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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서평) 산위의 빛이 되는 샬롬 공동체를 꿈꾸며

by 샬롬보금자리 2018. 11. 13.

<서평>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를 읽고

“산위의 빛이 되는 샬롬 공동체를 꿈꾸며”



    1. 들어가는 말 :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이 책은 참 수작이다. 머리말에서 이 책의 자연스런 동기로 밝히기는 하르낙의 자유주의 신학이 지나치게 구원의 개인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구원은 공동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교단에서 신학을 한 탓인지 아니면 평소 교양이 부족한 탓인지 하르낙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르낙이 말하는 개인적인 구원의 특징들이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실제로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의 것이지 않던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교회에 다닌다고 내가 구원 받지 않는다. 내 부모가 신앙이 좋다고 내가 구원 받지도 않고, 내 자녀들이 나를 위해 선행을 많이 행한다고 해도 내가 구원을 약속받을 길이 없다. 철저히 내가 나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내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주로 고백해야 구원의 새 지평이 펼쳐지는 것을 경험적으로 그리고 지식으로도 전제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구원의 사건의 궁극적인 미래는 천국일터인데, 그 천국은 너무나도 당연히 공동체적이다. 설마 나 외에 구원 받은이가 아무도 없겠는가?(내가 못갔으면 몰라도)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느쪽이든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하르낙의 개인주의적인 구원의 이해에 반대하며 공동체적인 특징을 소개하는 로핑크의 답변에 동의하는 나의 이유이다. 아니 동의를 넘어서 자세를 고쳐잡고 책을 탐독하게 만들었다. 로핑크는 이 책을 통해 신구약을 오가며 하나님의 구원이 공동체적으로 일어남을, 과연 그러함을 깨닫도록 이끌어주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 출처:구글검색>



    2. 예수의 사역을 통해 그리는 공동체


 로핑크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예수의 사역은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했다. 2) 12제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며 대조사회의 기틀이 된다. 3) 예수 승천 이후에 형성된 원시 예수 공동체는 자신들을 성도라고 부르며 참 이스라엘로서의 정체성을 가졌고, “서로 함께”를 실천하는 대조사회로서 그 공동체를 통한 구원의 방법을 소개한다. 4) 고대교회는 이를 고스란히 계승했다.


 예수와 이스라엘

 먼저 첫 번째 주제인 ‘예수와 이스라엘’에서 로핑크가 주장하는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예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집결과 재건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빛의 역할을 하고 그 빛을 보고 이방이 나아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장되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려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되자 예수 자신을 대속물로 주는 새로운 계약이 주어졌다.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백성에서 유일한 백성을 찾아내어 이 백성을 구원의 징표로 삼고 나아와 배움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려고 한다. 


  예수가 이스라엘을 사역의 주요대상으로 삼았다고 하면서 12제자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12지파의 의미라는 것, 그리고 마 10:5-6을 근거로 이방인 사역보다는 이스라엘 사역에 집중했다는 점을 신약에 비추어 타당하게 설명한다. 또한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를 치유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서의 치유이며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하나님의 백성 재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 점, 그리고 그 재건된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빛을 낼 때 그 빛을 보고 나아오는 이방인들을 하나님 백성에 편입시켜 구원을 이룬다는 점을 설명한 것은 가히 압권이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왜 하나님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택하고 그토록 죄를 짓는대도 그들이 전부인양 그들을 회복시키려 했는지, 예수가 왜 이스라엘에 태어나서 그들 중에 제자를 모으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전파했는지, 그 배경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로핑크는 공동체에 대한 강조를 하느라 이스라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을 모르거나 알고도 기만하는 이들을 초대하실 뿐이다. 이 구분이 유대인들만의 어떤 것,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어떤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들에게만 행한 것이 아니었다. 로핑크도 언급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있어서도 꺼려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고쳐주신 것은 분명하다. 로핑크에게는 제자들마저 머뭇거리던 사마리아에서 예수께서 먼저 말을 걸어 구원한 남편이 일곱이었던 여인은 그래도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서 거라사 광인의 경우에는 구지 밤중에 풍랑을 뚫고 건너가서 돼지떼 이천 마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데가볼리 이방지역에 있는 사람을 온전케 해주고는 곧장 돌아온다. 예수는 이스라엘만을 대상으로 사역한 것이 아니다. 이는 구약에서도 명백하다. 하나님께 의인이라 여김 받은 욥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요나는 원수의 나라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기를 거절하다 물고기의 뱃속에서 사흘을 보냈지만, 결국 요나의 선포를 통해 회개한 그들은 이스라엘로 편입하지 않았다.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스라엘만을 사역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로핑크가 예수가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새로운 계약”이 제안되었다고 한 것은 오해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구원의 계획은 구원 받아야 할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아서 마련된 새로운 계약이 아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실낙원의 순간에 주어진 원시복음의 성취이다. 없던 것을 만든 게 아니라 있던 법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다가 직접 시행되는 그 시점에 있어서 이전까지 희미하게 그림자만 있고 그 실체를 알지 못하다가 예수에 의해 명백히 밝혀진 새로운 계약이다. 



<The Last Supper, ca. 1520, by Giovanni Pietro Rizzoli, called Giampietrino>


  예수와 제자들

  로핑크는 두 번째로 “예수와 제자들”의 단락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실제로는 두부류로 존재했고 이들이 이스라엘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대표한 것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그 증거로 산상설교가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되는 설교였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애매하지만, 로핑크는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식하고 하나님 나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수의 형제와 자매라는 새 가족이 제안되었다고 보았다. 로핑크에 따르면, 이 새가족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아버지가 되고, 가부장적 지배로 인식되는 아버지는 제외된, 모성과 우애와 자녀됨 만이 남아 있다. 따라서 제자 공동체는 하나님의 새가족으로서 지배관계가 아닌 서로 종이 되어 섬기는 관계가 되어야 하고, 이는 실천적으로 산상설교의 비폭력과 모든 윤리 명령들을 대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이런 천국의 윤리를 실현하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빛을 발하는 산위의 도시가 된다. 


  이 단락에서 로핑크가 주목한 제자들의 특징은 오늘날 선교사나 목회자 같은 사역자 그룹과 평신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아우르게 해주는 좋은 통찰이다. 또한 열두제자가 이스라엘을 대표한 것이지 그들을 대체하는 다른 하나님의 새로운 그룹이 아니라는 점도 가톨릭(Catholic Church 보편교회)에 봉사하는 사제다운 역사적 관점에서 참 의미 있는 해석이다. 그 외에도 이 단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로핑크의 값진 주장은 산상설교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으로 ‘비폭력을 비롯한 모든 산상설교에서 제시된 윤리명령들은 제자 공동체에게 현실에서 순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로핑크의 주장이 가지는 한계들은 많지 않다. 다만 로핑크가 열두제자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것이지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산상설교를 순종함으로 산위의 도시가 되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제자공동체가 자기네들끼리 엘리트 집단을 이루거나 세상과 단절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다시 이스라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대표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할 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인 한 부류, 혹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기반으로 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의 전형이 아니다. 그저 아브라함을 택해 부르시고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는 것을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과 자손들이 보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는 것일 뿐이다. 출애굽 자체도 혈통적 이스라엘만이 구별되어 나온 게 아니라 열 가지 재앙을 보며 하나님의 빛을 본 중다한 잡족이 편입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미 공공연한 신학지식으로 자리 잡은 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 외에도 로핑크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면 구지 더 고민스러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산위의 빛이 되는 공동체이다. 현실에서 이런 삶이 어떻게 나타날지 아직도 모르겠다. 너무 세상에 잠식되어 있던지, 아니면 세상과 단절되는 것 같다. 물론 어떤 하나의 공동체가 완벽한 모델을 제시한다는 획일화는 위험하고 다양함을 통한 조화로 샬롬을 빚어내는 하나님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결국 로핑크가 1982년에 이 책을 집필하고 이후에 '가톨릭 통합 공동체'(Katholische Integrierte Gemeinde, KIG)에 전적으로 투신하기 위해 1987년 그는 튀빙엔대학교의 교수직을 내려놓았다는데 이것이 세상과의 단절된 공동체의 그 어떤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 든다. 물론, 그가 투신한 이 공동체 운동의 주요 관심은 '하느님 백성 신학'이라고 하고, 1987년 이후 로핑크의 핵심 관심사는, 현대 시민 사회에 대한 '대조 사회'(Kontrastgesellschaft)로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라고 하니, 그 실천적 양상이 어찌되어 가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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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제자를 택하심, 출처: Logos>


  예수 공동체


  로핑크가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라는 질문으로 이끌어 내려는 공동체의 모습은 세 번째 단락인 ‘신약공동체의 예수 추종’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책을 다시 읽고 싶게 만들고 권하고 싶게 만드는 부분이 이 단락이다. 이 단락은 예수 부활 후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이룬 원초적인 공동체를 다룬다. 


  로핑크는 가롯유다를 대체하여 12제자단을 충원한 것을 예수가 시작한 말세의 하나님 백성 집결운동을 계승한 것으로 본다. 이 원초공동체는 성령운동을 통해 예수의 사역이 자신들 가운데 역사하는 것을 확인했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엑클레시아’, 또는 ‘성도’라고 부르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인 참 이스라엘로 인식했다. 이때 이스라엘을 대체한다는 자의식이 있었는데 사도바울이 회당과 교회와의 관계(이스라엘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이 이스라엘 역사에 받아들여졌고, 당분간 교회는 이스라엘을 질투하게 만들어 이스라엘을 회복케 한다)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 원초 교회 공동체에서는“사회적 장벽들이 지양”되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모두가 동일한 한 영으로 세례 받은 한 형제요 자매가 된다. 또한 이 공동체는 “서로가 함께”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된다. 특히 수많은 “서로 함께”의 권면 중에서도 “사랑하라”는 권면은 신약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공동체 내의 형제애를 뜻하지 보편적 인류애를 의미하지 않는다. 외부에 대해서는 선의를 베풀라는 말로 차이를 둔다. 이 원시 예수 공동체는 앞 단락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구했던 지배의 단념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온 실존으로 즉, 영적 차원이나 실제 사회적인 차원에까지도 하나님의 선택과 소명을 의식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상의 다른 모든 백성과 구별되게 사는’ 그런 ‘대조 사회’를 추구했다. 그러면서도 쿰란 공동체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자신들만을 선택받은 엘리트 그룹으로 인식하는 것을 지향했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이 단락에서 “서로 함께”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참으로 대단한 발견이다. 창조시에 주어진 공동체로서의 가정이 이미 그런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엄연한 타자를 나의 일부(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로 여기고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이 그것이었다. 또한 노아와 세 아들들 역시 전 인류의 죽음 가운데서 살아남은 새로운 공동체로서 서로의 허물을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 도왔어야 했으나 실패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보여지는 불안과 편애의 한계는 “서로 함께”의 빈곤의 결과였다. 이미 삼위 하나님이 서로 함께 사랑하고 서로 함께 자신을 비워 서로를 위하심으로 풍성함 가운데 현존하시는 것을 반영한 인도하심이 원시 공동체 안에 나타났고 이를 로핑크가 주목하여 발견한 것으로 높이 평가 받을 만 하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통해서 다른 민족들에게 구원이 전달되지 못하자 이제는 이스라엘의 불신을 통해서 구원이 이방민족에게 전달되게 했다는 설명이다. 롬11:12의 바울의 설명을 더 쉽게 이해하게 돕기도 하지만 로핑크가 주요하게 여기는 공동체를 통한 구원의 도래 방식과도 같은 연속성 상에서 설명해 낸 것으로 그 타당성을 더한다. 


< 고대교회 시절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임 당했을 콜로세움, 출처: Logos >

  고대교회


  마지막으로 ‘고대 교회의 예수 추종’은 원초교회 이후의 고대교회안에서도 이런 대조사회의 역할이 계승되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로핑크에 의하면, 고대교회는 앞에서 나온 개념들을 잘 종합하여 적용해 갔다. “만민속의 선민” 개념을 계속 견지했고, “치유의 종교”로 남아 있었다. 클레멘스의 편지, 미누치우스 펠릭스의 대화록, 고린도의 디오니시오스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의 형제적 유대”를 간직하고 있는 교회임을 입증한다. 고대교회는 이교도 사회와는 다른 “하나님의 대조사회”로서의 명맥을 잇고 있었고, 그 실천적 삶으로 검투경기나 야수 싸움을 구경하지 않았고, 황제 축일 잔치에도 참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거부”를 실천했고, 비폭력을 추구하며 전쟁에 종사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실천에 의한 진리의 입증”을 추구했다. 

  하지만 로핑크는 이런 하나님의 대조사회로서 “서로 함께”가 실천되는 “형제애” 넘치는 “비폭력” 공동체로서의 고대교회의 전통이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그 역사가 단절되었다고 진단한다. 지상국과 신국이 뚜렷이 대비되는 신국론에서 교회와 이교도 사회가 서로 대립되어 있을 뿐 서로 영향력을 줄 수 없는 관계로 규정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나라를 미래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여긴 탓에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를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로핑크가 스스로 말하기는 신약학자로서 역사신학에서 다룰법한 내용을 다루기에 단초적이라고 고백하지만, 개신교 목회자로서 익숙하지 않은 고대교회의 이런 증언들은 참으로 도전이 되고 소중한 것들이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 가진 의미와 그 영향을 추론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나 신앙공동체가 어떤 맥락에 놓여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게 한 것은 참 유익이 아닐 수 없다. 


< 꽃 한송이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모여 핀 꽃은 그냥 지나칠수 없다, @한국도로공사수목원 >


    3. 나가는 말 : 하나님의 백성들의 샬롬 공동체를 꿈꾸며 


  로핑크가 보기에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이다. 로핑크가 보기에 하르낙은 산상설교의 더 큰 의로움이란 주제가 개인의 마음에만 작용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하르낙을 통해 강조된 개인적인 구원은 시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더니즘 안에서 선과 악으로 구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논리 위에 놓고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절대 집단 아래서 질식할 것 같은 짓눌림을 경험한 이들이 포스트모던을 통한 한 줄기 구원의 빛을 보고 모두 그리로 내달리는 까닭이다. 지금은 로핑크가 염려하기 시작한 시대보다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집단보다는 개인을 선호한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교회에서 이뤄지는 예배도 개인 소비적으로 바뀌어가고, 훈련이나 모임도 공동체적인 성격을 체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노력들을 버거워한다. 사회가 그만큼 바빠진 탓도 있겠지만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진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역설적으로 불신과 손해보고 싶지 않은 배타적 이기심이 자기 사랑의 추구로 나타난다. 이런 흐름은 교회들이 속한 교단에도 나타난다. 교리 신종의 차이에 따른 교단의 분열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 신학적 규정을 회피하는 침례교회가 아닌 독립교단이라는 것이 낯설지가 않다. 교단이 개 교회들의 집단을 넘어선 어떤 신조나 규칙을 통해 소통되지 않는 것은 익숙하고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개인주의가 개교회주의로 확장된 것일 뿐이다. 


  이런 문제들을 마주한 우리에게 로핑크가 제시하는 예수가 이스라엘을 모으던 방식과 제자들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예수 공동체의 특징은 예수의 부활승천 이후에 형성된 신약 공동체로부터 고대교회로까지 그 맥을 잘 이어가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하나님나라를 미래로 미뤄버린 아우구스티누스를 경계하는 것은 참 소중하다.


  이제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을 인정하고 스스로 예수의 제자로 인식하는 무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로 함께”를 실천하는 공동체를 소망할 근거를 확인했다. 산상설교의 지고지순한 윤리명령들을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주저함이 있지만, 원시 예수 공동체가 확인한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며 세상에는 선의를 베풀지만 형제에게 사랑하는 공동체로 이 세상에는 없는 평화와 섬김의 공동체로 “대조사회”로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대한다. 그 넘치는 사랑과 평화를 샬롬이라 부른다면, 로핑크가 제안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고쳐 읽고 예수로 말미암은 샬롬 공동체로 자리 잡아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