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_모음

총선을 지나 복음을 생각한다

by 샬롬보금자리 2020. 4. 16.

 

1. 총선은 끝났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끝났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 세상이 격리되고 사회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힘주던 중임에도 28년만에 최대 투표율을 보이며 집권 여당이 많은 의석수를 차지하는 결과를 냈습니다. 야당 대표는 결과가 윤곽을 드러내자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접전지를 놓고 논평들이 쏱아져 나왔습니다. 선거 결과는 마치 이 나라가 다시 동과 서로 나뉜듯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충청이나 수도권, 강원지역에서 절반 혹은 그 이상에서 여당이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제 주변에서는(주로 페이스북 친구들?) 이 결과를 두고 여당 지지자들은 승리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미래통합당과 대구 경북 지역, 강남 지역에 대해 안타까움 혹은 어리석다는 조롱까지도 보입니다. 그 가운데 있다보면 마치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이 득세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나라의 미래에 꽃피는 봄 날이 올까요? 총선은 끝났지만, 아직 우리의 일상은 더 나은 미래를 꿈으로만 그리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개학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수업을 불퉁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진정한 우리의 현실임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 총선을 통해 바라는,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은 어떤 삶일까요?

 

2. 대통령과 여당

  이번 선거를 두고 여당이 잘해서라기보다 대통령과 정부 덕을 보았다는 말을 합니다. 저 역시도 대통령을 생각하게 됩니다. 문재인 정부를 한마디로 평가하기에는 내 한계를 많이 벗어납니다. 하지만 복음을 고민하는 제가 보기에 이 정부에 대한 느낌, 아니 더 정확히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느낌은 겸손과 섬김, 사랑입니다. 북한문제나 미국, 일본, 중국을 대할 때, 세월호, 5.18 유가족들을 대할 때, 그의 말과 행동은 권력으로 군림하려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고립되고 배척되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주고 가슴을 내밀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직접 만난적이 없는데도 가까이에 있는 목사님 마냥 과묵하고 너그러우며 본인을 돌보기보다는 내어주기를 잘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조찬기도회나 부활절에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 문재인 정부가 마냥 다 잘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열심히 하고 있고 그 진정성과 방향만큼은 충분히 공감되고 응원해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행복은 아직도 채워지지 않았고, 반대자들과의 소통도 쉽지 않았고, 사회전반의 공의도 바로 서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야당이 공격의 포인트로 삼았던 것은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위기, 안보의 위협이었습니다. 물론 경제적 위기는 세계의 선진국들이 한결같이 겪고 있는 한계점입니다. 절대빈곤이 아닌 상대빈곤 느린 성장 속에서의 무한 경쟁이 만들어내는 위기감을 해소는 커녕 완화조차도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미국과 일본, 중국에 대해서도 위기를 너머 너머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평화와 공존의 연대, 상생의 모델이 되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지도 못했습니다. 분명히 선전하고 있는건 맞는데 이대로는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아쉬움은 여당과 그 책임을 같이 합니다. 의석수가 많아도 지혜롭게 일처리를 해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대통령처럼 정말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분들이 있는데, 반대자들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술수를 당해내지 못하는 것을 핑계하며 그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난장판이 되고, 배가 산으로 산으로 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정치를 정말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기는 야당이나 다르지 않기에 이런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총선은 어떤 분의 표현을 따라 여당이 잘해서 지지를 받은게 아니라 야당의 질낮은 행태에 대한 반사로 선택 받았다는 말이 공감됩니다.  

 

3. 복음이란 무엇일까?

  이번 총선을 보면서 다시 복음을 생각해봅니다. 먼저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보면 로마의 속국으로 종교적 자유를 빙자한 타협에 만족하던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나 개혁운동을 위해 갈릴리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예수천국당을 창당하지 않았으니, 이 세상의 정치와는 상관 없는 것일까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각 개인의 성향과 선택은 자유의 몫으로 두라고 배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후에는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이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는 제자로서 순종하는 삶으로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기를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하는 제자공동체가 산상수훈의 교훈을 삶으로 살며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역설적인 사랑과 자유의 삶을 외치고 약자와 소외받는 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정치도 그런 차원에서 그런 사람을 지지하면 되는 걸까요?

신학과 영성으로 판단하기

  유진 피터슨은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울이는 주의,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자 기울이는 노력'이고,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 계시하시는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영성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하나님이 내 일상(선거를 포함해서 코로나 19까지)에 간섭하시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투표하는 것, 그런 정치 참여를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안에서도 여당과 야당을 지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를 찾는 분들인데 다른 생각을 합니다. 역설적인 예이지만 그 양극단을 접하다보면, 각기 주장은 다른데 주장하는 태도는 동일한 것을 봅니다. "말이 안통한다.", "어떻게 기독교인이 그럴수 있느냐?", "성경 좀 보고 기도 해보라!", 좀 점잖으신 분들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냥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서 이야기 하지 왜 여기와서 딴지를 겁니까?", "저와는 생각이 다르시네요. 각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대로 하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로 어느 한쪽이 기울어져 있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옳고 그른 것으로 구분짓는 것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명백한 죄인(틀린)인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이를 근거로 바울은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 말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는 교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온전한 샬롬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하나됨(Harmony &. Union)

  좀 더 자세히 보면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수도권이라고 자기가 속한 지역의 정치적 성향을 따르는게 아닙니다. 그 숫자와 비율은 차이가 있지만 놀랍게도 여당을 지지하는 지역에도 야당을 지지하고, 야당의 텃밭인데 가뭄에 콩나듯 여당을 지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은 1등만 뽑기에 그 결과가 단편적이지만, 비례대표 순위를 보면 그래도 여당과 야당 어느편도 결코 무시할만한 숫자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 발생적으로 아니 좀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하나의 동일한 정당, 정치 노선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은 엄연히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고, 자유와 평등, 민주적인 것이 복음과 유사해 보이지만, 사실 그 경계를 넘어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는 복음을 침해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명령으로 뜻을 합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다수결로 적당히 힘겨루기를 하고 승자 독식의 결과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어설픈 논리를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복음은 막힌 담을 허물게 하고 서로 다른 우리가 기꺼이 서로를 사랑할수 있게 하고, 서로를 섬기게 합니다. 법과 규칙으로 강제하여 굴복시키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사람을 사랑하는 삶으로 자연스레 옮겨지게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며 서로 성장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유기체적으로 하나됨을 누리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협하는 것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파고 들어가보면, 우리는 내게 익숙한 것, 내가 추구하는 것을 복음으로 오해합니다. 이는 우상숭배입니다. 안타깝게도 나 자신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나 자신과는 구별되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 자라온 나 자신에 대한 본능적 사랑이 어른이 된 후에도 좀처럼 수정되기 어려움을 느낍니다. 선교사였던 폴 히버트는 '선교와 문화인류학'이란 책에서 사람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는데, 그는 복음은 문화에서 꽃피우지만, 그 문화 자체가 복음이 아니라는 점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선교의 관점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새로운 문화에 전달되는 과정에 있어서 3가지 차원으로 복음이 제시해야 한다고 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표현대로라면 신학과 영성이 문화를 이루고 있는 인식적 차원(지식적인 앎), 감성적 차원(정서적인 수용), 평가적 차원(가치)에 맞게 구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총선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복음은 어느 정당의 승리나 어느 악인들의 멸망이 아닙니다. 경제 위기나 코로나 19의 해결하고 전세계 일등 국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안에 자기 중심적인 한계, 주변의 영향을 받아 동화되는 한계들을 통해 만들어진. 가치관과 지지하는 정치적 성향을 진실하게 주체적으로 행사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원했는지,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를 보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사랑으로 정비하는 것이 복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즘에서 꿈틀대는 비난과 조롱, 멸시나 원망이 압도하지 않도록, 그 반대편에서 억울하고 외롭지 않도록 돌봄의 자세로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뭐라 하실까

  좀 어설픈 상상이지만 선거 이후에 어느 정당을 지지하든, 어느 국회의원이든지 예수님 앞에 진실하게 기도를 한다면, 예수님께서 뭐라 하실까요? 너는 이것은 잘했고, 저것은 잘못했다고 분명히 심판하실 분이지만 그렇게만 결론지어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맘대로 안되서 속상한 사람에게 그 상한 마음을 조용히 끌어 안아 주시고. 정신을 차린뒤에는 진정한 구원, 진정한 복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함으로 위로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뜻대로 되어 기뻐하는 자에게는 그 기쁨을 허락하시되 그 일이 단순한 나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어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이야~ 천국이다'라고 말할 것처럼. 사람 사는 세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섬기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겠지요.

 

4. 아쉬움 그리고 바램

이렇게 복음을 그려보면 어느 정당의 승리이냐를 떠나 여운이 남는 아쉬웠던 점은 이렇습니다.

  먼저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그렇게 힘겹게 통과시켜놓고 미래 통합당이 반칙을 하니 어쩔수 없이 더불어민주당도 응수한 결과 양당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원하는대로 되었으니 이제 그렇게 모은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주목하게 됩니다. 결국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세상의 논리(힘의 세계관) 아래서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어떻게 믿을 것인지, 부활이 악에 대한 힘의 승리가 아닌 것을 어떻게 현실의 삶으로 끌어 안고 살아야 할지도 어려운 과제로 고민을 깊어지게 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와 다양성은 필연적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우리 삶은 실제로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구심도 남습니다. 더불어 민주당이 모색한 정의당에 대한 연대의 가능성을 정의당은 지혜롭게 더 대화하고 현실적인 대안들을 만들어낼수는 없었을까 싶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후보들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차정식 교수가 그의 페이스북에서 "호남 지역구에서 미통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거나 못했다. 또 출마한 지역구 미통당 후보 면면을 보면 그 지역에서나 전국적으로 신망받거나 경쟁력을 갖춘 후보는 하나도 없었고 대체로 출마 자체에 의미를 두는" 행태를  꼬집었습니다. 하지만 제 기준에서는 호남 지역에 내세운 민주당 후보가 내세운 공약은 별로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터널을 뚫는 효과를 내가 이해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뭘하겠다는 건지 알수도 없는 번지르르한 말과 정말 우리 지역에 필요한 공약이라고 여겨지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진정성은 있는데 무엇을 위한 진정성인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희미하게 여겨져서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무소속 후보의 빼곡한 공약내용들에서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후로라도 함께 협력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말 정책 대결을 펼치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마지막으로는 아쉬움을 넘어 우려하는 점도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받은 공보에는 딱 한 정당만 보이스오버(시각 장애인들이 소리를 들을수 있는 QR코드)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약자에게 관심이 없구나 싶습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공보를 만든 곳은 한곳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저 다들 십년은 넘게 젊게 보이는 포토샵과 보기에 깔끔해 보이는 광택용지들에 현란함만 가득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볼때, 여당 역시 그동안 강자 중심, 힘 중심의 세계의 연속일 뿐은 아닌가 싶어 우려가 됩니다. 이런 우려에서 보면 이번 선거는 그냥 극우를 싫어하는 여당지지자들과 마냥 여당을 싫어하는 야당지지자들만 남은 것 같습니다. 여당과 야당이 일을 잘해서 지지를 받는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번 총선에서 제가 지지한 후보와 정당은 그닥 선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내가 소외되고 배제되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북한 문제부터 코로나 재난까지 애쓰고 수고하며 섬기려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가 함께, 사람답게, 사람으로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여당이 겸손과 섬김, 사랑의 태도로 성실을 넘어서는 창의성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창의성은 소통에서 비롯되고, 수직구조가 아닌 수평구조에서 발산되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야당 역시 자신들의 패착의 원인을 성찰적으로 분석하되, 단순한 선악구조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안보와 안정을 위한 노력들이 여당보다 더 건설적인 비판과 대안들을 내놓는 개혁과 성실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세바시, 1161회 [김은지] 재난 후 꼭 오는 트라우마 함께 이기고 성장하려면

  아직도 코로나 19로 온 세계가 함께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제 22명의 확진자만 있었고 그중에 11명은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 이라고 하니, 제법 국내는 소강상태에 접어드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168명이나 되는 사람이 완치 후 다시 확진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긴장을 늦추기는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사람들은 재난이 닥치면 희망을 찾지만, 재난이 끝나면 원망을 쏱아낸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는 투명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며 선전하고 있고, 세계에서 주목받음으로 인해 자부심을 주지만, 이런 허니문기가 끝나고 지독한 희생양 찾기가 찾아올 듯 합니다. 온 나라가 서로를 돌보며 함께 이 위기를 넘길수 있도록 정부와 여당 그리고 야당들이 자신들의 자리에서 위로와 회복을 위해 적극 힘써주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국민을 처리해야 할 문제거리가 아니라 사람으로, 작은 사람, 약한 사람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신경써주기를 기대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거대 여당이 탄생했으니 이제는 이 나라가 순수 악에 대한 착각을 벗어버리고 현실에서 악이 아닌 약자들을 돌아보며 그들을 배척하기보다 끌어안고 함께 웃을수 있도록 배려하는 이 나라가 되기를, 그런 봄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