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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 감상

샬롬복음으로 본 "목격자"

by 샬롬보금자리 2018. 11. 4.

겁도 없는 초딩 아들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보게 해줬더니 30여분 보더니 못보겠다고 포기한다. 놀리는 말로 이제 더 무서울거라고 했다. 나머지 못본 부분의 시나리오를 상상할테니 정말 무서울수밖에 없다. 그랬더니 아빠가 보고 결말만 알려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도 봤다. 내가 봤는데.. 정말 가슴졸이며 봤다. (솔직히 많이 무서웠다 ^^;;;) 감독의 연출 덕이겠다 싶으면서도 단연 주인공(이성민) 연기가 돋보였고, 피해자들의 눈이 반복해서 클로즈업 될때마다 눈빛을 마주치지 않으려는데 자꾸만 눈과 마주쳐서 섬뜩했고, 아픔이 크게 느껴졌다 영화를 보고 샬롬복음연구소에서 다룸직한 관점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샬롬복음으로 본 "목격자"



1. 두려움(fearness)


영화의 시작부터 갑자기 전개되는 살인의 긴장감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잔혹한 폭력으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현장을 목격한 일반인이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살인의 끔찍함이 내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명백한 악인을 대표하는 연쇄살인범의 노골적인 잔혹함과 대담함은 자체로 두렵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악한 그의 심경을 살필수 없기에 폭력적인 행위 자체 이상의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대신 다른 두려움이 주인공 목격자의 시선으로 관객에게 전가된다살인자가 죽임당한 사람처럼, 살인을 목격한 사람을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시종일관 영화를 전개하는 핵심 요소이다.


주인공은 살인 현장을 보자 마자 전화를 꺼내 신고를 하려고 했었고, 집값 떨어질 것을 걱정하며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살인 방조라고 분노한다. “당신이 목격했으면 신고할꺼야?” 라고 아내가 묻는말에.. “당연하지 신고하지..” 라고 답하지만, “살인범이 당신 얼굴 봤어도?”라고 되묻는 아내의 말에 움찔하며 화를 버럭내며 화면 밖으로 퇴장해버리는 장면은 주인공의 불편함과 내적인 갈등을 담아낸다. 뒤에도 주인공은 익명으로 제보하려고 하면서도 가족 사진을 보며 끝내 목격자로서 증언하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일 것이다. 동시에 자신과 동일시 되는.. 아니 자신보다 소중하기에 보호하고 싶은 예쁜 (아니 가족...!)에게 노출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주인공은 자신의 소신을 꺾고 침묵하며, 아내의 정의로운 언행을 억압하고 스스로 고립되어 고통한다. 



* 하지만, 영화가 펼쳐내는 두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끔찍한 살인 사건의 목격자는 주인공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도 자신이 목격자임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이게 두렵다. 주인공이 두려워하던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동일하게 고통하거나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상태로 살아갈 뿐이다. 그나마 목격자였던 여자가 주인공을 찾아와서 함께 신고하러 가자고 혼자서는 도저히 무서워서 못가겠다고 하는데 여인을 뿌리치고 나는 모른다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완강히 부인하는 주인공이 진짜 영화의 무서운 장면이다. 개인의 두려움은 충분히 공감이 되면서도 결과로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가 얼마나 괴기하고 무서운지를 실감하게 하고 두렵게 한다.


결국 주인공을 찾아와서 목격자임을 밝힌 여인은 자신이 목격한 사건의 살인자에 의해서 같은 방식으로 조용히 죽어간다. 주인공은 다시 살인사건 목격자가 된다.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너무나 당연하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불러올 뿐이지 아무런 회복과 샬롬으로 갈수 없다. 



악인을 대표하는 살인자는 자신의 악을 감추기 위한 살인을 이어가고, 살인자를 목격한 주인공은 더이상 침묵할수 없어서 증인이 되어 자신이 보고 경험한 일을 소상히 드러낸다. 아내의 격려와 지지를 받으며 나섰지만, 경찰이 살인범을 놓치면서 목격자가 우려하던 두려움은 실재화되어 현실속에서 주인공의 가족을 위협한다.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경찰이 악인을 제어하고 목격자를 보호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것과 대비되어, 목격자 혼자서 증언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두려움 생생하게 그려졌다.


결국, 영화는 살인 사건이라서 스릴러가 아니라, 목격자가 있는데 아무도 증언하지 않는게 스릴러이고, 목격자 혼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게 스릴러로 다가온다. 





2. (power)

살인의 잔혹함과 죽음의 두려움을 담아내는 요소는이다. 살인범의 손에 들린 망치는 힘의 실체이자, 우리가 속한 사회속에서 자행되는 많은 힘들의 상징이다. 힘은 용도와 역할이 어긋날때 여지없이 폭력으로 군림하는 수단이 된다. 


그나마 범인이 잡히고 주인공 가족이 안전하게 되는 소심한 해피엔딩의 장면에서 경찰이 살인범을 가리켜이런 사람들은 살인에 이유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시대는 이런 힘의 실체, 세력을 외면하는것 같다이유가 없다.. 아니라 이유를 모른다. 또는 이유를 구지 알려하지 않거나 알아도 어쩔수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끔찍한 살인 사건들 (피씨방 살인사건, 이혼한 아내를 살인하고 딸들이 사형을 청원한 사건 ) 일년에도 몇번씩 뉴스에 등장하고있지만, 실제의 살인이 아니더라도 생존이 위협받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힘은 명백하게 실존한다. 


위계질서를 들먹이고 자신이 가진 지위에서 가진 돈과 지식이 다른 사람을 겁박하고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마음은 고스란히 망치가 되어 망치를 자에게 희생당하고, 외면당함으로 죽음에 이른다.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장자연씨의 죽음이 그런 맥락에 있는 같다. 예멘에는 먹을 음식이 없고 치료할 약이 없는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어간다는 CNN뉴스 기사 생각이 난다. 아니 돈도 있고 건강도 있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친구가 없어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한 청년의 죽음은 가까이에서 일어난 가슴아픈 일도 있었다.





갑질문화와 미투운동 사이에서 갑과 , 강자와 약자의 손에 들린 망치가 서로를 향해 휘둘러진다. 내가 안전하기 위해 (power) 축적하고 힘을 사용한다. 힘에 의해 압제를 당하는 이들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아닌 타자들로서의 그들에 대한 폭력이 정당성을 얻으려 한다. 그들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 언제든지 힘으로 상징되는 망치를 꺼내들고 나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는 영화속에 묘사된 살인자나 주인공 모두가 보여주는 우리의 민낯이며  죄인된 인간의 한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가족의 안위 때문에 악인을 두려워하던 주인공은 우려하던대로 가족이 위협에 노출되자 직접 악인을 마주하고 집요하게 추격한다. 힘의 망치를 가진 자와의 힘겨운 싸움이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이 두려움을 넘어서서 악을 목격한 자로서 처절한 싸움을 자처하며 악인을 추격한다. 


하지만, 이런 힘의 싸움에서는 어떤 회복을 그리지 못했다. 영화 말미에 산사태로 악인이 자연으로부터(?) 심판 받는 장면에서야 드러나는 많은 시체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악들이 침묵속에 생명들을 죽음으로 뒤바꾸었는지를 지적할 뿐이다. 


악인과 이유를 모르고 악인에 의해서 고통당하는 이들이 힘에 의지하기에 평화는 이기적으로 독점된다. 나와 우리의 안전을 위해 나와 다른 편에 서있는 그들의 안전을 포기하라고 한다. 절대자가 역사에 개입하기 전에는 쉬이 끝나지 않는 싸움으로 침묵된 악이 얼마나 끔찍히 자행되었을까 싶다...



3. 목격자(witness)


결국 열쇠는 목격자에게 있다. 

살인 현장을 보았을때 신고를 했어야 한다. 목격자를 찾는다고 경찰이 요청하면 내가 보았다고 이야기 해야 한다. 그게 힘들었다면 최소한 가족에게는 말을 했어야 한다. 안전을 걱정함으로 목격자 스스로를 옭아매고 짓누르는 두려움은 외로움과 연약함을 기반으로 세력을 휘두른다. 외로움과 연약함을 극복하는 통로는 공동체이다.


생명에 대한 애착과 안전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인 것이고 소중히 지켜져야 가치이다. 쉽게 용기를 내라고 다그칠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함께 하는 삶을 실제화 하고 공동체로 연대 해야 한다. 이건 어떤 구호로 말이 아니다. 실제로 살길이 그러하다. 목격자가 소수일때 그들은 서로 연대하면 공공성을 획득하고 악이 드러나서 제어된다. 목격자가 늘어날수록 안전도는 급격히 상승한다.


영화의 한장면을 되짚자면, 살인범이 목격자의 집에 찾아와서 가족을 위협할때 주인공의 아내와 딸이 아파트 1 로비로 도망쳤다. 살인범이 아내와 딸을 향해 내리치기 위해 망치를 들고 있을때, 의도치 않게 장면을 목격한 증인들이 등장한다. 극악무도한 살인범이기에 얼마든지 계속해서 망치를 휘두를 같지만, 당신 뭐야..”라고 말하고도 살인범의 눈빛에 주춤하며 물러서는 목격자와 지극히 연약해보이는 행인들의 시선이 살인범의 손에 들린 망치의 폭력을 중단시켰다. 




아마도 1987이란 영화가 상기시켜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그렇게 목격자들의 어설픈당신 뭐야 말미암아 악이 중단되었고, 말도 안되는 박근혜-최순실 사건이 그렇게 드러나서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의 지혜를 빌리자면, 이런 위협에 노출되었을때 목격자를 확보하는 방법은 영화처럼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게 아니다. 영화처럼 실제로 아무도 내다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이야라고 외치면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확인하고 광장으로 뛰어나올거라고 하셨다. 자신의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어 순간의 목격자로 삼아야 위기가 모면된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목격자가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책임지게 하는 사회는 안전하기가 어렵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CIA 증인보호 프로그램까지는 아니더라도 목격자가 위협에 노출될수 있음을 인지하고 적극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목격자가 증인이 되도록 하는 안전한 보호는 무척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영화속에서는  살인이 일어나는 시간대에 깨어있어서 살려달라.. 말을 듣고도 혼자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치를 살핀다.


여기에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라는 마음이 들면서도 나섰다가는 나혼자 책임져야 할지 모른다는 부담감, 조금만 참고 모른척 하면 그냥 지나갈거라는 마음이 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경험한 것이 아닌가내가 자주 경험하기는 교회에서 선교단체에서 해야 하는 일이지만, 자칫 내가 말을 꺼내면.. 내가 모든 책임을 맡게 될때마다.. 후회했고, 그래서 다음에는 그리 하지 않으리라 학습했던 기억이 스쳐간다. 또한  같지도 않고, 말이 되지도 않는 갑질에 화를 내면서도 자신을 드러내기가 몹시 부담스러웠던 대한항공 직원들은 마스크를 벗기가 힘들어 보였다.




4. 목격자여, 어떻게 두려움을 이길 것인가


... 이것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참으로 모두 목격자이다. 먼저, 영화는 이런 답답한 현실에 대해 우리를 목격자로 만들어버린다. 마치 주인공이 의도치 않은 순간에 목격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에서 살인 당한 피해자들의 눈은 의도적으로 클로즈업 되면서 관객이 목격자의 입장으로 눈을 마주치게 한다. 산사태예방공사에는 소홀하다가 살인사건으로 집값이 떨어질까봐 걱정하는 모습, 걱정하는 집값에는 평생을 모은 돈에 대출을 받아서 마련한 집이라는 주인공의 위기감을 목격했다.


시사적으로는 우리는 사회안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기도 하고,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본다. 예멘 난민의 문제와 새터민과 이주 노동자들의 고통어린 신음을 듣고, 노동자들의 부당해고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지역과 학연에 의한 부패, 돈과 성공이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며 사람을 수단화 하며 인격을 숨지게 만드는 일의 목격자이다. 


당장은 사건의 목격자임을 스스로 부정함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같아도 결국 위협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영화속 주인공이 그랬고, 교회의 부정부패를 외면하고 은혜만을 외치던 교회는 개독교라는 외부의 조롱과 가나안 성도를 자처하는 백만명의 형제 자매를 양산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목격자로서 내가 보고 들은 , 내가 악에 대해 알게 된것을 내가 나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소통하고 함께 대응해야 한다경찰이나 정치인들이 몫을 감당하라는 요구도 빼놓을수 없다. 많은 목격자들이 있다면 안전해질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고 일의 목격자로 증언을 해야 한다. 


작게는, 페이스북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를 할수 있다. 그리고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서명을 할수도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돌아보고 정비해야 주요한 가치는 공동체로의 연대이다. 함께 사는 삶에 대한 관심 있어야 한다. 


실천적으로 반성하자면, 우리와 내가 안전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웃집과 인사를 나눠야 겠다. 아이의 친구들을 자녀처럼 귀하게 여겨야 겠다. 함께의 저력을 기대해 보련다. 하나님이 이세상을 함께하도록 만드셨지 않은가?! (아담이 혼자 있는게 좋지 않다면서 돕는 배필을 주셨고, 예수님도 두세사람이 모인곳에 함께 하겠다고 하셨다)





* 샬롬복음의 차원에서 영화에 주목한 이유는 이런 공동체만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샬롬이 있음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사실, 나는 단순히 일만의 목격자가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성도라면 익히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8)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는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격자로서 증언하기를 주저한다. 제대로 못봐서 일수도 있고, 힘의 망치를 휘두르는 악이 실존하는 세상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들까지도 사망이 노릇하였나니(5:14)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상의 것을 목격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8: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8:15) 


그럼에도.. 내가보고 들은 이일의 증인이라고 말하는 데는 무척 용기가 필요하다. 앞서 지적한대로 자칫 혼자 독박쓸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수 밖에 없고, 조금만 외면하면 지나갈 같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가 안전을 담보하는 공동체라고 믿는다. 


영화속 경찰은 무기력했고, 현실속에서 검증되지 않은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은 모호하지만, 하나님은 경찰보다 정의롭고 전능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씀을 자주 읊조린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또한, 악에게 위협당하는 내가 사랑하는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나의 부분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그렇기에 여기서 일차적으로 증언되는 내용들이 침묵으로 강요되지 않고, 용기를 북돋우는 진리됨의 진원지가 될수 있다고 기대한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두려움으로 고통 당한다. 여기서의 해방은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주인공과 살인범과의 결투가 아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신실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생명이 주어졌음을 믿는 것이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앞에 기도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여기에 안전한 구원과 샬롬의 열쇠가 있다. 



영화에서 살인자는 주인공 목격자의 베란다에서 자신이 살인한 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내뱉는다.

드럽게 잘보이네



나는.. 우리는.. 무엇을 목격하는가? 

힘의 끔찍한 위협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


 어느것이든.. 악은 우리가 침묵할때 우리에게 두려움을 무기로 억압하려 들다가 결국 우리의 실제적인 위협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따라서, 본 것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우리의 안전과 샬롬에 필연적임을 기억하고 참된 증인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한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