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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복음으로 읽기(서평 및 정리)

음모론(3/4) 정말 그러한가?

by 샬롬보금자리 2020. 3. 28.

신세계 질서의 비밀, 복음으로 읽기


3. 정말 그러한가?

  이제는 이 책이 다루는 음모론의 한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짚어보겠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들은 그동안 살면서 한번쯤은 접해봤던 이야기입니다. 아마 지금까지 접해보지 않으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10년 내에 '어머, 이런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정말인가?' 하고 귀가 솔깃하는 순간을 만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음모론을 추종하는 분들은 이 음모론을 사실로 여깁니다. 그래서 아주 진지하고 영혼 사랑과 구원의 열정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음모론은 거짓뉴스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 내에도 이런 음모론 추종자들과 비슷하게 아주 진지하고 구원을 위해 극렬하게 반응하지만, 거짓 뉴스를 검증하지 못한데서 기인한 반응이라 카톡교가 아니냐고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전문가와 신학자들이 나서서 이 음모론에 대해 연구하고 진실을 밝혀도, 그들의 의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동원된 논리들을 반박하며 좀더 진화를 거듭하곤 합니다. 물론 이런 음모론 중에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있을수 있고 그 진위를 분별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음모론이나 거짓 뉴스를 접할때마다 느끼는 불안감은 정말 그러한지 사실을 확인(팩트체크)하기 버거운 경우에 생깁니다. 그대로 믿기도 애매하고, 안믿기도 찝찝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가지 방법으로, 음모론(혹은 거짓뉴스)들이 갖는 특징들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음모론의 특징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비추어 교정하면 다른 삶의 태도를 가질수 있습니다. 

이런 그림과 같은 상상을 많이 하지만 잘못된 성경관이다. (그림 출처: 구글검색)

3-1. 선과 악에 대한 오해, 순수 악에 대한 환상과 본질

 이 책에서 나타난 프리메이슨 300인 위원회 계획이나 일루미나티의 7대 목표를 보면, 소수의 엘리트로 여겨지는 특정 집단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고,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인간성을 말살하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며 악랄한 존재들이 됩니다. 동시에 그들에게는 어떤 선한 것도 기대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를 가리켜 순수 악이라 할수 있습니다. 순수 악은 선과 대항하는 개념으로 절대 악의 개념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를 빛과 어둠으로 바꾸어 혼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선과 악의 대립 구조는 많은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매우 보편적인 생각이며, 성경 안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개념입니다.(아래 성구 이외에도 많죠) 

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3-1-1. 순수 악이라는 환상

(1) 인간의 어두운 악의 한계

  하지만 현실 속에서 순수 악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순수 악은 내가 상상하는 환상입니다. 악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순수 악은 없습니다. 포스트모너니즘 시대에 극렬하게 드러난 것이 악 안에 있는 선, 선 안에 있는 악입니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치르고 휴전상태에 있기에, 이전에는 북한을 늑대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굶주려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이라거나, 그들이 행한 악을 부정하는게 아닙니다. 다만, 악을 행하는 이들 안에도 그들 나름의 이유와 선한 부분도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 안에도 악이 존재할수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안에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면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대표적으로 가족 안에서 무수히 경험합니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간에 서로 사랑하는게 분명한데도 어느 때에는 죽일듯이 미워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는 상대방이 잘못되었고 악의 편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더 성찰적인 경우에는 내가 잘못한 부분을 알아차리며 나의 악함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말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2) 사단의 본질적 악의 한계

  이런 논의를 좀더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도 악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악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선이신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적할수도 없습니다. 악은 언제나 선이신 하나님의 심판/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음모를 꾸미는 세력들이 사단에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악랄함을 꾸미고, 거짓으로 우리를 속이려고 한다고 해도, 그런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만물의 절대자이십니다. 사실, 그 악의 주체라고 할수 있는 사단도 본래는 하나님의 천사였다가 자기 자리를 떠난 자입니다(유다서 1:6). 이것이 무서워 보이는 사단의 악함의 한계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듯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로 구원과 회복을 이루십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등장하는 바로(애굽 왕,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박해함)나 하만(유대인을 말살하려다가 에스더와 모르드개에 의해서 실패함)은 분명히 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편에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순수 악, 절대 악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이나 에서를 비롯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민족도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지는 않았고, 문제가 많았지만 그들 역시도 순수 악, 절대 악이 아닙니다. 그들의 악함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훼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원죄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게 유혹한 뱀도 사단이 분명하지만, 그(뱀)도 본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의 일부였습니다(창 1:31, 3:1a). 또한 그는 자신의 악함으로 인간이 범죄하게 했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과 겨루어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뱀(사단)이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자와 후손입니다. 그마저도 여자의 후손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겨우 발꿈치를 상하게 할뿐입니다(창3:15). 사단도 순수 악, 절대 악이 아니라면, 사단의 사주를 받고 그에게 능력을 받는다고 의심받는 음모세력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3) 성경이 말하는 악

  도덕적인 악행이나 사람에 대한 억압, 종교적 혼합의 시도는 분명히 악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악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좋은 예물을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마냥 기뻐하고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암 5:21-22). 성경이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를 두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 우상숭배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악이고, 가인에게 죄를 피하라고, 죄값을 받으라고 하는데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악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하고 떠나는 것이 죄이며, 그 상태가 악입니다. 

 

3-1-2. 순수 악의 본질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앞선 논의에서 언급한 '순수 악'을 상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순수 악을 상상하는 배경에는 우리는 악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악하다는 실존적 상황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악을 다루는 정상적인 방법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이신 하나님 앞에 그리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는 세상, 내가 하나님이 되는 세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악을 다루기 위한 다른 방법으로 내게 들어온 악의 유혹과 무게를 순수 악에게로 투사시킵니다. 어쩌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악의 화신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대개는 타인에게 원인이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며 그를 순수 악으로 상정합니다. 이것이 제가 정의하는 '상상속에 존재하는 순수 악의 본질'입니다. (전자는 자기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것이고, 후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거부한 것입니다)

(1) 기독교의 악에 대한 반응

  실제로, 우리가 이미 보고 듣고 경험하는 삶에서 마주하는 악을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훌륭했던 목사님들이 노년에 추문에 휩싸이고, 건강한 교회로 알려졌던 교회가 부정과 비리로 얼룩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 기업, 집단, 국가가 한편에는 악을 온전히 밀어내지 못하고 끌어 안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 우리는 그들의 가식적인 모습, 이중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고, 분노하고 절규합니다. 이 지점에서 음모론을 추종하는 분들은 그런 모든 오류들을 프리매이슨과 연결지어 나, 우리 라는 정체성에서 벗겨내고 싶은 것이 이 음모론의 동기이자, 가상의 순수 악을 떠 올리는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꼭 음모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악을 저지른 그들이 원래 구원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보는 견해를 갖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 악으로 투사하는 것입니다.

(2) 성화의 과정에 경험하는 실존적 악

  하지만, 정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보면 우리 안에도 크고 작은 죄들이 끝없이 솟아나는 것을 마주하게 됩니다.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지만 여전히 걷어내어지지 않는 삶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선을 행한다고 해도  세상에 사는 동안, 어느 특정 순간을 기점으로 거룩한 완전체가 되지 않습니다. 성화가 이루어져 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화의 완성은 하나님 앞에서는  날에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고(딤전1:15), '바울이 스스로를 곤고한 자(롬7:24)'라고 절망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그를 순수 악에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며 알듯이, 죄를 짓기 원하지 않았지만 죄를 지었던 과거(또는 현재)에 대한 성찰적 자세에서 나오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우리가 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기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수 있고(요8:12),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은 개인이 아니라 너희, 팔복의 말씀을 듣는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소금과 빛으로 여기셨으니 그렇게 살라는 의미이지, 우리(인간) 자체로 소금이나 빛이라는 의미나 빛이나 소금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3)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51:17)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예배는 우리의 거룩함이 빛나는 예배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존적으로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상하고 통회하는 모습, 그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이 지점에서 복음이 선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실존적 악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안 짓는 자가 되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병든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 죄인에게 구원자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회복할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 피조물로 삼으셔서 새 삶을 살게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죄와 악을 거절하고 나와 세상을 개혁하려고 애쓰지만 여전히 그 안에서 고통하는 우리의 삶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며, 그 구원의 복음으로 샬롬을 누릴수 있습니다.

 

출처; Pixabay. Daniel Reche님의 이미지

 

3-2. 자유에 대한 혼란, 소중한 자유와 위험한 자유

  음모론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자유에 대한 혼란입니다. 먼저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세계단일정부가 들어서고, 666을 받게 해서 통제하거나 죽일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좀더 극단적으로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뇌를 당하거나 조정당하는 노예가 되는 것을 걱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유를 빼앗기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염려가 전혀 쓸데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인류 역사에 노예제도가 존재했었고, 오늘 날에는 노동력을 돈으로 환산하면서 노동력을 넘어서서 노동하는 주체로서의 사람을 기계처럼 이용하려는 시도들과 그에 대한 부당함이 충돌하며 갑질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한 이 세대의 인류는 점점 편리하고 부요한 삶을 살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기계나 시스템에 맡기고 의존적으로(수동적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그리하지 않고, 주로 자신이 신뢰하는 정부와 기업에게 그리 합니다. 때로는 훌륭한 목회자, 정치인, 기업가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하려고 하기도 하고 좋은 교회, 좋은 회사, 좋은 집안(?)에 맡기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를 상기해야 하며, 내 자유가 상실 되는 것을 분명히 염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음모론이 힘을 잃는 부분은 바로 이런 일련의 행동에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박탈 당하는지의 여부를 염두해야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유로이 선택할수 있고, 선택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원치 않는 경우에는 그 동일한 자유로 우리의 자유가 침해 받는 것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음모론자들은 이 부분이 그럴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점을 부각시키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의지가 들어간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3-2-1. 영적전쟁,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

 성경은 영적인 존재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 본문에서 말하는 바를 오해하면 김기동의 귀신론이나 세상에서 진리처럼 숭배되는 능력대결로서의 영적전쟁의 개념을 갖게 됩니다. (이는 다시 선악 세계관, 힘의 세계관과 맞물려서 왜곡되고 비틀어집니다) 하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점은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이 아니라 그 영적인 싸움이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는 '우리의 싸움'인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엡 6:12)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사단은 그 자체로 악해서 악한 일을 꾸미고 실행해서 홀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단은 인격(지정의)을 갖춘 악한 영으로 인간을 속이고 고소하고 두려워하게 함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복음을 차단합니다. 사단의 주요 전략은 속임과 고소 하는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 답게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속이거나 사실과 거짓을 교모히 섞어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고후11:14 광명의 천사로 가장함, 창 3:1-5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함, 계 12:10 참소/고소 하던자). 하나님과 대적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힘이나 성공을 추구하도록 유혹합니다. 

   선교현장(또는 일상에서도?)에서 종종 나타나는 귀신들림의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존재가 있음과 그 영향력을 분명히 확인하게 해줍니다. 상담분야에서도 정신병리와 귀신들림을 구분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고민은 바로 이미 구원받았다고 여겨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들이 귀신들림이 가능한가하는 지점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내림이 있어서 무당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TV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고, 목회자나 성도의 일탈이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것처럼 악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귀신 들림 역시, 우리가 상대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수 있는가?의 문제는 하나님과 사단의 힘 대결이 아니라, 유혹과 속임에 기초한 악한 영과 사랑과 신실하신 하나님 사이에서 내 안에서/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내가 어느 것을 선택할지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선택은 귀신들림까지도 누구를 주님으로 여기느냐의 문제, 통치권의 문제이며,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누적된 결과로 귀신의 영향, 악의 영향력 아래 있던지, 하나님의 샬롬 아래에 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와 연관된 근거로 뇌과학에서 언급되는 뇌 가소성(brain plasticity: 뇌 가소성이란 뇌가 외부의 자극, 경험, 학습에 의해 구조 기능적으로 변화하고 재조직화 되는 현상)을 들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음란물에 중독되거나, 점점 더 폭력적으로 되고, 우울감이 깊어지는 이유는 그런 선택을 반복한 것이 나를 그런 삶을 살게 한다고 설명할수도 있습니다. 

  GMTC(한국선교훈련원) 이태웅 박사가 소개한 "영적전쟁"에 따르면, "현대 신학의 흐름을 보면, 이전에는 주로 귀신 들림(Demon Possession, 귀신이 사로잡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귀신에게 영향을 받음(Demoniz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자라는 의미도(예, 마8:16), 귀신에게 사로잡혀 꼼짝할수 없는 상태인 것 같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해방되고 자유케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볼때, 귀신 들림은 그 영향 아래에 있던 상태라고 볼수 있다. 사단은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 감정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비롯해 전방위적으로 위협하거나 유혹한다. 조상의 죄, 개인의 죄, 과거의 충격(트라우마), 마귀의 활동에 부주의하게 참여함, 하나님의 섭리가 사단의 이런 활동의 근거가 된다"고 합니다. 

  이태웅 박사는 선교사들에게 귀신들림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는 '어떤 특정한 공식(기계적인 방식으로 몰아내는 의식, 기도문 같은 방법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됨을 분명히 하고 영적인 권위를 갖는 것'을 강조 했습니다. 동시에 어떤 특정한 기질이나 은사의 형태를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하며 그에 맞추려 하는 시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신 다양성을 헤아리며 선교지의 특수성, 개인의 차이를 창조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당부 했습니다. 

 

3-2-2. 내 삶의 주체성, 자유와 선택

  오늘날 사람들의 언어 표현을 보면 "XX가 나를 화나게 해!", "XX가 우리를 ~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는 내 자유와 선택이 박탈당한 상태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은 여전히 내가 선택할수 있고, 선택한 것을 두고 자신의 주체성을 빼앗긴 것으로 왜곡하는 표현입니다. 백소영 교수는 복음과 상황에 실린 [4차 산업혁명 시대, '4세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란 글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특징으로서 창조성, 주체성, 관계성을 꼽았습니다.(참고, [4차 산업혁명시대, 4세대 그리스도인의 소명(백소영)]을 읽고) 그녀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갖는 주체성에 주목한다면, 하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케 하시는(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자로서의 나/우리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할건지를 결정하면 됩니다. 

(1) 창조 때 주어진 자유

  성경 서두에 기록된 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우리에게 지상명령(창 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을 주셨습니다. 자신이 지은 세상을 보며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아담을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마 넘치는 기대로 그리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떤 특수한 일(사과나무를 심고, 그 뒤에 비료를 주고, 풀을 뽑아라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에게 주신 것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으라(창2:16)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또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그에게로 이끌어 오셔서,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부르는 것이 그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을 (내가 보기엔 못미더운) 인간에게 (과감히) 맡기셨고, 그 선택(이름)을 그대로(부르는대로 그 이름이 되도록) 되게 하셨습니다.(창 2:19)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 이외에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사랑의 지점이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자발적인 순종을 기대하며 제공한 자유였지만, 그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어길수 있는 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배척하라고 준 것은 아니지만, 그런 극단의 선택까지도 할수 있는 주체성을 허용하셨습니다)

(2) 위험한 자유를 품는 사랑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 자주 등장합니다. 찾아와서 말을 거시고, 자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알려주셨지만, 그들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나타나서 막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은 것을 두고 분해할때도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라고 알려주셨지만, 그가 들에서 아벨을 쳐죽이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그들이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형과 아버지를 속일 때에도(그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을게 분명하지만) 그들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편을 들며 구원으로 인도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현대 신학에 와서는 악을 허용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선하다는 개념을 용인하기 힘든 이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1,2차세계대전의 참혹함,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을 보며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악을 허용하여 우리가 고통당하도록 하는 하나님은 과연 선하신가?하는 의문) 하지만,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악을 택하고 행한 것은 사람이고, 그 악에게 고통당하는 순간에 누구보다 함께하시고 가슴 아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점을 간과할수록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허용하시며 기대하시는 것은 온전한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싫어도 까라면 까!'라는 식의 복종이 아니라 '사랑해서 구지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순종'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하나님의 통치이지만, 그 통치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통해 이루시려는 그분의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만의 고유한 권한이라 할수 있는 자유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자유는 소중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타인을 위협할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경험하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거함으로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위험한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다시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다시 그 자유를 우리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이 세상을 사랑하기를 기대하시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대로 음모론 세력이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일을 염려하는 것은 의미있으면서도 의미가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가지고 있고, 바른 선택, 온전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영의 유혹과 거짓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선택을 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된 본성(sinful nature)은 그럴수 없는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지만, 그럴 때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얻는 구원을 소망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좀 더 온전한 의미로 하나님과의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주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로 온전히 나의 행복과 세상의 행복이 어우러지는 천국, 하나님 나라를 만날수 있을 것입니다. 

salvation mountain @ 캘리포니아

3-3.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

  마지막으로 저자를 비롯한 음모론자들이 염려하는 것은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일루미나티, 뉴 에이지, 장미 십자회 같은 음모세력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노예화 하거나 통제하려고 해서 얻는 그들의 유익이 우리의 위협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일은 안타깝게도 음모세력의 진위 여부와 상관 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함몰된 독재자(혹은 그런류의 독선적인 사람)가 한 나라/기업/가정/교회를 장악할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염려를 뿌리칠 수 있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앞서 말한 우리의 자유, 소중한 자유가 이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개선하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저항을 선택하고 개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한번 저항한다고 바뀌지는 않지만, 분명히 이 세상은 그런 수많은 저항들과 개선의 노력들을 통해서 개선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처음에 완벽한 창조를 한 곳에서도 일어난 일이었고, 예수님이 재림하실때까지 각종 다양한 모습으로 반복될 일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악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세상,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세상을 살도록 우리의 자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음모론에 대한 염려를 상쇄할수 있는 다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 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함몰되어 사람들을 수단화 하는 이들이나,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모두 자신의 안전과 행복이라는 가치가 그 기저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음모론자들의 주장대로 보더라도 프리메이슨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는 자신들이 보기에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악한 존재로 의심할만한 신천지나 JMS, 통일교 같은 사이비 이단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들 나름대로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만족보다는 새로올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제시합니다. (결코 인류 보편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뜻과 다릅니다) 그 안에 거할수록 가정과 개인의 삶이 망가지는데도 그 망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도피적으로 일상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혼란과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현실을 회피하는 일부 기독교의 모습과도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3-3-1.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본능

  비록 이들의 행태가 건전하다고 보기 힘들지만,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바램 자체는 사실 모든 인류의 것입니다.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본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본래 하나님이 주셨던 낙원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안에서 온전함(샬롬)을 누릴수 있음을 바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온전한 생명(영생), 풍요로운 삶(성공, 건강, 타인과의 관계, 자존감)을 원하는 어리석은 현실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1) 철학, 이데올로기, 종교와 기독교

  ACTS(아세아 연합 신학대학교)의 안점식 교수는 이런 점을 주목하며 "종교와 문화는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이라고 합니다. 인생 가운데 만나는 고통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 희노애락,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설명하고 답을 찾다보니 종교가 나오고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안교수는 그런 관점에서 '삶의 문제에 대해 철학은 설명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변화시키려고 하고(행동적인 측면이 강조됨), 종교는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려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세계관으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세계관이 가장 중심에 있고, 그 세계관에서 기인한 가치체계가 형성되어서 사람의 사고를 결정하고, 그 가치체계에 따라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철학과 이데올로기, 종교는 모두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지만 결국 세계관의 틀로 그 진리됨의 가치를 비교할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안교수는 그런면에서 고등종교들은 나름의 깊이 있는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나름의 구원을 제시하지만, 기독교의 세계관의 독특함, 탁월함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 흰두교, 불교 같은 종교는 의식을 강조하고, 유대교, 이슬람, 유교는 질서를 강조하는데, 오직 기독교만이 관계를 강조 합니다. 
> 흰두교는 자신을 신이라고 하고, 불교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하는데, 기독교는 성령이 '나'와 함께 합니다(현실의 나를 고스란히 인정함).
> 기독교는 타 종교와 다르게 고통을 부정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며,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그 외의 죄)를 하나님과의 질서를 깨뜨린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깨뜨린 것으로 바라봅니다. 
> 성경은 질서를 정하는 계약이 아니라 관계를 설정하는 언약을 말합니다. 
> 기독교는 주인이 누구인가가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만 되고, 주인 안될수는 없습니다. 
> 유일신 종교(유대교, 이슬람, 기타 타종교)는 성육신 모델을 가지고 있는데,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성육신은 대속을 위해 오셨다는 점에 있어서 독특합니다. 
> 모든 종교가 자신의 체계(세계관)을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그 가르침이 아니라 십자가가 중심에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산상수훈만 있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비교종교학 강의 내용 중)

(2) 우리의 모습(현실 기독교)와 진리의 가능성

  기독교의 이런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모습, 기독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교수의 평가에 따르면 19세기는 행동양식을 전달하는데 치중하는 선교를 했다고 합니다. 병원과 학교를 짓고 자기와 유사한 교회를 짓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20세기에 대해서는 가치체계, 교리를 전하는 선교를 했다고 보는데, 이런 모습이 '예수님이 구원이라고는 알면서도 삶에서는 변화가 없는 신자'를 양산하는 원인으로 진단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는 씁쓸한 단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 예로,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예배 자제 권고에 대해 종교탄압을 염려하는 분들을 보면, 표면적 행동양식을 기준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새물결플러스 & 아카데미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기독교 진리의 탁월함"입니다. 음모론 세력이든지, 세상 정치가든지 자신의 행복을 바라며, 더 나은 세상,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이 안전한 세상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눌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지,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각자가 설명하고 정말 그러한가 서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신천지처럼 속이고 관계로 유혹하는 왜곡된 방법이 아니라, 빛가운데 행하는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고, 우리가 알고 믿는 기독교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초대하며 함께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자는 것입니다. 그럴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 현실, 하나님의 세계

  지금까지는 음모론자들을 비롯해서 세상이 만들려는 새로운 세상, 신세계 질서는 현재 느끼는 한계, 나에게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을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소망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그 이면에서 놓쳐버린 것들을 주목할까 합니다. 바로 현실이 하나님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온 만물이 타락하였고, 회복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롬 8:18-19).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고,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 속되다고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 14:14, 17)  무엇을 하고 안하고, 무엇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이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행동 하나에 기초하는 (A를 하면 B가 되는 기계적인 결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는 새상을 개선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주체성, 자유로 지속할 일이지만, 그것이 복음과는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있는 죄와 악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억제하고 개선하기 위해 세상 법 조항을 바꾸고, 교단 법을 제정하는 일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고 우리가 계속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뒤에도 여전히 새로운 형태로 우리의 죄와 악이 드러날 것입니다. 믿는 자의 성화처럼 이 세상 역시 온전함을 다 회복하는 일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앞서 말한대로) '기독교는 고통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 입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 복음의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인이라 여김받으며 샬롬을 누리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유진 피터슨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라는 책에서 제러드 맨리 홉킨스의 소네트(14행 시 As kingsfishers catch fire)의 마지막 행을 기독교적 삶의 모든 세세한 면모를 들추어 내기 위한 은유적 이미지로 사용해서 영성을 설명 합니다.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영성신학이란 '우리 삶을 사려깊게 그리고 순종 가운데 일궈가는 것', ' 우리 삶이, 성부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로서의 삶, 성자 하나님을 따라 걷는 희생 제사로서의 삶, 성령 하나님의 공동체를 포옹하는, 또 그 공동체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사랑으로서의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창조와 역사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가 놀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뛰어난 솜씨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놀이한다는 것은 제목에 나온 play를 번역한 것입니다. 다르게 번역하자면 활동하신다 정도로 해도 무난할 듯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현실을 긍정하고 즐겁게 바라보도록 놀이라 번역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를 잘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놀이는 창조때부터 인간과 함께 하도록 계획되었고, 역사 속에서 함께 했으며, 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4) 기독교적 삶, 전치사적 참여

  이런 현실에 대한 긍정의 진정한 의미는 '긍정의 힘' 같은 낙관론과 자기 암시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긍정적인 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할수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어떤 절망적이고 위험해보이고 의심스러운 상황도 예수 그리스도를 막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 일은 우리와 무관하게 저절로 일어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 받고 성령안에서 새로워진 사람이 자신의 자유로 선택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유진 피터슨의 표현을 조금 더 소개하는 것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며, 소위 '더 깊은 삶'을 계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적 삶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삶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다. 또한 우리는 그 행위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몇몇 전치사들을 통해 여기에 포함될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마 1:2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 2:20),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롬 8:31). 이 전치사들 - 함께(with), 안에(in), 위하여(for)-은 모두 연결짓고 관계짓는 강력한 단어들이지만, 그 어느것도 우리를 주어나 서술어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전치사구의 끄트머리 단어일 뿐이다. 
.....  우리가 기독교적 삶의 행위를 하도록 초대받고 명령 받은 것은 전치사적 참여(prepositional participation)다.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지어 주는, 또 하나님이 우리 안과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활동과 연결지어 주는 그 전치사들-함께, 안에, 위하는-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신일에 우리가 참여하는 방식과 수단의 문제일 뿐이다
(현실, 하나님의 세계, p.578)

 

   이쯤되면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음모세력들은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모든 좋은 것, 우리의 평범한 삶을 파괴할 것 같은 그들의 악함도 하나님 아래에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것 같지만, 실은 여전히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혹은 우리의 자유가 위험스럽지만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우리에게는 박해가 될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바로 우리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책

 


음모론/ 신세계 질서의 비밀, 복음으로 읽기

*목차*
1. 들어가는 말: 신세계 질서의 비밀과 기독교 
2. 신세계 질서의 비밀은 무엇인가?             
    2-1. 세상에 드러난 음모?
    2-2.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는 자는 누구인가?
    2-3. 신세계 질서의 구체적인 모습
3. 정말 그러한가?                                    이번 글 
    3-1. 선과 악에 대한 오해, 순수악에 대한 환상과 본질
    3-2. 자유에 대한 혼란, 소중한 자유와 위험한 자유
    3-3. 더 나은 삶을 향한 갈망,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본능
4.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                       다음 글 
    4-1. 이 책이 말하는 대처 방법, 바르게 읽기
    4-2. 그리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 사랑,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