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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 감상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by 샬롬보금자리 2019. 10. 31.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았습니다. 

처음엔 아내와 함께 손을 꼬옥 잡고 보기 시작해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보며, 함께 울었습니다. 극장을 나와서 아내와 자연스레 영화 소감을 나누면서 80년생 황호경을 좀 더 깊이 만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함께 살았던 여자, 할머니와 엄마, 여동생이 생각났습니다. 매주 만날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교회 청년들과 집사님들도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청년부 성경공부 모임에 제안해서 다시 한번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 담겨진 아픔과 고통을 마주 하면서 연구소를 시작하면서 가진 질문(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으로 사는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서 어떻게 복음을 이야기 할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에 담긴 주인공이면서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 자들의 아픔과 회복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글이 되면 좋겠습니다.

출처: 다음 영화 

 

1. 아픔과 고통

이 영화의 주인공은 82년생 김지영입니다. 그녀는 분명히 자신만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속 주인공 김지영이 보여주는 삶은 아내이자 엄마, 딸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평범한 여인을 대표합니다.

어릴적에는 미국에 가보고 싶은 평범한 어린이였고, 대학 졸업후 취업한 직장에서는 일 잘한다고 인정받던 직장인이었습니다. 남편과 결혼하고도 이어오던 직장생활을 출산과 육아를 위해 그만두고 벌써 26개월동안이나 딸을 돌보고 있습니다. 가정을 돌보기 위해 헌신하는 엄마와 공무원 아빠 사이에게 자란 1남 2녀중에 둘째이고, 부산에 있는 시댁 부모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착한 며느리 김지영입니다. 

출처: 다음영화

 

(1) '지영아 네가 지금 아파...'

이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이 자라온 어린시절부터 학창시절과 직장시절, 신혼 초기까지 여자의 삶의 아픔과 고단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아픔을 크게 2가지로 나눠서 살펴보자면 먼저는 과거에 좀더 많았던, 하지만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가족을 위해 직장을 선택하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보다 많이 바뀌었지만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시댁과 직장에 관련된 아픔입니다.

출처: 다음영화

(2) 내 꿈이 아닌 가족을 위한 삶

지영의 엄마는 국민학교때 형제들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는데 오빠들을 위해서 청계천 미싱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지영의 언니는 IMF때 아버지가 퇴직하자 교대에 진학해서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주인공 지영 역시 작가를 꿈꾸며 국문학과에 진학했지만 취업을 선택했습니다. 가족을 위해 직장을 선택하는 이유는 '돈'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꿈을 희생하는 것이 요구되는 상황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요구를 책임있게 감당했고, 지금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수는 없다"고 말하는 나의 부모님과 여동생의 일침이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출처: 다음 영화 

(3) 작은 것들을 위한 시

BTS가 부른 '작은 것들을 위한 시'는 신나는 멜로디와 춤을 추며 '너의 상처를 돌보며 그저 널 지킬거야' 노래 합니다. 대한민국 '시댁의 시'에는 이런 노래가 너무나도 필요해 보입니다. 영화속에서는 명절에 대한민국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아직도 깜깜한 새벽인데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주인공은 얼른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할일을 찾습니다. 시어머니는 '좀더 자지 그러니'라고 말하면서도 시금치 삶을 것을 건네줍니다. 명절 당일 오후에는 처가로 출발하려는데 시누이가 먼저 도착하니 시어머니는 그 시누이를 위해 전을 대피고 과일을 내오라고 하면서 너도 피곤하면 방에 들어가서 쉬라고 말합니다. 이 자연스러운 풍경은 뭔가 불편함이 있음을 고발하면서도 이를 누그러 뜨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시누이가 지영의 딸의 옷을 여러벌 꺼내면서 틈틈히 샀다고 하고, 자기가 음식 가져다 먹겠다고 합니다. 

https://youtu.be/XsX3ATc3FbA?t=3

작은것들을 위한시, BTS 

직장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명백한 차별에 대한 것입니다.

일을 똑같이 해도, 아니 일을 더 잘해도 여자는 결혼과 육아 때문에 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로 미리 배제되는 것입니다. 무시할수 없는 엄연한 현실적인 지적입니다. 결혼을 늦추거나 거부하는 요즘 세대가 내세우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환경을 초월하고 일을 야무지게 해내는 슈퍼우먼은 직장에서 '독한 여자'로 통하고,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라는 말로 여자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주인공은 알바를 하려고 해도 할수가 없고, 회사에 복직하려고 해도 할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도와주고 직장에서 환영을 해도 이시대를 대변하는 82년생 김지영은 할수가 없습니다. 그녀에게 '네 전부를 함께 하고 싶어'(BTS, 작은 것들을 위한 시에 나온 가사)라고 노래 불러주는 이가 없어서일까요?

출처: 다음 영화 

(4) 불편한 현실과 어울리지 않은 웃음

영화는 이렇게 시종일관 사뭇 진지하게 직설적으로 모든 불편한 상황들을 나열합니다. 기껏해야 남편이나 시어머니, 직장 상사들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배려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여자 김지영의 삶이 얼마나 불편한지 보여줍니다. 그런 불편함을 늘어놓고는 대중들을 위한 배려인지 웃긴 말장난 대화나 상황으로 불편함을 흐릿하게 합니다. 

'서울대 공대를 나온 이유가 아이 구구단 가르치려고 했나봐요' - 어린이집 엄마들끼리 차 마시는 자리에서
'너는 중전마마고 나는 무수리야 죽도록 일만하다 죽을꺼야' - 예전 직장 언니와의 만남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말들로 왁자지껄하게 한바탕 웃음이 커지지만 감독은 너무나도 금새 다음 장면의 적막을 통해 본래의 불편함에서 기인한 우울함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이는 감독의 연출이 아닌 이 시대가 소리없는 절규로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소리없는 신음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영화 '조커'에서 주인공 아서를 해피라고 부르며 언제나 웃으라고 말하는 엄마, 광대의 일을 하기에 'Don't forget to smile'이란 문구를 보며 직장을 나서야 하는 삶. 그 삶의 주인공 아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되서 멈출수 없는 웃음이 그를 비극적인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과 비슷한 언저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마주한 이 불편한 현실에 그저 임기응변적인 순간적인 위로나 대안들이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됩니다. 

영화 '조커'   출처: 다음 영화 

 

2. 복음의 가능성

이 영화를 보면서 수없이 되뇌인 질문은.. 그럼 이 여인은 어떻게 행복하게 살수 있지?, 김지영의 아픔을 달래주고 행복하게 할 복음은 무엇일까? 그 복음은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직후부터 3년간 시집살이를 한 아내, 출산 이후에 직장을 그만둔 여동생, 여동생과 나를 키우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근무하고 교장으로 은퇴한 엄마. 이 세명의 김지영이 꿋꿋이 살아온 삶이 대견하고 새삼 고마우면서도 아픔으로 자신을 잃어버리는 김지영과 같은 시대안에 있기에 함께 아플수 있다는 생각에 문제를 그냥 멀찌기 내버려둘수는 없었습니다.

출처: 다음 영화 

(1) '아프지마 누나..'

이 영화는 내게 남자와 여차의 차이, 차별을 보여주었습니다. 온 가족이 아픈 지영을 위로하고 돕고 싶어하지만 누나가 좋아하는 크림빵 대신 단팥빵을 사와서 미안해 하는 동생이 보여주듯이 그동안 살아온 세월 속에서 짓눌려 있던 한 사람의 삶을 다시 회복하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픈 현실을 두고만 볼수 없기에 할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 무엇일까 고민하니, 남녀평등이 적절하겠다 싶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댁과 처가를 똑같이 대우하는 것, 직장에서 동일한 승진 기회, 능력에 의한 평가와 대우, 결혼과 육아에 대한 공동책임을 강조하면 될까? 교회에서 남녀 차별은 무엇일까? 여성 목사 안수, 여성 장로가 있어야 평등일까? 뭔가 더 복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출처: 다음 영화 

(2) 네델란드 행복육아

그래도 보다 평등한 사회가 대안이 된다면, 첫번째 대안은 얼마전에 만난 처형이 살고 있는 네델란드 이야기에 관심이 갑니다. 네델란드는 우선 육아휴직이 자유롭고 가족 중심적인 사고가 당연하게 여겨진다고 합니다. 아이를 혼자 두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아이의 방학에는 부모중 한명이 무조건 휴가를 낼수 있도록 법에서 보장하고, 근무 패턴도 주2일~주5일 사이를 원하는대로 조정할수 있다고 합니다. 학력에 의한 임금 차이가 없지 않지만 그 격차가 우리보다 현저히 작다고 합니다. 얼마전에 과정의 평등을 이야기 하면서 촛불을 들었던 서울대 촛불집회가 주목받는 대한민국에서는 한첨 멀리만 한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네델란드 역시 남여 임금격차나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은 난제로 여겨진다고 하니 전 세계가 고민하는 문제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출처:yes24

(3) 성경에서 말하는 평등과 사랑

그래서 나는 남녀 평등, 차별없는 세상으로 변화되어 성숙되어가야 함에 동의하면서도 성경에서 발견하는 대안으로서의 사랑에 관심이 갑니다. 김지영의 아픔에 필요한 복음은 평등이라기 보다는 사랑이며 진실함 같아 보입니다.  성경은 분명 평등을 강조합니다. 

1) 하나님의 동등하심

먼저 하나님은 세분이지만 한분이라는 신비를 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하는게 여간 어려운게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세분 하나님은 동등하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에서 보여주는 최초의 공동체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다.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하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6문)

2) 남자와 여자의 구분

성경은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갈빗대를 꺼내 여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창2:21-23). 그러니 남자를 먼저 만들고 여자를 만든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에는 어떤 구분도 보이지 않습니다(창1:26-28).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세기 2:21–23, 개역개정)

2
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6–28, 개역개정)

3) 교회 안에서의 차별 없음.

신약에 와서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 할례파나 무할례파,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 종이나 자유인 그 누구에게도 어떤 차별이 있을수 없습니다.(골3:11) 로마 시대에 시민과 시민이 아닌 자의 구분이 명확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명확하던 시기에 이런 편지가 돌아다녔던 교회는 확실히 시대변혁적인 혁명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떤 혁명을 하려는 게 아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골3:10)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로새서 3:10–11, 개역개정

4) 동등함의 기초, 사랑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기인하는 이 동등함은 모든 권리를 동등하기를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사랑함의 방식을 통해 작동합니다. 먼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8). 실제로 그 하나님은 사랑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성령 하나님을 통해 일하십니다. 또한 성자는 언제나 성부 하나님께 의지하고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영광을 차지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활동하며 성자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하고, 성부께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자기 내어줌의 사랑이 차고 넘침이 하나님을 사랑이시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삼위일체, 출처: 월간 개혁신앙

하나님은 자신의 이 원리를 따라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창1:26-27),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창조 직후에 연거푸 보기 좋다고 감탄하시던 분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돕는 배필을 만들어야겠다고 하시며(창2:18),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창2:22). 그 결과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2:24). 마치 세분 하나님이 한분이신 것 같이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교회에 관심을 돌려도 동일한 원리가 나옵니다.(롬12:5)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열심으로 주를 섬기라는 것입니다.(롬12:4-11)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이 한몸됨 안에서 나타나는 동등함은 나의 권리를 쟁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랑에서 비롯된 결과로서의 차별이 없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를 좀더 사랑해달라, 사랑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사랑하니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가지고 누가 맞다 틀리다를 주장하기 보다 예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납하는 것(롬 15:7)이 서로에 대한 동등함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받으신 것을 성경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고 그 이유에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요일 4:10-1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로마서 15:7, 개역개정)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 4:10–11, 개역개정)

그렇다면, 이런 사랑에 기초한 삶을 사는 것이 어떤 삶일까요? 보다 구체적인 실제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비, 직원으로 살아가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 분을 섬기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골3:18-25)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시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나와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교회도 이런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요?!

골로새서 3:18–25 (NKRV)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출처: 다음영화

3. 구원을 향하여 : 샬롬을 꿈꾸다.

아프고 고통 받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일은 언제나 환영 할만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한다는 이사야 말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4:18–21, 개역개정)

이 말씀대로라면 82년생 김지영과 나는 여전히 아픔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지만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앞서 설명한 사랑의 원리로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아픔, 타인의 아픔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출처: 다음 영화 

주인공이 적절한 도움과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인공을 돕고자 하는 남편이나 시어머니 역시 아내이자 며느리인 김지영을 돕고 싶어 하면서도,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따라주기를 바랄뿐 정작 김지영이란 여인을 존재 자체로 봐주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아픈줄을 모르니 도움을 요청할수도 없고, 타인이 아픈줄은 알지만 내가 도움을 줄수 없거나 이건 그래도 안돼! 라는 것이 있기에 구원의 여정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여기에 우리 인생의 비극과 한계가 드러납니다.

이런 우리 인생에 소망이 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롬8:26). 하나님은 우리보고 알아서 잘 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길을 갈때(선악과를 따먹을 때나, 아벨을 죽일때 등등) 우리를 직접 제압하시지 않으시지만 그냥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찾아와 말을 거시고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변화만을 기다리지 않고, 우리가 유익하도록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고(사48:1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개역개정)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8:17, 개역개정)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은 여리고 성을 들어가시다가 구걸하던 맹인을 만나셨을때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눅18:35-43)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너는 맹인이니 눈을 뜨게 해주마..', '너는 구걸하는 자이니 돈을 많이 주마..', '너는 함께 사는 가족이 없어 보이니 예쁜 아내를 주마.. '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알아서 좋은 것으로 주겠다고 미리 정하지 않고, 그에게 원하는 것을 물어보시고 그가 원하는대로 보게 해주셨습니다. 더불어서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82년생 김지영을 만났다면 그렇게 다시 물으시지 않았을까요?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니?'

출처: 다음영화

구원은 단순히 고통 없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히 차별없는 삶이 아닙니다. 82년생 김지영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을 넘어서 '나 엄마 닮았나봐.. 예쁜 딸이 나왔어..' 말하는 것 같은 하나님이 형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본래  사람에게 주신..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주신) 샬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잃어버린 그 샬롬을 회복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니?'라고 물어볼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수는 없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공의 친정엄마가 말하는대로 '너 하고픈 거 해'라는 말을 듣는 것인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말하는대로 다 해줄수는 없겠지만, 그 소원 만큼은 알아주고 함께 머물러 주면 좋겠습니다.  

그 소원이 내 소원이 아닌 하나님이 심어두신 소원일지도 모르니까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개역개정)

오늘도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