시되고 간청되던 생명) 을 다시 되찾았기 때문이다.
// 저자(슈데만)가 말하는 잃었던 생명은 힘이 실려있는 표현이다. 종교 안에서 다만 상징되고 지시되고 간청된다는 말은 아직 그 생명이 오지 않았다, 그 생명이 없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미 그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되찾았다고 단언한다. 신학적으로 어느 한쪽만 강조하는 것의 부작용이 있겠지만, "이미 다시 주신 생명"을 실제로 살아가자는 제안을 넘어, 그렇게 살수 있다는 말이 주는 기대가 있다.
마. 이 책의 목적
(키워드: 성례, 신비주의, 선교, 종교의 마침, 성례주의)
이 책은 그리스도의 모든 측면 모든 의미들을 빠짐없이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이, 온전한 삶이 인간에게 회복되었다는 것, 그래서 이제 다시 삶이 우리에게 성례와 교통으로서 주어졌고, 성만찬이 되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1] 성례와 선교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성례를 말씀과 대조되는 것으로 여기고, 선교를 성례가 아니라 말씀과만 연결짓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성례를 교회안의 제도나 행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 자체를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을 나타내는 성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용어설명(p.16)
성례: 거룩한 예식이라는 뜻으로, 개신교는 2가지(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봅니다. 카톨릭과 정교회는 7가지를 성례(성사)로 인정합니다.(#1 영세/세례, #2 견진성사/안수, #3 미사, #4 고해성사, #5 종부성사/병자나 죽을 위험에 있는 사람이 받는 성사 , #6 결혼, #7 서품/신부 되는 것/목사안수개념)
[2] 성례에 대한 다른 접근법
그것은 바로 성례를 선교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 저자는 성례를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여기고 제안한다.
[3] 동방교회를 보는 서구적 관점
- 정교회는 "신비주의"나 "영성"이 전문인 교회로 여긴다.
- 정교회는 예전적, 성례적 교회이며, 따라서 정교회는 선교에 무관심하다.(정교회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 이는 모두 틀린 이야기다. 성례주의(sacramentalism)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4] 성례주의의 참된 의미
성례주의가 무엇인지를 이 책을 통해 밝히고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정교회의 성례주의의 근본적 의미는 단조로운 "활동"의 세계로부터 어떤 무시간적 "영성"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 p.14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속사회에서 종교적 삶을 추구하며 초월로 들어가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니다.
[5] 문제제기: 종교의 마침, 그 너머의 성례
아름다운 예배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이콘들, 예전 행렬들, 예전서들이 앞서 말한 "종교의 마침"이라고 했던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상치되지 않는다면, 그 모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실제 세상,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셔서 살리신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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