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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 감상

'트롤, 월드투어'를 보고

by 샬롬보금자리 2020. 5. 13.

 

'트롤, 월드투어'를 보고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에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미 예전에 재밌게 본 트롤(2017년 드림웍스)의 후속편인 '트롤, 월드투어'가 그 영화입니다. 포스터에 나온것처럼 트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요정인데 머리가 위로 솟아있는게 특징인 귀여운 녀석들입니다. 전편(2017년 트롤)에서는 트롤들을 잡아먹으려는 버겐과의 갈등과 화해가 주제였다면, 이번에 나온 트롤, 월드투어(2020년)는 외부의 적이 아닌 같은(?) 트롤이 자기와 같지 않은 트롤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이야기입니다. 그저 아이들 수준의 스토리이겠거니 하고 보다가 복음을 붙들고 씨름하며 그 적용에 있어서 늘 고민하던 공동체가 보여서 글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최대한 스포를 자제하겠지만, 영화를 안보신 분에게는 부득이 스포가 될수 있습니다)

 

1. 나와 다른 친구들이 있다는 것

  영화속 주인공인 '파피'(핑크색의 발랄한 표정을 한 트롤)는 팝 트롤 마을의 여왕입니다. 그녀와 친구들은 팝 스타일의 노래와 춤으로 매일을 즐겁게 지냅니다. 그러던 어느날 서로 다른 외모와 다른 노래를 가진 5개의 트롤 마을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파피'가 보여준 첫번째 반응은 호기심과 기대입니다. 그들을 만나보고 싶어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합니다. 

  영화속의 다른 주인공, '바브'(빨강 치킨헤드를 하고 기타를 들고 있는 트롤)는 악당역할입니다. 록 트롤 마을의 여왕인 그녀는 다른 음악들의 존재를 알고는 그 음악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들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자신이 가진 록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더 큽니다. 다른 음악은 모두 별로이기에 록 음악의 진수를 알려주겠다고 하며 다른 트롤 마을을 하나씩 파괴합니다. 

  우리도 살면서 우리와 다른 사람,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듣고 보고 압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이 영화속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순진한 호기심으로 궁금해하고 '앞으로!'를 외치며 '온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노래하는 어린이들처럼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합니다. 또는 그들을 내가 바꿔놓아야 할 대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나는 어느편에 속할까 생각해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현실처럼 반전이 있습니다.

 

2. 다른 노래는 용납할수 없어 : feat. 힘의 논리

  표면적으로 명백한 악당은 '바브'입니다. 그녀의 목표는 록음악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록 음악 이외에 다른 음악을 없애려고 합니다. 군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록 음악이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다른 음악을 없애는데 사용되는 주된 방법은 '힘'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다른 상상력을 잃어버리게 만든 '힘'의 논리가 영화속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아름다움이 무기가 되다

  이 영화에서 충격적이면서도 창의적이라고 여겼던 부분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갈등을 표출하는 힘의 사용을 음악으로 묘사한 점입니다. 영화속에서는 전자기타와 드럼으로 음악을 연주하면 번개가 나가서 트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록 음악의 공격에 대항하는 다른 음악들(테크노, 펑크, 클래식, 컨트리, 팝)도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무기가 되어 반격합니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공격을 형상화하는 것을 보며 어떻게 음악을 이렇게 묘사하지 하는 당혹감은 영화 직후에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전자기타 흉내를 내며 서로를 공격하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든지 힘을 행사하는 폭력적인 도구가 될수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람을 돕고, 보다 편리하게 하기 위해 개발한 과학기술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 사람을 죽이면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이제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개발된 의료기술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이는 이후에 신약개발의 기반이 된다는 이유로 정당하게 받아들여집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만큼 타인의 아픔에 민감한 세대를 살고 있지만, 기독교 안에서 느끼는 당혹스런 현실은 사람을 살리는 복음으로 사람을 죽이려는게 아닌가 싶은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 죽으셨는데, 너희는 무엇하고 있느냐는 채찍질에 착한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자신을 부정하려고 무던히도 애쓰며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이 아닌것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완악함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친히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했지만, 우리는 그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다시 내가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타인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한 거룩한 명분에 이끌려 생명력 없는 삶으로 회귀하기 쉽상입니다.

아름다운 복음을 어떻게 나눌까 

  최근 한국은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산을 거의 성공적으로 종식시키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태원 게이클럽이 코로나 19 재확산의 발원지로 꼽히면서 동성애 혐오가 다시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미 차별금지법 논란, 성소수자 축제 같은 이슈들 속에서 교회와 기독교가 진통을 겪고 있었는데, 이번 상황을 계기로 다시 거센 비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동성애가 바람직하다거나 용인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 동성애의 성향의 선천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 성향을 가진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며,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거스리는 것이 명백함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아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우리가 그들에 대해 취할 태도는 비난이 아닙니다. 잘못인줄 알면서도 탈세를 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밀어내는 삶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우리 역시 잘못을 행하기 때문이고, 이는 그들의 죄가 우리보다 더 무겁다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나눈다는 것은 어떤 잘못을 해도 내버려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사랑하자는 말입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복음을 통해 동성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강제하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일것입니다. 이는 이미 죄인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에서 경험하는 새로움의 유일한 비결이지 않습니까?!

낯선 친구를 대하는 서툶

  구지 영화속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낯선 이를 대하는데 서투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예전에도 교회 내에서조차 장애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고,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고, 이혼한 여인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좀 더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다른 지역의 사람, 피부색이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가 그러합니다. 그런 수많은 낯선사람들이 익숙해진 요즘에 와서는 극렬하게 동성애를 낯설어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태원의 동성애 클럽 출입한 사람인 것을 밝히는 것은 신천지 신도임을 밝히는 것마냥 음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삶과는 다른 삶입니다. 유독 그들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는 이유는 우리에게 낯선 까닭은 아닐까 싶습니다. 나와 그들의 다름에 대해 록 트롤 마을 여왕 '바브'처럼 행동하는 것일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은 우리는 여전히 이들에게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힘으로는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는 일, 복음으로 사람을 죽이려드는 일은 이미 십자군 전쟁과 제국주의 선교역사에서 저지른 기독교의 실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가진게 좋다는 자부심으로 나와 다른 이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려 해서는 안됩니다. 

3. 최고의 노래: feat. 힘의 논리 2

생존을 위한 굴복

  영화속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힘의 동원을 보여줍니다. 록 트롤 마을의 여왕 '바브'가 록 세상을 만들기 위해 '파피'를 잡아오라고 자객을 보냅니다. 그 자객들은 소수음악인 '스무스재즈', '요들', '레게', 'K팝' 트롤들입니다. 미국에서 만든 영화에서 한국어가 들리고, 한국노래 '오빤 강남스타일'이 한국어로 불리우는 것은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이 음악 트롤들이 '바브'의 명령대로 '파피'를 잡으러 가는 이유는 너무나 슬픕니다. 전세계를 록 음악으로 채우려는 '바브'는 코딱지보다 더 작은 땅에서만 록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을 연주할수 있게 해준다고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자객들은 자신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 팝 트롤 마을의 여왕 '파피'를 잡으러 간 것입니다. 

  어린이 만화 영화에서 이토록 힘의 논리와 생존의 논리에 쪄든 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것이 놀랍지만, 이는 이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역동이 그러함을 보여줍니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은데, 코로나 19 이후로 사람들이 외출을 못하면서 넷플릭스에서 빅 히트를 쳤다는 킹덤도 역시 죽지 않기 위해 죽일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요 플롯입니다. 이런 생존을 위한 행동이 당위성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논리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나 약, 시험성적이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다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킹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생사초를 먹고 죽은자를 억지로 살려내서 징그러운 괴물로 밤에만 살아나서 인육을 뜯어먹는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양 극단의 닮음

  이 영화가 어린이 영화라고 치부하기에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파피'와 '바브'의 묘한 유사점입니다. '바브'는 모든 트롤들을 자신의 음악만 연주하게 하려고 강제하지만, '파피'는 다른 트롤들과 친구가 될수 있다고 하면서 그들의 음악을 듣고는 진짜 신나는 음악을 들려주겠다고 하며 '팝'음악만을 줄기차게 내세웁니다. 사실 '파피'는 전편 영화(트롤, 2017년)에서도 친구들의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번에도 친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신은 낯선 트롤들을 만나서 친구가 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겠다는 (순수하게 좋은 의도로) 태도로 일관합니다.(트롤 광고에서도 잘 볼수 있죠) 그래서 실제로 다른 트롤 마을에 가서는 그들의 음악을 듣고 너무 슬프다고 하면서 "최고의 노래로 불쌍한 친구들에게 용기를 주자"고 하며 줄기차게 팝 음악의 노래와 춤을 알려주려고만 합니다.

  영화 말미에 가면 예전에 함께 살던 트롤들이 각 음악 마을별로 흩어져서 살게 된 원인이 실은 '팝'음악 트롤들 때문이었다는 내용을 알려줍니다. 다분히 의도된 각본일수 있지만, 결국 폭력적인 '바브'와 친절하지만 상대방을 보지 않고 자신의 좋은 것만 알려주려는 '파피'는 같은 부류였습니다. 노래하고 춤을 추는 어린이 만화 영화를 보았는데, 마치 진보와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분노나 무시로 대하는 태도, 어르신들이 청소년들의 복장이나 태도를 문제삼고 청년들은 어른들에게 관심두지 않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4. 우리는 다름이 필요해

  영화는 록 음악을 세계의 유일한 음악으로 만들겠다는 '바브'의 각오가 거의 완성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잠시 록 음악 트롤들 중 한명이 자신도 록 음악이 좋지만, 모두가 다 똑같다면, 우리 음악이 좋다는 것을 알수 없다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각본으로 연출된 이야기로서의 영화는 '파피'의 속임수로 '록' 음악으로 전세계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저지하지만, 그 결과 '록' 음악도 결국 파괴됩니다. 마치 세계대전 이후에 승자도 패자도 모두 상처뿐인 모습처럼 형형색색의 다양한 패션을 뽐내던 트롤들은 모두가 빛을 잃은 무채색으로 변합니다. 

우리의 음악은 우리 안에 있어

  영화속에서 몇분간 지속되는 이 무채색의 빛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래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줍니다. 그런데 모든 장르의 음악이 다 파괴된 그 순간에 고요한 적막속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새로운 박자가 됩니다. 살아있음의 현상인 그 심장 뛰는 소리가 다시 음악이 되며 가슴에 붉은 빛을 나타내줍니다. 사실 이부분이 너무나 멋진 장면이어서 영화를 안본 분이라면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나의 심장 박동과 다른 이의 심장 박동이 비슷한듯 다릅니다. 그 차이가 다양한 리듬을 만들어내고, 그 리듬에 맞춰 표현하는 높고 낮은 음들이 멜로디를 만들어냅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자신의 빛을 회복하고 다 함께 어우러져 노래를 부립니다. 팝, 록, 클래식, 컨트리 펑크, 테크노, 힙합, 레게, 스무스재즈, 요들, 케이팝이 모두가 자신의 음악으로 노래하는데 한 노래가 됩니다. 사실, 저는 이 장면에서 천국을 보았습니다. "어머, 이게 천국이야"를 외치며 일어나서 아이들과 춤을 추었습니다. 하나만으로도 아릅답지만, 모든 열방이 각기 자기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5. 천국의 노래를 부르자 

  지난 2018년에도 비슷한 상상을 한적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에 남측예술단이 방문해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 가수들의 노래가 연일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조용필, 이선희, 백지영, 레드벨벳, 소녀시대, 피아니스트 김광필님의 연주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이번 트롤, 월드투어 영화에는 레드벨벳이 K팝 트롤 목소리와 노래로 출연하기도 했다죠) 막혔던 담들이 무너지고 갈등과 긴장을 내려놓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 것을 보면서 천국에 춤과 노래가 빠질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신천지 같은 이단, 혹은 교주 못지 않은 절대 리더십을 행사하는 집단에서 나타나는 리더와 똑같은 모습, 구성원들의 일사불란한 통일성에서 는 색을 잃어버리고 잿빛으로 모두가 똑같아진 트롤 같습니다. 그와는 다른 다양함, 우리 안에 있는 나 됨과 너 됨이 멋지게 어우러졌으면 좋겠습니다. 트롤들이 각자가 자신의 심장의 두근거림의 리듬을 알아차림으로 자신의 노래를 새롭게 다시 부른 것 같이, 우리도 내 안에 이미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을 알아차릴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장로교인이 되어야 하거나, 모두가 침례교인, 감리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교회와 미국의 교회, 호주의 교회, 이집트의 교회가 함께 어우러져 자신의 노래를 부르며 한 노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께 있도다" 찬양을 하면 좋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9-12]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이야기를 넘어 천국을 상상하며

  사실, 영화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트롤 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들도 실제 역사나 사실이 아닌경우가 허다합니다. 당연히 삶의 기준을 제시할만한 진리도 아닙니다. 그런면에서 성경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시각과 청각을 동원한 영상을 보다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중요한 것들이 스쳐지나갑니다. "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는 그런 순간들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글입니다. '트롤:월드투어'라는 영화는 세속적인 춤과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영화입니다. 노래를 소재로 다양성이 존중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자니 성경이 보여주는 천국의 이야기, 교회의 이야기, 가정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지만 다른 지체라고 하는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어린이 영화 마저도(아니 오히려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힘의 세계관을 보면, 십자가의 사랑이 생각나고,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마10:26)이 생각납니다. 마지막 피날레를 보면서는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는 말씀(고전 8:4)이 생각나면서 모든 음악과 모든 춤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상상을 합니다. 가장 마음이 설레는 것은.... 역시 하나님 앞에 다 함께 모여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는 천국입니다.

신나는 샬롬의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