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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세상에생명을주는예배

[오전독서모임]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3. 선교의 시간)

by 샬롬보금자리 2021. 3. 15.

2021년 3월 13일(토) 오전 10시-11시30분

기존에 목요일 오전에서 토요일 오전으로 모임 시간을 변경해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유유님은 몸이 아파서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주말이 좀 더 여유로울줄 알았는데, 오히려 분주함 속에서 모임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책 전반이 그렇지만, 축일과 교회력, 성무일과 같은 정교회 예전과 용어가 낯설어서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개신교 장로교 배경을 가진 분들과 정교회 사제가 쓴 책을 읽는 것이 버겁지만, 그래도 그 낯설음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기도 하고,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도 되는 것 같습니다.

*요약

  먼저, 이 책은 같은 사상이 반복됩니다. 1장에서 말하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대한 긍정"과 "인간이 절망으로 마주하게 되는 이 세상에서의 배고픔",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인한 참된 기쁨"이 바탕이 됩니다.(기독교 세계관에서 말하는 '창조-타락-구속'이 기본이 됩니다) 그리고 제사장적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다시 하나님께 받는 삶을 살라고 제시됩니다. 

  2장에서는 성례(성만찬)을 통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예배(승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제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이 세상의 음식이 아니라, 승천해서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의미로 예수님의 생명으로서의 피와 살인 떡과 포도주를 먹고 이 세상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3장에서는 그 예배 이후, 일상이라고 할수 있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하고 쉬는 것만을 반복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시간을 인식하도록 안내합니다. 좀 낯설지만 정교회 예전안  축일(주일)과 교회력(부활절과 오순절), 성무일과(저녁, 아침기도)를 설명하면서 창조-타락-구속을 의식하며 시간을 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3. 선교의 시간

1. 시간경험  

  저자는 시간을 우리의 삶을 담고 있는 아이콘(상징)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지만, 시간을 크게 2가지로 볼수 있습니다. [1] 성장의 과정으로 긍정할 수도 있고 [2] 소멸의 과정으로 죽음의 한계를 마주해야 하는 것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장에서 설명하는 시간은 그런 성장이나 소멸로 이해하는 개인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성취로서의 시간-영원, 참된 삶의 절정입니다) 이 시간에 대해서 종교나 철학이 설명을 시도하는데, 이 책은 삶의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보다는 선물로서의 시간 경험을 묘사함으로 문제나 해답의 차원을 넘어서는 삶을 소개합니다. 

2. 시간의 문제 

  저자는 선물로서의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축일, 절기, 기도주기 같은 예전을 소개합니다. 저자가 보기에 이 예전들이 가지고 있던 기독교적 상징들은 허물어졌습니다. 이 예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종교를 시간과 무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구원은 시간을 벗어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 시간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것 같은 점을 지적합니다.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나고, 이는 이 세상의 시간과 상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현대 세계의 시간을 살펴보면, 시간을 절약하는 장치가 발명 될수록 오히려 시간이 없어지는 것 같이 살아갑니다. 그저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는 '분주함'과 일을 멈추는 '휴식'이 교차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휴식에 대한 낯설음을 가지고 있습니다(쉴줄 모름/ 안식 상실). 여기에 기독교가 자연적 시간(하나님 창조한 시간)과 영원(구원 받은 자가 누리는 영생)을 그저 영원한 안식으로 여기게 한 것도 책임이 있습니다.(나중에 다시 나오지만, 구원 받은 뒤에 누리는 것은 안식만이 아니라, 참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에서 보는 시간은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취의 과정입니다. 시간을 단순한 긍정이나 부정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게, 시간의 충만(종말, 완성)을 향해 가는 이미와 아직의 역설적 관계로 볼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묻습니다. 부활절(예수님), 오순절(성령님)은 날짜와 시간표만 있는 경축 의식을 하는 날인가? 저자는 그 대답으로 이런 절기들은 시간을 구속시키며 시간의 충만을 인식하고 진정한 의미를 줄 수 있는 날로 설명합니다. 

3. 축일

  축일은 본래, 절기(feast)를 의미하는데, 이 장에서는 예배 드리는 주일을 의미합니다. 주일의 본래 의미는 성경의 시간 이해로서 안식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참여, 긍정하는 것 – 창조된 세상을 기쁨으로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휴식(일을 안함)과는 다른, 안식의 즐거움(열매이자 절정으로서의 신적 평화의 신성함과 충만함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을 누리는 것이며, 우주적 종말론적 의미의 쉼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안식일과 주일을 구분합니다. 본래 안식일이 가진 성경적 의미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와 반역의 세상에서 하나님 떠나 유랑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고 봅니다. 

  기독교의 주일(일요일)은 기존의 안식일(천지창조에서 마지막 7일째, 한주는 일요일부터 시작해서 토요일로 끝남, 그래서 유대교 안식일은 토요일)과 다릅니다. 주일은 새로운 주의 날 – 구원과 구속의 날,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날,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 시작되는 날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보면 여덟째 날, 첫째 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즉, 오늘날 주일(일요일)은 일곱번째 날(안식일)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날로, 성만찬 성례를 행하는 날, 교회가 새생명으로 자신을 성취한 날로 여깁니다.  

구약> 할례(난지 8일만에), 제사장 위임식, 성전 봉헌식, 절기를 치른후의 제8일째 제사를 드림, 부정에 의한 7일간의 구별 뒤에 제8일에 정결례를 행함,
신약> 안식 후 첫날(요20:19), 여드레를 지나서(요20:26) 예수님 만남

  그런데, 기독교 초기문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정해진 날”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오늘 날 의 주일(일요일)을 의미하는데, 그 당시에는 휴일이 아니었습니다. (c.f 중동은 아직도 금요일-토요일이 휴일이고, 이스라엘의 유대교, 이집트의 콥틱기독교는 금요일 저녁에 예배를 드린다고 함) 따라서 초기 기독교의 주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한주의 시작인 첫날이었고 이날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따라서 주일은 거룩한 날을 속된 날과 구분하는 것이나, 과거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시간을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참고. 1장 세상의 생명 – 음식으로서의 세상을 먹고 마심, 2장 성만찬 – 하나님 나라로 가서 “장차 올 세상”의 식탁에 참여, 승천을 통해 주님의 날(세상의 마침과 장차 올 세상의 시작)영광과 변모시키는 힘이 온전히 계시) 이 날을 통해 모든 날과 모든 시간은 승천의 기억과 장차 올 승천을 기대하는 시간으로 변모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더 이상 주일(월~일, 7일)은 속된 날과 그 끝에 휴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볼산(예수님 변화산)에서 내려와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삶, 이 세상에서 자차 올 세상을 향해 가는 움직임 (not 성장 or 죽음의 과정, but 그 이상의 완성을 향해 감)입니다. 주일은 다른 날과 구별해서 지키는 신성한 날(신비의 황홀이 끼어드는 날, 무의미를 벗어나는 날)이 아닙니다. 주일은 일상적인 날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성만찬을 통해 여덟째 날이자 첫째 날로 계시하며  모든 날을 의미 있는 날(저물지 않는 날로 향해 가는 날)로 만듭니다. 그 날은 이 세상의 시간(성장 or 죽음)을 마침의 시간이자 시작의 시간(하나님 나라)으로 만듭니다.

4. 교회력

  교회력은 교회에서 정한 예전적 기념과 예식들을 행하는 축일들입니다. (부활절, 오순절, 성탄절, 어린이주일 등)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교회력은 특정 날짜에 과거의 특정 사건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 시간에 대한 의미를 갖지 못한채 교회 안에서도 정규 활동(예배) 사이의 잠깐의 휴식시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분주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성탄절 같은 절기는 쉼과 휴가를 위해 덧붙여진 시간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감히 교회의 삶과 선교의 핵심이라 생각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본래 축일은 기쁨을 뜻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쓴맛을 아는 성인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현실은 고통이니까요. 이런 이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을 기대합니다. 그렇기에 축일이나 예식에 몰두 하는 건 한가한 이들에게나 가능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기쁨 없는 현대문화(일 중심적 문화의 에토스(습관, 문화)) 속에 있는 것처럼 축일들을 진지하게 대하려고 하고 기쁨은 상징적으로 축소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현대세계는 기쁨을 “재미”와 “휴식”의 범주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래서 기쁨은 여가시간에만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축일과 기쁨은 실은 삶의 “진지한 문제들”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답일수 있다는 믿음(기대)을 포기했습니다. 이런 형국이다보니 교회력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종교 교육의 시청각 교재로 머무는 정도로 여겨질뿐,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의 뿌리나 목적지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축일의 참된 본질과 기능을 살펴보면, 기독교가 축일이나 예식이 생활양식에 유기적이고 필수적인 문화에서 시작되고 확산되었습니다. 추석이나 설날처럼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 일과 쉼의 리듬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축일은 잠깐의 휴식이 아니라, 일의 정당화이자 열매였습니다. 말하자면, 일의 기쁨으로서의 성례적 변모였고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전통에서 축일을 받아들일 때, 죽음과 부활을 거치도록 만들어서 기쁨 없는 세상에 참된 기쁨을 누리도록 했습니다. (2장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쁨의 성례의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이 이 세상에 전파된 이래, 순전한 “이교적 기쁨”을 되찾으려는 모든 시도들은 다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더이상 자연적 주기들-추수, 초승달-을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는 완전한 기쁨을 다가갈 수 없는 미래의 것- 모든 일의 목적이자 마침-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이제 인간의 모든 삶은 “노고”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는 기쁨의 계시이자 선물, 진정한 축일의 선물을 제공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선물, 이 기쁨이 변모시키는 힘(세상을 바꿀수 있는 유일한 힘)이 교회의 삶(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성령의 약속입니다.

5. 부활절과 오순절 

 십자가를 통한 기쁨은 교회에 주어졌고, 교회가 세상의 증인되고, 그 기쁨으로 세상을 변모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 기독교 축일들, 교회력입니다. 대표적으로 부활절(유월절, 무교절, 출애굽, 무교병)과 오순절(칠칠절, 초실절, 맥추절, 시내산 언약, 누룩 있는 빵)이 교회의 시간 성례(sacrament of time)의 재료입니다. 

  이 두 축일을 (유대교 전통에서) 받아들인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 때문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과 성령강림은 교회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이전부터 시간과 시간 속에서의 삶에 대한 기독교적 경험에 대한 선언이자 예기(기대,예측)였습니다. 본래 유월절과 오순절은 봄과 자연의 첫 열매에 대한 경축 예식으로 겨울 지나 봄이 되는 것, 새롭게 주어지는 생명에 대한 기쁨을 담은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이라는 역사 속에서 유월절(무교절, 무교병)과 시내산 언약(칠칠절, 초실절, 유교병)을 먹는 사건으로,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반복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에 있어서 부활절과 오순절은 부활과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기념이 아니라 시간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연의 세상, 역사의 세상, 기대의 세상의 세 차원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기쁨 추구, 궁극적인 의미와 완전, 성취를 추구합니다. 

의미의 변화 과정 -
자연의 신비 -> 이집트에서의 속박과 약속의 땅으로의 해방, 새 계명 ->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 

  이렇게 시간은 저 멀리 있는 어떤 축일, 기쁨을 지시해주지만, 시간 자체는 그 기쁨을 줄수 없습니다. 부활절의 의미는 설명이나 기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간에 참여함으로 기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정교회 부활절 철야 예배는 어둠 속에 빛을 밝히는 순서가 있습니다. (참고. CBS 뉴스 - 정교회 부활절 예배 /3분 정도) 부활절 부터 오순절까지 50일의 축일이 시간 성례가 됩니다. 부활절 예배때 경험하는 밤에 주어지는 기쁨(낮보다 더 밝은 밤)이 비밀한 기쁨, 궁극의 의미가 되어 기독교적인 한해가 되게 합니다. 오순절 저녁기도(만도) 시간에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제 다시 밤이 오기 때문입니다. (빛되신 예수님은 승천하셨기에) 이 밤이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저욕회는 오순절 이후로 다음 부활절까지 주마다 숫자를 매깁니다. 이렇게 시간 성례를 통해 "끝과 시작"으로 시간을 봅니다. 세상 속에서 교회의 삶은 금식, 희생, 자기 부인으로 죽어가지만, 비밀한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룰 만도조도는 “날(하루)”에 대한 것입니다. (축일은 "한 주", 교회력은 "한 해") 주일과 부활절 경험에서 표현되는 시간의 신학은 매일 실제 삶에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성무 일과가 중요해집니다. 성무일과란 교회와 각 그리스도인들이 하루 시간과 가졌던 일들(8번 기도, 2번 예배)을 의미합니다. 저자가 말하기를, 성무일과는 “쉬는 시간”으로서의 기도 시간이나 영적 회복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가졌던 시간 아니고, 구속 사역의 본질적 일부로서 교회가 전체 공동체를 대신하여, 또 전체 공동체를 위해 행했던 행위라고 합니다.

6. 만도(저녁기도)

   만도는 저녁에 감사를 덧붙이는 그날의 종교적 “에필로그” 기도가 아닙니다. 만도는 [1] 창조(시간의 시작)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찬미와 감사 가운데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는 자연스레 [2] 그 창조에 대해 집중할수록 타락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새날을 망친 나와 세상에 대한 구속 요청을 하는 기도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구속 /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경이로움으로 변모된 것을 깨닫습니다. 그 과정에서 죄와 어둠이 완전히 드러났고, 죄의 짐이 떠 맡겨집니다. 그리고 죽음은 궁극성을 빼앗깁니다. 이를 통해 현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실은 지나간 과거의 것인 이 세상 속에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에 참여할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4] 시므온의 노래로 마칩니다. 

  시므온은 평생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으로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기대해 온 그가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죽음은 재앙이 아니라 기다림의 성취입니다. 이렇게 만도는 이 세상의 저녁(종말)이 왔음을 알아보는 것, 이제 저녁(어둠의 세상)이 되지 않는 날이 왔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마침일 뿐 아니라 또한 시작이기도 한 저녁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 저녁은 새로운 삶, 저녁이 되지 않는 날의 시작이 될수 있습니다. 

7. 조도(아침기도)

*베네딕토 수도규칙에 따르면. 새벽2시에 첫 기도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처음 감각은 밤의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약하고 무력합니다. 여기서 어둠 속으로 들어오는 빛에 주목합니다. 타락에서 시작합니다. 무력함과 절망안에 있는 기대, 목마름, 배고픔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현장에 기쁨을 선포합니다. 자연적 삶을 거스르는 기쁨(억지로 감사, 기뻐하는 시도)이 아니라, 그 삶을 완성시키는 기쁨이 있음을, 그 기쁨 자체를 선포합니다. (c.f 새벽예배) 조도 때는 촛불로 빛을 밝히는데, 이 빛은 태양 빛을 예기하는 빛입니다. 이 태양은 메시야를 의식하게 합니다. 이렇게 매일 아침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과 더불어 고대하던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함 “이날은 여호와께서 지으신 날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118:24-26)

  만도가 세상을 “저녁(어둠, 종말)”으로 경험하는 기독교적 경험으로 관련 짓듯이, 조도는 교회를 “아침”, 시작으로 경험하는 기독교적 경험과 관련 짓습니다. 저녁과 아침이라는 시간에 새로운 의미를 주어 시간을 기독교적 시간으로 변모시킵니다. 인간은 늘 아침과 저녁 사이, 주일과 주일 사이, 부활절과 부활절 사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존재로 살아갑니다. 이런 삶에서 만도와 조도는 시간을 마침과 시작으로 경험하게 해줍니다. 

시간을 마침으로 경험하는 것(만도)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절대적 중요성을 부여해 주고, 최종적인 것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 
시간을 시작으로 경험하는 것(조도)은 우리의 모든 시간을 기쁨으로 충만케 해준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은 시간에 영원을 “공동작인”(함께 작동하는)으로 덧붙여 주기 때문이다. / 영원과 연결된 것(연관되어 변동하는 것, c.f 계수)으로 만들어줌. 

  열심히 출근하고 퇴근하는 사람들을 보며 전도서의 기자는 '결국 헛되다'라고 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거기에 하나님의 구속이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영원한 안식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주신 것은 영원한 삶이지 영원한 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영원한 삶을 시간- 그리고 그 모든 분주함-의 한복판에서 계시하셨습니다. 시간과 그 안에서의 우리의 일을 장차 올 세상의 성례, 성취와 승천의 예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눔

여덟째 날로서의 주일, 안식후 첫날 개념이 새로웠습니다. 현대인의 분주한 삶에서 일과 휴식의 반복처럼 살아가는데, 세상을 하나님이 주는 음식으로 생명을 공급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주일을 새로운 날로 살아가는 의미를 담아 살고 싶어졌습니다.

그동안 구원이 영원한 안식이라는 측면을 주목하며 살았는데, 영원한 생명(삶)이라는 점을 환기할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시간을 마침을 기준으로 경험함으로 살아온 삶에 대한 의미를 돌아보고, 시작을 기준으로 영원과 연관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새 날, 새 생명을 인식하게 하는 점이 인상 깊었고, 그렇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이 자연적 주기의 절기(겨울에서 봄이 오고, 첫 열매를 얻는)에서 구속의 역사(출애굽, 예수님)를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기념하는 또 하나의 일로서의 절기가 아니라 기쁨에 참여하고 그 비밀한 기쁨으로 한해를 살아가는 삶이라는게 새로웠습니다.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성탄절에 교회에서 바자회나 문화제, 축하예배를 통해 어린이들과 성도들이 축제처럼 기쁨과 풍성함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점을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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