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법으로 살펴보는 샬롬복음
들어가는 말.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부분을 살펴보다가 ESV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R.c Sproul) 앞부분에 있는 신학노트를 보게 되었다.이중에서 샬롬복음에서 주요하게 살피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자율성에 대한 부분의 논의가 간단하지만 중요한 핵심이 담겨있는 것 같아 소개한다.
R.C. Sproul의 글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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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법(The law of God)
하나님은 그의 세계를 법(law)으로 통치하신다. 자연 자체는 하나님의 섭리의 통치 아래 작동한다. 소위 자연법(law of nature)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작동하는 평범한 방법을 의미한다. 이러한 “법칙들(laws)”은 그의 주권 의지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 외의 어떤 법(law)에도 책임이없다. 하나님이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독립적이고 우주적인 법칙들은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자신에 대해서도 하나의 법(a law)이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이 그 자신의 도덕적인 특징(moral character)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신의 특징(character)은 도덕적으로 완벽할 뿐만 아니라 완전에 대한 무한한 기준이다. 그의행동은 그의 본성이 완벽하기 때문에 완벽하고, 항상 그의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독단적이거나 예측이 불가능 하지않고 변덕스럽지도 않다. 그분은 항상 옳은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창조물들로서 우리도 옳은일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덕법(moral law)에 따라 살기를 요구하셨다. 그의 도덕법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의(righteousness)에 대한 궁극적인 표준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최고의 기준이다. 우리의 통치자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우리의 순종(obedience)을 명령하거나 우리의 양심을 붙잡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그의 법을 어겼을 때(죄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정의될 수 있다) 불순종을 처벌할 힘(power)과 권리(right)를 가지신다.
성경에서 어떤 법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성품(character)에 기초한다. 이러한 법들은 신(divine)과 인간(human)의 관계에서 영구적이고초월적인 문화적 요소를 반영한다. 다른법들은 사회의 일시적인 조건들(temporary conditions of society)을 위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하면어떤 법들은 절대적으로 영원하지만, 다른법들은 역사적인 이유로 하나님에 의해서 효력을 상실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음식이나 절기법들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런 법들을 제쳐둘 수 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법을 제쳐둘 권한이 없다.
우리는 자율적이지 않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법에 따라 살 수 없다. 인간의 도덕적인 조건은 타율성이다. 우리는 다른 이의 법아래에서 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타율성의 구체적인 형태는하나님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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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및 세부 진술
이 글은 십계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논설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님을 완벽한(또는 온전한) 주권자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법의 완전성과 그 법에 순종해야 하는 대상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법의 현대적 유효성을 다룬다. 잘 정리된 글이라 여겨진다.
이 글에서 간단하게 구분한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 영구적이고 초문화적인 법과 시대적인 법들은 그리 쉽게 분리되지 않았다. 율법으로 정의된 구약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이 신약시대에 이방인들에게 확장되면서 많이 논란이 되었다.(행15장, 서신서들) 어떤 법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법은 간과할수 있는가?
실제로 로마서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오늘날에 새롭게 우리가 만든 율법들을 로마서에서 다루는 율법들로 투영시켜 율법과 자유를 실감한다. 오늘날 주일성수, 십일조, 기독교윤리가 새로운 율법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이미 알고 있을 것 같고, 이 짧은 몇줄로 그 명확함을 기술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 영구적인 법과 시대적인 법을 간략히 짚어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 보통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적 죄사함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 받아 예수와 동일시 되는 것은 구약부터 이어져오는 본질적인 법으로 봄직 하다.
그리고
- 시대적 상황에서 제시된 구체적인 율법들은 그 법 자체보다는 그 법이 가리키는 방향,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려하여 하나님이 계시하고 이스라엘이 지킨 율법이 현대적으로 재해석 되어 새로운 형태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
샬롬복음
스프로울의 글에서 크게 2가지(개인번역 부분에 밑줄친 부분)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특징을 자율성에 두느냐 타율성에 두느냐이다.
1.
스프로울은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 법들과 시대를 반영한 일시적인 법들을 구분할 것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 시대를 초월한 법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영구적이고 초월적인 문화적 요소를 반영한다"고 했다.
Some laws in the Bible are directly based on the character of God. These laws reflect the permanent, transcultural elements of relationships, both divine and human.
일반명사로 보편화된 신과 인간의 관계를 구성하는 불변하는 초문화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스프로울은 이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기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할때 즉시 부여되는 관계에서 파생되는 법칙들이 있다고 여김직하다.
2.
이와 관련하여 스프로울은 인간이 자율적이지 않다고 정의하고, 인간의 도덕적인 조건이 타율성에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We are not autonomous. That is, we may not live according to our own law. The moral condition of humankind is that of heteronomy: we live under the law of another. The specific form of heteronomy under which we live is the law of God.
인용한 글이 워낙 짧은 글이라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명확하게 저자의 의도는 알수 없지만, 스프로울이 부연설명하기를 ‘우리는 다른 사람의 법 아래서 산다’라고 하니, 아마도 타율성은 ‘사회성'이라고도 설명이 가능할 것도 같다. 인간은 자기의 법이 아니라 타인의 법에 의해서 지배받는다는 것이다. 스프로울은 이런 인간의 한계를 멋지게 하나님께로 이끌어낸다. 우리가 사는 이 타율성의 구체적인 형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법이라고 서론에서 제시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명제로 결론을 맺는다. 이런 스프로울이 고찰한 인간의 자율성과 타율성에 대한 인식은 그 깊이가 있다.
스프로울이 '우리는 우리자신의 법에 의해서 살지 않는다'고 말한대로, 인간은 자신의 법으로 실패의 쓴맛을 반복하면서도 도무지 벗어날줄을 모른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여 도덕을 형성하고 준행한다. 이런 한계를 스프로울은 다시 진정한 타율이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가능함을 이야기함으로 넘어서도록 한다. 심리학에서 거론하는 에고와 슈퍼에고도 타율성의 한 면인 것 같다는 아내의 말도 예사롭지 않게 설득력이 크다.
3.
샬롬복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샬롬이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강조되는데, 스프로울의 글에서 초시대적인 법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성품에 기인한 법이 신과 사람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표현이 주목하게 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존재 자체로서 인식하고, 그에게서 파생되었지만 그와는 다른 존재로서의 사람을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이 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영원불변하고 초시대적인 법(law)을 추정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요,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여기고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삶을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 답게 살아야 한다는 법이 제시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뢰하고 하나님 안에서(또는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 답게라는 말이 가리키는 방향과는 다르게 인간의 이해와 표현의 한계로 인해 이 말은 이내 힘의 논리로 둔갑한 일방적 요구와 심판을 염두하며 촉구하기 쉽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 답게'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법이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샬롬복음은 스프로울이 부정한 인간의 자율성을 주목한다.
그 이유는 실제로 창조 이후에 그런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며 정복하라는 지상명령과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법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주어졌지만, 그 속성은 철저하게 자유롭게 주어졌다. 심지어는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실낙원하면서도 아담에게 복종할 어떤 율법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대신 어떤 법 아래에 살게 되는지(땀흘려 수고해야 한다, 해산의 고통이 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알려주셨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수님은 귀신들린자 병든자들을 자유롭게 했을뿐만 아니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로 구원의 속성이 자유와 잇닿아 있음을 말했다. 내가 특별히 기억하기로는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안에 있으면서 내가 확신한대로 살라'고 격려한다. (롬14:5) 자율성을 북돋는 표현이다.
아담의 아들 가인을 보면 그는 그가 가진 자율성으로는 살인을 저지르고 타율성에서 기인한 두려움을 표현했다. 아마도 그래서 하나님은 애초에 타율성은 두려움에 기초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살인까지 저지를수 있는 위험해보이는 자율성으로 사랑할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이 이를 다스리도록, 섬기도록 하셨던 것이다.
샬롬복음은 자율성을 부정하기를 조심스러워 하는데, 왜냐하면 자율성을 부정하는 순간, 하나님이 기대한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을 타율성의 속성에 집중해서 이해하다보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의 남용으로 복음으로 사람을 억압하거나 무지성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미덕으로 오해받는 역사의 과오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사람에게 자신 못지 않은 자유를 주시고, 자율성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완벽한 전체(세상, 사람, 삶, 통치)를 구현하셨다. 이 완벽은 그 탁월한 가치(extream value)를 위해 완전한 자유에 기초한다. 타율성으로 요구되는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거듭 밝히고 알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 뒤에 자율성에 기초한 사랑의 순종을 원하신다.
결론
이 글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법의 존재여부, 법의 적용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숙고가 그 첫 단계가 된다. 따라서 이 첫단계를 구체적으로 잘 정립하고 수시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구지 이런 내용을 시간들여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각 사람마다 자신이 가진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또는 사람(나와 타인)에 대한 세계관/가치관으로 행동한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된 영구불변의 초문화적인 법을 하나님과 나(사람)에 대한 존재를 인식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함과 그 완전한 세계를 인식하고 누리는 것이 샬롬복음이 강조하는 바이다.
- 현실적으로 사람은 타율성을 가진 존재이나, 창조때에 본래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 답게 자율성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과 나에 대한 고찰이 깊어지고 그 관계안에 있는 영원불변의 법에 주목할때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타율성을 떨쳐내고 자유로이 살수 있다. (이는 스프로울이 말한 하나님의 법으로 귀속됨과 그 가리키는 바가 같을수 있다)
비고
이런 관점에서 십계명을 이해하면,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알려준 십계명은 안지키면 버림받고 심판받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른 하나님의 형상들과 어떤 관계로 지낼수 있는지를 알려준 것으로 읽을수 있게 된다. 이는 두려움을 동반한 타율성이 아니라 사랑을 기대하는 자율성에 기초한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 19장 4-6절에서 하나님이 사랑으로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을 근거로 순종으로 특별한 관계가 될 것을 이야기 하고, 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자발적인 화답과 잘 어울린다.
출애굽기 19:4–8 (개역개정)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7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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