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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

[외부기고] ‘샬롬’을 이루는 ‘체다카’적 복음전도

by 샬롬보금자리 2020. 4. 8.

샬롬나눔 두번째로 Gre Han 선교사의 글을 기고받아 나눕니다. 다니엘을 복음전도자의 모델로 제시하며 "교회 안으로"로 이끄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샬롬을 이 세상에 임하게 하는 복음전도를 강조한 글입니다. 종교적인 생활이 아닌 생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이들에게 격려와 통찰을 줄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합니다.

 

‘샬롬’을 이루는 ‘체다카’적 복음전도(다니엘서 4장을 중심으로)

 

1. 복음전도와 교회 안으로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 4:27 개역개정)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기독교 역사 가운데 복음 전도는 교회 공동체 가운데 아주 중요한 행위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한국뿐만 아니라 선교 현장에서 전도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복음이 활발히 전해지고 있다. 얼마전 COVID-19로 출현으로 인해 외출이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온라인을 통해서 ‘복음 전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의 복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때 끊어지지 않는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복음 전도는 무엇일까? 대부분 복음을 접한 회심자들은 이전의 종교와 관습을 버리고 교회 공동체로 나온 후 일정기간 시간이 되면 세례를 받으면 정식으로 성도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성도로서 선한 삶을 요구받게 된다. 이것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교회들안에서 볼수 있는 ‘복음 전도’의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한(?) 순서를 따르지 않은 ‘복음 전도’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는 편이다.

  필자는 10여년전부터 지금까지 한국과 해외에서 타문화권 사람들을 위해서 삶을 살고 있는 선교사다. 선교사는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복음 전도’의 목적으로 교회 공동체로부터 파송된 사람이다. ‘복음 전도’가 가장 중요한 임무 임에도 불구하고 난 늘 ‘복음 전도’는 ‘교회 안으로’만이 전도자의 목적 이며 사명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다. 과연 오직 ‘복음 전도=교회 안으로’만이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자의 삶일까? 물론 복음전도와 교회는 땔래야 땔수없는 관계임은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을 복음 전도로 결론짓기는 미심쩍다. 성경에 나타난 다니엘의 삶과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복음 전도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선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생활한 것을 볼때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수 없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음은 분명하다. 다니엘은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제국과 페르시아(바사)제국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적 위치에 있었음에도 단 한번도 자신의 신앙과 종교적관습을 전하려 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강권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니엘이 섬겼던 세명의 왕들(특별히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왕)도 각 장의 마지막 부분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4:35-37).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의 경배와 찬양은 자신들이 믿는 다른 신 들 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높은 신임을 인정하는 다신론자로서 표현한 것이었을 뿐이다. 비록 왕들 사이에 우리가 기대하는 진정한 회심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니엘은 전 일생을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그리고 제국의 왕들의 신하로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삶을 살았다. 또한 하나님은 다니엘과 그의 왕들을 통하여 온 천하에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셨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말과 사역을 통해서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다시 조명 해볼수 있지 않을까?!

2. 포로로 살아가는 전도자, 다니엘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왕하 20:18; 사 39:7)

  이사야의 예언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현실로 실현되었다. 다니엘(과 세 동료)은 바벨론 제국 ‘느부갓네살’왕을 가장 가까이서 시종 드는 환관으로 착출되었다. ‘느부갓네살’왕은 예비 환관으로 뽑힌 이들에게 어릴때부터 바벨론화된 신하가 되도록 3년동안 학문과 방언을 교육시켰다. 바벨론 문화에 서서히 동화 될 수 있도록 먹는 음식을 바꾸었으며(1:5), 창씨계명(1:6-7)을 하게 함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바벨론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키려 했다. 무엇보다 바벨론 음식을 먹게 한 후 정기적으로 왕의 앞에 서게 함으로 왕을 신으로 섬기게 했다. 하나님만 섬기는 유일신앙을 가지고 있는 다니엘은 이러한 바벨론식의 관습과 신앙은 공존할 수 없는 위기였을 법 하다. 어린 시절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 의해 포위되고, 공격을 당해 유린당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며(시 48:2 참조)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왕을 섬기며 살아야 했던 다니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일제 시대를 생각해보면 지식인들은 반대하며 투쟁하거나, 염세적인 태도로 우울해하고 더러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변절자로 삶의 영화를 꿈꾸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가지고 위기를 대면하고 자신이 섬겼던 왕들의 신임을 받으며 살았다. 왕의 진미 앞에서도(1:8-20), 금신 상 앞에서도(3:8-25), 그를 시기하는 관리들의 모함으로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기 앞에서도(6:1-17) 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지키며 위기를 극복하고 왕들의 신임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다니엘의 삶을 통해 오늘날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을 그려볼 수 있다. 자신의 조국과 신앙을 빼앗은 왕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에 거슬리지도 않으며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법을 그 땅에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 권위가 유대 공동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에도 심지어 적국에게도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그는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키려 하지 않았다. 위기가운데서도 세상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의 법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종교 유대교를 전하여 왕과 사람들을 유대교의 관습과 신앙을 따르는 일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지 않는 다신론 자들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하던 ‘전도자’와는 다른 새로운 모델이 된다.

3. 두려워하는 느부갓네살

  다니엘 1-4장은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꿈으로 시작해서 꿈으로 끝난다. 그는 바벨론 제국의 위대한 왕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 느부갓네살은 “느보여! 왕위를 지키소서!”, ‘느보여! 국경을 지키소서!(바이블렉스 사전- HIBD 재인용)”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에 왕국을 이끌어 가는 통치자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바벨 론 속국들 그리고 바벨론사람들에게도 잔인하고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제국의 위대한 통치자답게 자신의 힘을 늘 과시했다. 자신을 신으로 높여 금신상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절하게 하였고(3:5-6, 12) 절을 하지 않는 자들을 잔인하게 죽였다(3:19-23). 그리고 술사들이 자신의 꿈을 알아 맞추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한다 하여 죽이려 할 정도로 난폭한 왕이었다(2:1-12). 하지만, 그러한 절대 권력자라 할지라도 다니엘과 세친구는 어찌 할 수 없었다(2:19-45; 3:24-27).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다니 엘의 지혜와 말씀들. 그는 자신이 세운 제국의 쇠락을 전해 들어도 다니엘의 지혜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느부갓네살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왕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끝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찬양하는 유일신 신앙을 갖지 않았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했지만 자신을 위해 금신상을 만들고 술사들과 함께 했으며 자신의 권력에 취해 교만했다. 잠언 16:5-18은 “권력으로 교만해진 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마치 느부갓네살 왕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느부갓네살의 꿈 (출처:Logos bible software)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그에게 두려움이 찾아온다. 바로 꿈 때문이다(4:5). 꿈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에게 꿈은 두려움이었으며 번민이었다(4:5). 그는 그것을 꿈이 아닌 환상이라고 생각을 했다(the vision of my dream: 4:5[ESV]). 하지만, 그와 함께 한 술사 어느 누구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 꿈의 내용은 이러하다. “높고 큰 나무가 있는데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도 많아서 많은 새들이 깃들고 들짐승이 나무 아래에 있다. 하지만, 한 거룩한 자(거룩한 순찰자 a holy watcher: NRSV)가 내려와 명령을 하는데 그 위엄 있게 크고 아름답고 풍성한 나무가 잘려 나가게 하고 잎사귀가 떨어져 나가고 열매는 사라지며 짐승들을 그 나무 아래에서 떠나가게 한다.”(4:10-17). 술사들이 꿈을 해석하지 못하였지만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꿈에 대한 의미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 꿈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옛날과 달리 꿈을 해석하지 못 한 술사들을 벌하지 않고(2:10-12) 가만히 두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꿈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두려움을 느꼈다.

  현재 COVID-19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비슷한 두려움과 혼란을 보게 된다. 무엇인가 보긴 했는데,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기에 갖는 두려움이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는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전에 자신의 은밀한 꿈을 알아 맞히고 해석했던 ‘벨드사살(1:7)’이라고 이름한 다니엘을 불렀다 그는 다니엘에게 꿈을 해석하게 한다(4:18-19). 다니엘은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한 뒤에 왕의 요청에 따라 왕의 꿈 내용을 알려준다. “왕이여, 자라서 견고해진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또한 당신의 위대함이 더 자라서 하늘까지 당신의 통치는 땅 끝까지 닿았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순찰자가 나타나 명령하여 지극히 높으신 이의 뜻에 따라 그 나무가 베어지고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일곱때를 지날 것입니다. 그 해석은 이러하니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4:22-24)” 여기서 지극히 높은 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세상 왕의 권세가 아무리 높을지라도 그 왕을 세우고 폐하는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말한다. 권좌에 쫓겨난 왕은 짐승으로 전락할 것이다 (4:25). 그리고 그 왕권은 겸손한 자에게 옮겨질 것이다. 느부갓네살왕의 심판을 예고하는 메시지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작은 희망을 남겨둔다.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넘겨 두라!(4:26a)” 하나님의 남겨 두신 그루터기는 무엇인가? 느부갓네살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꿈을 해석하는 다니엘은 꿈에 근거하여 왕에서 조언한다(4:27). 이 부분은 특이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왕에게 꾸게 하신 꿈처럼 하신다면 이미 바꿀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일인데, 다니엘은 조언한다. 이것은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고치 면 그의 처참한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이대로 살고 이대로 고집한다면 하나님에 의해 폐위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고 주시는 분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해 갖는 두려움이 현실로 드러나는 심판 혹은 구원에 대한 전망은 우리 운명이 정해진 끝이 아니라 변화해야 할 시작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사람의 반응이 수반되어야 하며 합당하게 대응되어야 한다(참조. 겔 33:1-20). 

4.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COVID-19로 인해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샬롬을 얻을 수 있나? 알지 못하는 꿈으로 두려워하던 느부갓네살 왕에게 건넨 전도자 다니엘의 조언을 주목해보자.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4:27)

  이 말은 다니엘의 조언이다. “왕이여!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길 원합니다, 그러면 ‘샬롬’이 있을 것입니다” 왕은 다니엘의 조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의’로 번역된 아람어 ‘쯔드카’는, 히브리어 ‘체다카’와 같은 단어이다. 그리고 ‘죄를 사하다’로 옮겨진 단어는 ‘찢다, 부수어 버리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을 직역하면 “공의로 당신의 죄악을 부수어 버리소서.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풂으로 당신의 불의를 부수어 버리소서 그렇다면 ‘샬롬'이 있으실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다(김근주 역).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길 때 두려움에서 평안 즉 ‘샬롬’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했던 삶의 모습이다(사 1:17; 창 18:19; 시 97:2 등).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셨던 삶의 모습을 이방나라의 왕이며 이스라엘의 적국인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왕에게 ‘공의’와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을 조언 했다는 것은 이제까지 왕의 통치가 그러하지 않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삶과 국가에는 ‘샬롬’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정책은 절대 권력자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방나라에서도 아니 예루살렘의 적국에서도 공의와 긍휼함이 있기를 원하신다. 공의가 행해지고 가난한 자가 긍휼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주권 아래 이뤄지는 일이고,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샬롬’을 얻게 된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조언 했던 것이 바로 ‘공의’와 ‘긍휼함’이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은 ‘공의’와 ‘긍휼함’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며, 자신을 낮추게 하신 분을 하늘의 왕으로 찬양 했다(4:37).

  여기서 다니엘의 조언을 통해 전도자의 사역의 한 면을 볼 수 있다. 전도자는 기독교 공동체의 제도권 밖에 있는 대상이라도 그가 ‘공의’와 ‘긍휼함’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러한 사역을 이끄는 데는 전도자의 삶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의’로운 삶과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어떠한 영적인 말도 공허한 말일 뿐이다. 우리는 늘 ‘사역의 열매’에 집중한다. 그런데 사역 현장에서 열매의 많고 적음은 복음 전도를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숫자로 평가하곤 한다. 교회 안으로 사람을 이끄는 열심이 교회가 성장하도록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교회 안으로 모인 사람들의 숫자와는 별개로, 종교를 초월하여 나와 나의 이웃이 공의와 긍휼을 행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권 아래에서 ‘샬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전도자의 중요한 사명이다. 이것은 어쩌면 전도와 회심자의 숫자로 헤아리던 열매의 의미여야 할 것이다. 

  COVID-19로 인해 한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다. 한 명의 한국 교회의 성도로서 최근 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며 많은 위기감 그리고 상실감을 느낀다. 몇 주 동안 예배에 함께 하지 못한다 하여 실망하고 염려하는 모습을 보며 한국교회 신앙을 생각하게 된다. 세상 가운데 이기적인 교회의 모습들만 비취지는 것 같아 두렵다. 세상을 먼저 챙기고 이끌어야 할 교회가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만 챙기고 이끌려고 하는 것 같다. 언론에 비춰지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 마치 교회가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 같다. '샬롬’을 누리고 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 교회가 두려움과 염려의 시작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먼저 교회가 세상에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난 선교사다. 이슬람이 다수를 차지하는 중동에서 삶을 살아간다. 지금 이 시간도 나와 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쏟는다. 일주일에 많은 시간을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사용한다. 혹자는 나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 그 시간을 통해 예수님을 직접 전하라 한다. 한국어를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의 사명은 전도며 열매다. 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과 더불어 그들에게 예수님의 공의로우심과 가난한 자를 안으셨던 예수님의 긍휼하심이다. ‘교회 안으로’의 전도만이 목적이 되지 않는다. ‘공의’와 ‘긍휼’이 이 땅에서 나와 그리고 나의 이웃들과 ‘샬롬’ 을 지키는 방법이며 삶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자의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정 한 전도자의 삶은 ‘누구를 교회로’라는 원칙을 넘어 더욱 넓은 의미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참고문헌
김근주, “다니엘처럼. 낯선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이필찬, “요한계시록과 함께 읽는 다니엘서”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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