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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 감상

죽음이 넘실대는 삶에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반도 (2020) 영화를 보고)

by 샬롬보금자리 2020. 11. 18.

 2020년 7월에 영화 '반도'가 상영되었습니다. 당시에 건너들은 풍월로 코로나 시대에 좀비물이 흥행한다던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엊그제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어서, 아이들이 잠든 뒤에 짬을 내어 보았습니다. 초반부 1/3 지점까지는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 영상 모두 수준급이었으나 후반부에 가서 현란한 화면 이면에 빈약한 스토리가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좀비물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죽음과 삶, 그 사이를 수놓는 구원과 복음에 대한 생각들을 이참에 정리해볼 만하다고 여겨졌다. 글의 성격상 영화의 내용이 노출됩니다. 영화를 꼭 보려는 분은 이 글을 나중에 읽으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 - 반도(2020, 연상호 감독)를 보고,

'죽음이 넘실대는 삶에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출처: 네이버 영화 "반도"

 

  나는 공포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좀비물들이 대개 B급 영화로 살점을 뜯어먹는 카니발리즘과 피와 내장기관이 드러나는 영화라는 편견이 있었기에, 이런 류의 영화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2017년에 처음으로 '워킹데드'라는 미드를 보았다. 미국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시절이어서 미국에서 핫하다는 이 드라마는 봐 두는 게 좋겠다 싶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보았다.

  그래도 사람 같이 생긴 좀비를 죽이는 것이나 좀비가 사람을 공격해서 사람들이 좀비로 변화되는 과정은 여전히 보기 거북했다. 하지만 워킹데드가 단순 좀비물로서 인기가 있는 게 아니라 현대 사회를 관통하고 사람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려내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소재로 설교도 한번 했었다. 그 뒤로 좀비가 나오는 영화들도 용기 내어 하나 둘 보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지금까지 본 것들은 "부산행"(2016, 연상호 감독)과 "서울역"(2016, 연상호 감독, 애니메이션), 킹덤(2020, 넷플릭스) 정도이지만, 좀비영화를 보면 복음이 더 또렷해지니 좋았다. 

1. 좀비물의 특징과 의미

  좀비물의 특징은 대략 이렇다. 좀비는 어느 날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혹은 실수나 음모에 의해서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살아난 뒤에는 이전의 인격은 상실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물어뜯고, 좀비에 물린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다가 죽고 좀비로 부활한다. 좀비는 같은 좀비는 공격하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만 공격한다. 세부적인 특징은 영화마다 설정이 다른데, '반도' 영화에서 등장하는 좀비는 소리와 빛에 반응하고 본능적인 수준에서의 달리기나 공격성을 띤다.

 

  이런 좀비물(좀비들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첫 번째로는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좀비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이다. 이 두려움은 영화 내에서는 아주 극명하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다. 좀비가 공격해올 때 좀비를 죽이거나 피해야 한다. 좀비에게 붙잡혀서 물리면 치료 약이 없다. 불가항력적으로 죽음에 이른다. 어린이나 성인, 노인을 구별하지 않고, 남녀도 구별하지 않는다. 이런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실 속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영화 속 세상이 현실 속 나의 이야기, 내 가족, 내 이웃, 내 교회, 내 나라의 이야기가 된다.

  좀비물이 흥미로운 또 한 가지 이유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죽음과 두려움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안전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현대사회는 물론이고 과거 인류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타인의 배제가 나의 안전, 우리의 안전과 연결되어 있음을 좀비물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모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은 위험하다. 좀비 시대, 좀비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가족이나 연인이라도 좀비에게 물린 사람을 살리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분명히 한다.

 

2. '반도'에서 그리는 좀비 시대의 보편, 두려움과 비인격성

반복되는 강한 자의 약자화

  이 영화에서 그리는 두려움의 실체는 기존의 좀비물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좀비 자체가 가지는 잠재적 위험과 실제적 위험을 모두 그리지만,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과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은 좀비만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험에 방치한다. 좀비가 불가항력적인 영역이라면, 사람은 의지가 담긴 영역이다. 좀비 때문에 시작된 일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주인공 한정석 대위(강동원)는 피난길에 "아이만이라도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이때는 그가 강자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이 미군 군함을 타고 일본으로 간다던 피난선은 홍콩으로 항로를 바꾸고, 그 이유는 미국 사령관만 알뿐 설명해주지 않는다. 소통을 시도해도 강자에 의해 음소거되고 약자화된다. 이렇게 지금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의 물음과 요청을 묵살한다.

 

갑작스러운 죽음들이 계속되는 세상

  그리고 영화 특성상 계속 나오는 죽는 사람들은 좀비 시대에는 누구나 의도치 않게 갑작스러운 죽음에 노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처음 등장하는 죽음은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그 죽음은 주인공 정석의 조카와 그 엄마(주인공의 누나)의 죽음이다. 좀비들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탄 피난선은 위기를 면하게 해 줄 것 같았지만, 그 안에서도 감염자가 나와서 주인공 가족이 죽는다. 아들이 좀비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정석의 누나)를 향해 "가야 돼 누나 지금 가야 돼!"를 외치며 손을 잡아끌지만, 의식이 없는 아들이 엄마를 붙잡자 이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좀비들의 공격에 스스로를 노출하며 죽는다. 죽고 사는 것을 너무나 찰나에 결정해야 할 때, 주인공은 살기로 결정했고 주인공의 누나는 죽기로 결심한다. 영화 속에서 이런 죽음은 반복된다. 정석의 매형 철민이나 사령관을 자처하는 김 노인(권해오)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다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죽음의 반대편의 죽음, 죽임도 있다. 산 사람끼리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혹은 짜증 나고 귀찮아서 상대방을 죽인다. 서 대위, 황 중사, 김이병의 죽음이 그렇다. 좀비가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아온 스트레스가 그런 극단적인 행동의 이유이겠거니 짐작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다. 살리려는 자도 죽고, 죽이려는 자도 죽는다. 이게 죽음이다. 모든 사람이 피해 갈 수 없는 하지만 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늘을 살게 하는 죽음의 괴력이다.

 

좀비를 피해 살아남았지만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한 세상

  영화가 보여주는 좀비 시대의 삶은 좀비를 피해 살아남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뻐할 수가 없다. 살아있지만 안정되지 않은 삶은 안전하지도 않고,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도 어쩌지 못한 트라우마로 정석과 매형 구철민(김도윤)은 분노와 미안함으로 서로를 괴롭게 한다. 그런 이들에게 갱단은 한반도에 남아있는 ‘달러가 담긴 트럭’을 가져와서 새 삶을 살라고 제안한다. 위험하고 어려운 일, 돈을 버는 일, 돈이 되는 일을 하는 이유(목적)와 방식은 영화 속이나 현실이나 동일하다. 돈이 되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 약자는 위험한 일, 어려운 일을 하고 강자는 그들의 수고를 통해 그 이익을 가진다. 이런 불공정해 보이는 과정은 "돈"으로 관객을 설득하고 이 세대를 관통한다. 영화 후반부에도 여전사로 등장하는 민정(이정현)이 "몇 년 동안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는데, 그깟 돈 몇 푼이면 되는 거라고?"라고 하며 돈으로 움직이는 세상을 꼬집는다. 

 

사람보다 돈이 중요한 세상

"어설프게 구하려다 일 망치지 마라"

  이 대사는  돈을 위해 주인공을 한반도로 보내는 깡패가 당부하는 좀비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이자 중요한 원칙이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 곧 좀비에게 죽을 것 같은 사람은 과감히 포기하라는 조언이다. 죽음에 무감각해지라는 주문이자 이전 세대에 통용되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와는 반대되는 상식이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실전 팁이다. 이미 주인공 정석은 그 상식대로 누나와 조카의 죽음은 어쩔 수 없었고 상식적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한다. 더 나서다가는 나까지 상처 입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죽어가는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나서지 말라는 것은 바쁘고 피곤한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룰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것을 좀처럼 돌이키지 못한다. 그 결과는 어떨까?!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듯이(감독이 그런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자가 되려던 사람, 돈을 가지고 사람답게 살아보려던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깡패도, 서 대위도, 매형 철민과 그 일행도) 그 과정에 악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상관이 없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한다.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한다. 돈이 생명을 줄 수 없고 삶을 어그러뜨릴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현대인은 돈을 사랑한다. 돈이 있어야 사람처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다고 유혹하고 설득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듯싶다.

 

사람을 오락의 대상으로 삼는 비인격 세상

  다른 좀비물처럼 '반도' 영화에서도 좀비를 죽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 '외모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에 대한 비인격적 대우는 마땅'하다. 그래서 나의 안전을 위해서,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은 잔인한 죽음, 무자비한 태도를 상식이라고 종용한다. 이  영화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좀비들을 오락거리로 삼는 장면을 보여준다. 단순히 좀비들을 오락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매개로 자신과 같은 사람, 살아있는 사람을 좀비 사이에 넣어서 오락거리로 삼는다.

  어느 사회나 그렇지만 좀비들 사이에서 생명을 걸고 타인의 오락거리가 되는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도태된 사람(약자, 공동체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자)이나 외부인이다. 영화라지만 이런 설정은 무척 끔찍한 상상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고대 로마시대 검투사들의 세계였다. 오늘날에는 UFC 같은 것이기도 하고, 로봇이나 외계 생명체가 아니라 사람 모양을 한 캐릭터를 총으로 쏴 죽이는 배틀 그라운드 같은 게임의 세계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한방에 사람의 정신을 잃게 하거나, 머리를 맞춰서 쓰러뜨리는 헤드샷을 훌륭한 플레이라고 칭송한다. 이런 양상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는 인격성을 혼미하게 한다. 이런 인격성의 상실은 미국의 총기난사 사건이나 경영자의 폭행(위디스크 양진호 대표 폭행사건 같은), 갑질(대한항공 땅콩 회항과 회장 부인의 갑질)과도 연장선 상에 있다. 이런 스포츠나 게임, 영화가 이런 현상의 유일한 원인이라기보다는 이런 비인격적인 태도가 사회에 만연해 있고, 그 폭행의 행위자들의 심리를 좀비물에서도 엿볼 수 있다는 말이다. 

  631부대에 사로잡힌 철민은 영문도 모른 채 좀비 놀이에 투입될 때  "어..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라고 한다. 위험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내 "야! 61번 빨리 안나가?!"라고 윽박지르며 총구를 겨누니 약자인 철민은 나갈 수밖에 없다. 좀비 놀이에 내모는 좀비 세상이 오늘날과 겹쳐 보인다. 뻔히 위험해 보이는 현장에 나가는 노동자들이 있다. 위험해서 나가면 안 되는 줄 아는데, 나갈 수밖에 없다. 겨우 살아 돌아오면 과자 몇 봉지 던져주며 사이좋게 나눠먹으라는 장면을 보니, 안 나가면 죽으니까(회사 잘리니까, 승진 누락될 테니까) 나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목숨 걸고 다녀와도 늘 부족한 삶을 살수 밖에 없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이런 세상은 좀비 시대이지 않나?!

 

3. 살림과 살아남, 생명과 삶

살아있는 사람

  이 영화에는 살아있는 사람,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먼저는 주인공이다. 보통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어려움을 겪지만 살아나서 이야기의 흥미를 더한다. 주인공 정석은 군인의 신분으로 구조선에 탈 수 있었다. 그는 군인으로서 국민을 지키고 구하는 대신 자기 가족을 구하는 일에 집중한다. 구조선 내에 감염자가 발생했음을 알았을 때 누나와 조카를 구하러 갔지만 좀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누나와 조카를 지키지 못했고, 살리지도 못했다. 죄책감으로 매형을 돌보려 하지만 매형을 위해 나선 돈 트럭 회수 작전에서 631부대의 방해로 자신의 목숨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는다. 중요한 것은 이 살아남은 주인공은 군인으로서의 지위와 힘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따라서 살아있는 사람인 주인공의 살아있음은 결국 살려냄에 의한 살아남이다.

 

살리는 사람

  주인공 정석을 살려내는 구원은 그보다 강해 보이는 슈퍼맨이 아니라 여자 어린이들에 의해 일어난다. 언니 황준이(이레)와 윤유진(이예원)은 영화 속에서 총 없이 장난감을 동원해서 주인공을 구원한다. 험난한 세상일수록 구원은 예기치 않던 곳에서 온다. 힘이 세상을 지킬 것 같고 돈이 세상을 바꿔놓을 것 같지만, 실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람이며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긍휼)이다. 힘이 없어서 죽고 돈이 없어서 죽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을 뿐 실은 사람이 사람을 살리지 않아서 사랑이 없어서 죽는 것이다. 이런 긍휼을 가지고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고 살리는 일은 어쩌면 영화에서처럼 순수한 어린이와 힘이 없으리라 여기는 여자가 할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그냥 좀비가 등장하는 오락 영화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는 사랑 이상의 은혜가 있었다. 감독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린 설정이겠지만 주인공을 구조한 어린 유진이는 영화 첫 부분에서 누나를 태우고 구조선으로 가던 정석에게 구원을 요청하던 여인의 아이다. 말하자면, 군인 정석은 자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던 유진이를 외면했는데, 그는 요청하지도 않은 구원을 그가 외면했던 이로부터 받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를 "은혜"라고 할법하다. 내가 하지 않은 일, 내가 그럴만하지 않은 선물을 받는 것, 값없이 받는 선물이 은혜이다. 은혜는 감사와 자원하는 헌신을 불러온다. 주인공 정석은 자신이 받은 긍휼과 은혜로 인해 꼭 그래야만 한다고 여겼던 '상식'을 내려놓고 이 아이들과 그들의 엄마 민정을 살리러 간다.

  현대 사회는 물론이고 기독교 안에서도 희미해지는 이 긍휼과 은혜는 여자와 어린아이에게서 기대해 봄직하다. 신약에서 교회는 헬라어로 여성형 명사이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으로, 교회는 그의 신부라고 한다. 게다가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도 하셨다. 힘이 있다고 자만하던 자가 구원하는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는 없다. 성경 속 위인들은 힘이 있는 자가 아니다. 방주를 만들어 세상을 구원한 노아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을 이끈 모세나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도 강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감당한 일들은 하나님과 가까웠기에(사이가 좋았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얻는 교회 됨, 어린아이 됨은 아닐까?!

  좀비가 들끓는 세상처럼 좀비를 살펴야 하고, 사람도 믿을만한지 아닌지 긴장해야 하는 것 같은 세상이지만, 이런 세상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이 사람을 보고 그 위기에 빠진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구하는 것, 값없이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저 사람을 살리는 것, 그저 내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부활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는 삶에 대해서 많은 종교가 사후 세계를 주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대표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기독교의 주요한 특징이다. 기독교는 성경을 근거로 죽음 이후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 사도신경에서도 성령에 대한 부분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한다. 천국에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는 삶을 산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으며, 모든 옛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계 21:4, 쉬운 성경]

  아이러니 하지만, 좀비 영화들 역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설정을 내포한다. 영화 내에서는 사람이 좀비의 공격을 받으면 고통스럽게 죽는데, 이후에 다시 살아난다. 게다가 좀비가 되고 나면 이들은 살아있을 때 느끼던 고통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좀비로 살아나면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을 느끼지 않고 눈물을 다시는 흘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 좀비가 살아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부활이 아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 영생은 좀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몸이 살아있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죽지 않고 오래도록 사는 삶, 좀비의 삶은 영생이라 부를만한 풍성한 생명력과 대조된다.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 영생은 "생명"에 관한 것, 영어로 Life라 부르는 삶,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얻고 누리고 풍성케 하는 생명에 관한 것이다. (나는 좀비의 살아남, 좀비의 삶을 "살아있음 없는 생명"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참 사람(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이 가진 생명이 무엇일까?!

 

생명, 삶, 사람

  성경은 생명의 기원을 하나님에게서 그 시작을 보여준다. 비록 하나님의 기원에 대해서는 스스로 있다(있었다, 있을 것이다)고 일축하지만,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 주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직접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결과 생령(living being, 살아있는 존재)이 되었다(창 2:7). 동물도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시고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지만 생기를 불어넣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단순히 하나님이 만든 존재 이상의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모양,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 바로 사람이다.

  이 사람의 생명은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강의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에 의해 연장 가능하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공급되는 생명이다. 스마트폰을 충전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소통되면 생명이 있지만, 꺾인 꽃처럼 하나님에게서 떠나 단절되면 당장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결국 시들어 죽게 될 유한한 삶, 죽음의 수렁에 빠진 삶이 된다.

  사람이 살아있음으로 하는 모든 행위는 본래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 기쁨은 내가 빠진 하나님만의 기쁨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자, 하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만족하는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가져가고, 하나님 때문에 관계를 맺게 된 친구에게 연인에게 자녀에게 그 기쁨을 공유하고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참 생명, 살아있음의 특징은 백소영 교수가 꼽은 하나님 형상이 내포하는 세 가지 특징(창조성, 주체성, 관계성)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그중에 하나만 살펴보자면, 창조성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언급할 때마다 회자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창조성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융합적 사고를 하는 것, 기존의 질서에 메이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주권을 다시 자신에게로 찾아오고 하나님과 이웃(나 아닌 타자)과 사랑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유롭게 자발적이고도 제한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살아있음 없는 생명, 631부대

  하지만 "살아있음 없는 생명"은 개인의 판단과 욕구를 금지하고 약속한 규칙에 의해 역할로 제한되어 존재한다. 자율성과 인격성 대신에 합리성과 효율성이 깃든 비인격화, 기계화가 상식이 된다. 이는 감각으로 인식하는 물질로 세상을 인식하는 유물론적인 사고와 연관되어 있고, 이는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좀비 사회, 좀비 시대에 잔뜩 새겨져 있는 현대 사회의 한 모습이다. 영화 속에서는 631부대가 그 실상을 보여준다. 본래 좀비 바이러스가 퍼질 때 민간인을 구출하던 부대였으나 4년 동안 아무도 구조하러 오지 않자, 이제는 괴물처럼 변한 군인들이다. 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총과 지력을 사용해 전술을 구사한다. 힘과 능력은 여전하지만 그 힘과 능력을 살리는 데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사용한다. 간간히 부대 밖에 나가서 음식물들을 찾아오고, 좀비들을 죽이는 것 이외에는 생산적인 활동이 없다. 그저 맛없는 꿀꿀이 죽을 운명처럼 받아먹든지, 오늘은 참치 캔 하나 먹어야겠다고 윽박지르며 웃고 떠드는 것이 전부이다. 

 

4. 죽음이 넘실대는 삶에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영화 속에서 죽음을 피하는 방법들을 찾아보면 흥미롭다. 우선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앞서 살펴보기는 그 최선에 돈이나 힘, 위험한 사람을 외면하는 것으로는 갑작스레 찾아오는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가장 치열한 생존은 주인공의 매형인 철민의 최선이다. 631부대에 잡혀가서 좀비 놀이의 오락거리가 되었지만 그는 좀비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도망가고 뿌리치며 좀비와 씨름한다. 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최선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하러 오는 주인공이 없었다면 좀비와 싸우다 자신도 좀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구원자가 필요하다. 외부에서 오는 구원자가 와서 구원해주어야 한다. 이런 구원의 도식은 영화의 엔딩에서도 선명하다. 좀비로 가득 찬 반도 밖에서 구원해줄 것 같았던 기대는 깡패들이 "돈 트럭"을 조건으로 내세운 구조선에 있다. "돈 트럭"을 가지고 오면 가져온 사람도 부자가 되게 해 주고, 반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탈출하게 해 줄 거라고 믿었던 돈 트럭은 빼앗겼다. (서 대위는 돈 트럭의 존재를 알린 부하도 죽이고 홀로 살겠다고 돈 트럭을 가지고 깡패들에게 갔지만, 그는 기대하던 구원 대신 죽임을 당한다. 돈을 나눠주지 않으려고 깡패들이 그를 죽인다)

  또 다른 외부에서 오는 구원은 헬기다. 구조 요청을 보내기 위해 배터리를 찾으며, 자신이 제인과 친하다고 했던 말이 마냥 헛소리 같았지만, 김 노인이 죽고 나서 그가 약속했던 헬기가 주인공과 어린이들을 구원하러 온다. 이 구원은 외부에서 온 구원일뿐더러, 사단장 김 노인과 새로 부임한 구조대 제인 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구원이다. 신뢰할만한 관계, 구해줄 수 있는 관계가 실제 구원으로 인도한다. 

  돈 트럭 타령하는 조건부 구원은 사실상 탐욕적이다. 이 세상의 탐욕이야 돈을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의 원동력이다. 인생의 질문을 다루는 종교들은 한결같이 돈을 멀리한다. 이단 사이비에서나 그런 조건들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탐욕에 물들면 조건들이 생긴다. 세례와 구원이 장사거리가 되고 성공과 행복이 거래의 대상이 되는 끔찍한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본래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그야말로 관계에서 구원이 시작되고 완성된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친구. 이 다양한 관계적 용어들이 복음과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실제화한다.

 

죽이는 죽음, 살리는 죽음

  영화 속에서는 구원이 필요한 상황과 구원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좀비와 좀비 때문에 이상해진 사람들이 죽이는, 그 죽음은 구원이 필요함을 드러냈다. 주인공 정석과 아이들은 좀비와 좀비 때문에 이상해진 사람들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정석과 아이들은 먼저 죽임 당한 이들의 희생을 통해 살아난다. 아이들의 엄마 민정도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좀비들을 자신에게로 모으며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죽음은 살리는 죽음, 살리려는 죽음이다. 성경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개인의 죄, 그들이 만들어놓은 구조적인 악에 의해 죽고 죽임 당한다. 그 엉겁의 죽음 그 안에서 동일하게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많은 이들을 살린다. 그렇게 죽음은 구원을 요청하고, 구원은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어온다.

 

사람 사는 세상, 함께하는 삶이 구원의 현실

  영화 말미에 김 노인은 죽으면서 아이들에게 "이 지옥에서 꼭 꺼내 주고 싶었는데.."라며 안타까워하고, 김 노인의 구조요청을 듣고 헬기를 타고 구조하러 온 제인은 돌아가는 헬기 속에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In a few hous, new world is waiting"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초의 구원자였던 어린 여자 아이, 준이는 "우리 가족이 같이 있었는데 왜 지옥이에요?!"라고 할아버지에게, 그리고 "제가 있는 세상도 나쁘지 않았어요 Where I knew wasn't bad either"라고 답한다.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 여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죽을 위기에서 구조받은 정석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이다. 마치 구원을 경험한 어린이들이 구원을 베푸는 것처럼 살려진 사람들이 살려낼 수 있는 세상이다. 알다시피 이 세상의 삶이 온전한 구원일 수는 없다. 좀비 같이 위험한 이웃이 가까이 있다면 긴장감을 내려놓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꼬마 아가씨들처럼 (하나님의) 가족과 함께 있는 곳은 지옥이 아니다. 천국이 신세계일 것은 분명하지만, 힘겨운 코로나 시대에도 내 눈에 보이는 사람과 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을 모른 척하지 않고 살리는 것을 상식으로 여기는 세상은 나쁘지 만은 않을 것 같다. 참 사람으로 '살아있음 있는 삶'을 살고 싶고, 사나 죽으나 함께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