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_모음

[샬롬복음의 서론]복음이란 무엇인가?

by 샬롬보금자리 2018. 9. 12.

"100점 만점에 나는 몇 점인가?"


이 질문에 냉큼 100점을 외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50점을 기준으로 살만한 사람은 점수를 어느즘에 가늠하고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람은 0점을 향해 그 무게를 저울질 하고 있을 것이다. 좀 생각이 고상한 사람은 그 기준이 무엇이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의 의미는 각자가 가진 기준을 비추어 자신의 삶에 점수를 매긴다고 할때의 만족감을 묻는 말이다. 여기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헤아린다면.. 예수 믿는 내가 나에게 몇점을 줄것인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나를 보고 몇짐이라고 하실지를 고민해보자는 말이다.

물론, 우리 주님이 나보고 몇점이다 하시면서 A, B, C 학점을 들먹이고, F를 내밀고 지옥으로 가라고 할리는 없지만.. 분명 성경에는 심판을 언급하고 하나님 앞에 섰을때, 양이든지 염소이든지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니 너무 싱겁게 “통과”를 외치지는 말자. 


100점 만점에 100점에 어른거리는 사람은 크게 2부류다. 

그가 가진 지위나 학력, 부와 명예와 상관없이 정말 만족감을 누리며 사는 이가 있을테고,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자기의 모양과 삶을 가늠하지 못해서 100점이 무슨 의미인줄 모르고 “믿음으로(?)” 100점을 외치고 그리 살겠노라 다짐하는 이가 있을터이다.

100점을 기꺼이 포기하고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드러내는 사람은 세상에서 앞장서나가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연봉이 적은 회사에 다니고, 부모님이나 친구들로부터 핀잔어린 조언들을 달고 사는 이들이 그 무리에 속할지 모른다. 혹은 높은 자아성찰감을 가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수 없는 삶을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이라고 붙들고 몸부림을 치다가 자신의 실존을 진실하게 마주치며 절망을 곱씹는 거룩한 성자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든지 여기에 질문 하나를 덧붙이면.. 제법 그럴사해진다.

100점에서 모자라는 점수를 무엇으로 채울수 있겟느냐는 질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취업”이겠고,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고, 어떤 이에게는 “건강”이며, 어떤 이에게는 “성공”일 것이다. 너무나 명확하게 추상적인 답변만을 늘어놓았을뿐, 각자의 마음에 담긴 답은 있으리라 본다. 그게 바로.. ”나의 실존”을 드러내주는 한 단면이다.

그 한가지 소원이 “나”의 정체이며, “나"를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달아볼수 있는 것이다. 

심판자이든 나의 구원자이든.. 만약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모르긴 몰라도 나의 만족도는 100점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좀 믿음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100점은 아니래도 그 점수를 올릴수 있으리라 여기며 희망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잠깐의 만화같은 공상이지만, 100점짜리 만족도를 묻는 질문은 우리를 “복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여기서 “복음”이란 인간의 죄인됨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어떤 영적이고 신비로운 것보다 넓은 의미이다. 다른 말로 “살만하다”는 것을 넘어서서 “살고 싶다”는 탄성이 터져나오며 “살수 있다”는 확신이 넘치는 상태이다. 각양각색의 종교나 철학, 그리고 인문, 사회, 자연, 과학으로 일컬어지는 고상한 영역에서 고민하고 해결해보려고 애쓰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복음의 세계에 가장 노골적인 표현을 애용하는 기독교인들에게로 좀더 좁혀 들어가보면, 이 3가지 질문이 유효하다.

당신은 돈이 많았으면 좋겠는가? 없었으면 좋겠는가?
당신은 건강했으면 좋겠는가? 어떻게 되나 상관이 없는가?
당신은 (혹은 당신의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공부를 못해도 괜찮은가?

내 마음대로 할수 있다면 다들 전자를 답한다. (물론, 이글을 읽는 당신만큼은 예외일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놓고 존중한다)

내가 클릭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기독교인들과 아닌 이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고상한 종교인들에게서는 간혹 애써 고행하며 고난을 택하여 구원의 길을 탐구하고 인류애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철학자들로 대표되는 인문 사회 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치있게 여겨지는 것들을 정의하고 규명하려 애쓰고, 자연과학자들은 이 세상을 분석하고 그 방법을 탐구하여 더 나아질 방도를 제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다양한 노력들을 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구원자라 고백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은데 그 차이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온국민의 기대를 받아 출범한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종교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진보와 보수, 빈과 부로는 나뉠지언정 도무지 예수의 어떤 것으로 세상이 정화되고 개선되는것 같지가 않다. 그나마 낭만적인 어린 청년시절에는 순수한 헌신과 비전을 언급하는데, 그 순결한 사랑을 이 세상에서 간직하며 내놓는 결과물들은 안타깝게도 하나의 문제를 고치면서 다른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내기만 반복할 뿐이다.(그렇다고 아니할건 아니고... 그 수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내가 이토록 횡설수설하며 하는 이야기는.. 복음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이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되뇌이며 성령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가운데 나타나는 은사의 어떤 것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더욱 집중하여 묻는 말이다.

다들, 예수를 잘 알고, 성경을 잘아는듯한데.. 예수님이 죽기까지 사랑해서 살리려는 사람은 보지를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우리가 망쳐놓고 있는 세상은 가늠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내 인생을 뒤돌아보니.. 좌충우돌하며 나름의 예수 믿기와 예수 따르기를 죽도록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내가 어디즘에 서있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못하고... 방황하기를 지금까지 했고, 지금도 그러한것 같다. 그래서일까? “할렐루야”와 “아멘”을 연발하며 십자가의 도를 이야기하고 순종과 헌신을 이야기 하는 것들중에 적지 않게 기름진 음식이 부패직전인것 같은 찝찝함과 울렁거림을 느낄때가 종종 있다.

몰라서 그러겠지, 자기는 한다고 하는거겠지.. 믿어주고, 그리 진실히 최선을 다하기를 격려하고 지켜보겠지만... 여튼.. 복음을 너무 쉽게, 예수 믿기를 너무 쉽게 정의하고 다른 사람을 재단하는 이들에게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난감하다.


복음과 구분하여 샬롬복음을 나누고자 한다.

그런면에서.. 나는 기존에 통용되는 복음과는 다른 차원에서(사실 이것도 이미 포함되어서 그때 그때 다르게 표현되기도 했다고 본다) 구별하여 “샬롬복음”이라고 정의하고 표현하려고 한다. 명색이 복음이라면 앞서 언급한 100점만점의 질문에서는 100점으로 표현되겠지만, 샬롬복음은 그 고백적인 점수가 100점은 물론이거니와, 80점, 50점, 30점, 0점이어도 복음일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리고 100점을 향한 한가지 소원을 소중하게 다룬다. 그 소원이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좋은 징검다리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샬롬복음에서 “샬롬”은 보통 번역하는 “평화”나 “평안”같은 좁은 의미를 벗어나며, 하나님의 통치가 전적으로 나타나고 그 안에 내가 바른 관계에 존재할때 비롯되는 “기쁨, 안식, 평화, 위로, 소망, 참된 슬픔과 절망, 거룩, 자유” 같은 상태를 의도적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복음으로 사는 삶은 무엇인가?”로 그 영역을 자연스레 확장하며  “죄를 짓는 인간”과 “죄”를 구분하되 둘 다 중요하게 다루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회복의 통치를 신뢰하며 하나님이 허락한 샬롬을 누리며 나누는 삶을 그려가고자 한다. 


*샬롬복음연구소에서 “샬롬복음으로 읽는 출애굽기”에 이어 진행할 “샬롬복음” 강의 서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