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독서모임: 모여서 함께 읽기
여덟 번째 만남.
6월 15일 모임 이후로 한주(28일)를 쉬고, 2주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전주에는 코로나 19 환자가 한동안 없었는데, 28일 주간에, 그리고 이번 주에 연이어 한 명씩 환자가 발생해서 모임이 조심스러웠습니다. 한분 한분 의사를 묻고 의견을 종합해서 모일 수 있는 분들만 조촐하게 모였습니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반복될 텐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지난 번 모임은 후기를 별도로 정리하지 못했는데, 어제 모임으로 "일상, 부활을 살다"책이 끝났습니다. (짝짝짝~~~) 모두가 함께 모여서 책거리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한 권을 끝냈다는 게 기쁘고 의미가 있다 싶습니다. 첫 시간에 던졌던 질문, "부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들이 달라졌다는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고립된 자율성이나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형태가 아닌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이 독서모임에 대한 애정도 공감했고, 동시에 여전히 부활이 무엇인지, 부활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딱 집어내기가 모호하다는 솔직한 이야기도 꺼내놓았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부정과 유토피아에 대한 그리움을 아예 중단하고 없애기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결 우리 삶의 고통스러움, 엉크러진 것을 못마땅해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 혼자서 끙끙대거나 나는 못한다고 자책하지 않고 친구들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면 되겠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시간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읽은 분량 P.105-122
이번에 읽은 분량 p.123-141
나눔 1. (p.107-109)
- 사람들은 중요한 일일수록 당연히 능력과 전문성과 기술을 갖춘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려 한다. ....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우리가 알아야 할 것도 점점 더 많아져서 결국 스스로 감당할 일은 적어지고 다른 사람들(전문가)에게 의존할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p.107) : 이것 참 피부로 와닿는 지적이다. 자녀양육에 있어서 학교에 의존하게 된다. 학교가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학교에 안 가니 내가 어찌하지 못한다.
- 마귀에게는 바로 이때가 최적의 조건이다. 비전문가라는 말이 그저 무언가에 관한 객관적 지식이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 뿐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정체성까지도 규정하고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결국 수많은 전문가들이 찾아와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거나 심지어 대신 살아 주기까지 하는 전문가들의 시장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p.108) : 실제로 그러고 있다. 코칭의 의도는 그게 아니지만,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교회도 이런데 휩쓸려가는 게 아픈 현실이다.
- 결국 나는 내 영혼의 문제까지도 전문가에게 맡기게 된다. 직접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를 따라가는 일은 예수 전문가들을 따라가는 일로 대체된다. 그러다 보면 머지않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소비자의 습성을 체득하게 된다. 내가 필요로 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소비자가 된다. 비록 종교적인 소비자라지만 소비자라는 사실은 매한가지고, 수동적 태도를 가진 마비된 영혼이 되는 것이다. (p.108-109)
: 마비된 영혼이 된다는 말이 확 와닿는다.
: 내 삶을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 될 수 있다.(하나님의 형상의 특징 3가지/백소영 : 주체성, 창조성, 관계성) -> 그래서 알아야 한다. 알려고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겠다고 마음이 생길 때까지 도움이 필요하다. 마치 아이가 언제든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하면, 스스로 탐색하며 떠나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다. 다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지나치게 내 삶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점을 문제제기 하는 것이다.
나눔 2. 기독교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 (p.109-111)
- 마귀는 이런 문제에서 손쉽게 우리들을 다루고 있다. ... 그저 평신도라는 생각을 우리의 정체감 속에 슬쩍 밀어 넣기만 하면 된다.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기생충처럼 말이다. (p.109) : 충격적인 표현이지만 맞는 말이다.
-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상대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부적합하다고 여기는 것은 겸손한 것과 다르다.(p.109)
: 이는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는 자기 존재감으로 크게 운다.
- 진정한 영성 형성을 위해서는 잠자코 평신도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라는 식의 마귀의 부추김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삶 본연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회복하는 일이다.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 미덕과 순종, 모든 개인 관계, 서로 살을 맞대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일, 안식을 지키는 일,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고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에서 말이다. (p.110) :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하고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삶의 자부심, 자신감, 주인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은 문제다. 그런 면에서 QT와 PBS를 통해서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 우리는 매일 매일 온갖 구체적인 일을 통해 부활을 실천하는 일에 나서게 된다. 개인적인 삶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의 기적에 감탄하고, 식탁의 주인이 그리스도임을 확인하며, 우리 문화가 던지는 세속적 혹은 종교적 유혹(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삶에 대한 전체적이며 공동체적 응답을 방해하려는 것들)을 분별해내고, 세례를 통해 부여받은 정체성, 삼위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p.110-111)
: 부활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것(생명을 주시는 것)을 알고, 생명에 대해 주목하고 감탄하는 일, 그 경이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부활을 실천하는 것은 식탁의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한 주체성을 회복하고(책임도 포함된다), 공동체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다(나는 나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 가정, 교회 안에서 응답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나를 지키는 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눔 3. 샘물의 근원(p.111-113)
-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웃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한 사람만이 웃게 될 날이 오고 말것이다(p.111) : 오늘날 유튜브 먹방, 게임방송, 미우새 TV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그렇다.
- 예수의 부활은 모든 기독교 영성 형성에 핵심이 되는 사건이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이 사건의 무대를 우리 생각의 중심에 재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횡행하는 심리주의, 도피주의 혹은 전문가 의존주의처럼 우리 영혼 속의 목마른 사슴이 마셔야 할 시냇물(시 42:1)을 오염시키는 흐름들에 대항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바로 그 시냇물이다. 그리스도의 영혼이 필요로 하는 샘물의 근원인 것이다. (p.112)
: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다. 참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 예수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 대신 다른 것에 의존해서 살아나려고, 살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수님을 통해 다시 부어지는 생명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다스리는 삶을 살게 하는데, 심리주의, 도피주의, 전문가 의존주의는 우리를 소비자로 전락시키거나 문젯거리로 축소시킨다.
- 1장에서는, 영성형성을 설명이나 조작, 통제의 수준으로 축소하려는 경향(내가 다 알고 있다, 설명할 수 있다)에 대항해 부활의 경이로움을 말했고, 이를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지키자고 했다. 2장에서는 영성형성을 비밀스럽고 황홀하며 에로틱한 것으로 만들려는 경향(신비주의, 초월주의)에 대항해 부활의 식사, 곧 예수님이 주인 되는 식사를 말했다. 이를 주의 만찬이라는 토대 위에 설명했다. 이제 3장에서는 영성형성을 전문가에 의존하려는 것에 대해 평범한 친구들을 제시하려고 한다.(모두 평신도다) 이것은 거룩한 세례로 연결된다.(p.113) : 맥 정리*
나눔 4. 친구들과 함께(p.113-115)
- 영성형성은 전문가에게 의존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의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안이기도 하다. 영성 형성이란 본질적으로 친구들, 곧 대등한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13)
- 예수님의 부활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부활이란 서로 인격적으로 얽히는 법이 없는 불특정한 군중들 앞에서 일어나는 공연 같은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본시 긴밀한 인간관계의 그물 속에서 체험된다. 구체적인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부활이란 놀라고 당혹스러우며, 혼란스럽고 의문에 휩싸인, 심지어 고집스러운 의심에 가득 찬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모두는 부활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비인격적 덩어리가 아니라 인격적 관계에 근거한 사건인 것이다.(p.113) : 인격적인 관계에서 부활이 일어났다. 친구관계. 대등한 관계에서 영성이 형성된다는 것은 자발성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굴종이 아닌 순종, 사랑에 의한 헌신 같은 것 말이다.
나눔 5. 부활의 인식 과정(p.115-117)
- (엠마오 두 제자가 돌아와서 열한 제자에게 이야기할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두려워하고만 있었다) 이미 예수를 알아본 적이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 ... 부활은 직접 개입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 부활의 인식은 두 단계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선 그들은 .. 예수님이 육신을 가진 몸으로 생선을 받아 드시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 다음 ... 예수께서 성경의 계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 알게 되었다.(p.116-117)
: 직접 경험해야 하고, 성경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 설교 듣기만으로는 안된다. 역설적으로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나눔 6. 구체적인 증거(p.117-118)
- 그는(도마) 손에 잡을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한 것이다. (p.118) : 내 수준에 맞는 나의 정체성, 존재에 근거한 요구밖에 할 수 없다. 요구할 수 있다. 모르겠는데 눈치 보며 미루지 않는 진실함과 용기가 필요하다.
나눔 8. 예수의 부활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엮어 놓는다(p.118-120)
- 바울의 편지들은 부활에 관해서 모두 53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바울 서신에서 예수의 부활은 애초부터 복음을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리게 만들고 또 계속 역사해 가도록 하는 사건이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진술들은 대부분 예수의 부활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우리가 부활할 소망의 확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여섯 개의 부활 관련 구절들은 예수의 부활이 지금 현재 계속되는 우리의 영적 성장과 관련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롬 6:4,8:11, 엡 2:6, 빌 3:10, 골 2:12,3:1) 다시 말해,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의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p.119-120) : 부활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하고, 미래의 소망이 된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현재적 의미의 부활, 현재의 우리에게 영적 성장의 주요한 부분이다**
- 부활은 친구들 간의 유대를 형성해준다. 부활이 우리를 인도해 들어가는 곳은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는 공동체,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독자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없는 남자들, 여자들, 혹은 아이들의 공동체다. 하지만 이런 부활 공동체는 결코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모든 사람이 다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p.120) : 부활을 본 500 여형제 중에 떠난 이도 있었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정말 가정도 교회도 다 같지 않다. 하지만 부활이 일어나는 곳은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진 친구 공동체임은 틀림없다. 내가 그 삶을 살고 싶다.
나눔 9. 영적 엘리트는 없다(p.121-122)
- [1] 예수의 부활을 인식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일은 결코 개인적 체험이 아니다.
부활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일어난다. (제자들과의 만남, 오백여 형제들, 모든 사도들, 엠마오 2 제자)(p.121)
- 이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의 부활에 직접 참여하는 일이란 결코 전문적인 영적 엘리트를 만들어 내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부활에 숙련된 사람 혹은 부활 전문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영성의 무엇도 우월감이나 교만하게 허락할 수 없다.
- 예수의 부활이라는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어느 누구라도 부활 친구들의 공동체에 쉽게, 그리고 바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 사이에는 어떠한 계급도 특권층도 존재하지 않는다.
: 교회는 어떤가? 누가 특권층이 되는가? 목사? 장로나 권사, 집사 같은 직분자들? 기존 신자들? 부활을 경험하는가?!
나눔 10.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앎(p.123-124)
- [2] 예수의 부활에 의해 조성되는 삶이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차원을 두드러지게 한다.
부활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들 중에는 삼위일체, 곧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관한 언급이 두 차례 있다. ... 하나님은 본질상 관계적이며 친밀한 인격적 존재라는 증거가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 역시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방식 말고는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다. ... 부활에 근거한 영성 형성은 친밀하며 인격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다. (p.123-124)
: 삼위 하나님이 친밀하고 인격적인 존재라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하나님하고 친한 사이가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어야 할 것 같다. (비인격적인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나눔 11. 여러 이야기, 한 목소리(p.124-126)
- [3] 복음서 기자들의 부활 이야기와 바울 서신의 여섯 부활 본문들에서 부활은 우리 삶을 복음의 활력 속으로 이끌어, 영성형성에 필요한 힘과 특징을 부여한다. ... "우리로", "너희가" 등과 같이 바울이 사용하는 대명사는 한결같이 복수로 되어 있다.
나눔 12. 부활은 삶 그 자체(p.126-127)
- [4] 우리가 예수의 부활과 동일한 부활에 참여한다는 바울의 주장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있다. ...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부활에 의해 형성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분을 쳐다보거나 모방하거나 그분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음으로써 가능해진다. (p.126)
: 부활은 내가 바라보거나 본받거나 영향을 받아서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나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이 주는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 자체가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이지,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에 관한 어떤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 '엠퓌사오'(그(예수님)가 숨을 내쉰다)라는 동사는 창세기 2:7에서 사람의 형체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도록 하셨다고 말할 때 사용된 바로 그 단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하신 그 일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해주셨다. 성령을 불어넣으심으로 생명, 곧 부활의 생명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 창조나 부활 모두 매우 근본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창조가 단순히 아담이라는 흙덩이에 추가된 무엇이 아닌 것처럼, 부활은 인간의 삶 위에 덧붙여진 무엇이 아니다. 부활은 삶 그 자체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시고, 또 예수께서 불어넣으시는 우리의 현 존재, 그리고 거룩한 숨결인 성령에 의해 형성되는 우리 존재의 시작인 것이다.(p. 127)
: 숨을 내쉰다.(엠퓌사오)는 표현이 창조와 부활 때 하나님과 예수님에 의해서 아담과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사용된 것은 "창조"와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부활이 우리가 죽은 뒤에 나중에 덧붙여진 부록처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삶을 살게 하는 source, origin이다.
나눔 13. 부활의 친구들과 더불어(p.128-129)
-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은 "다른 이"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다른 이"는 결코 따뜻한 몸, 비인격적 통계나 역할, 기능, 혹은 필요로 축소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바로 이웃이다.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여기서는 친구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과 긴 대화를 나누실 때 부활을 통해 생겨나게 될 "새로운 차원의 친밀함"을 이야기하시며 소개한 단어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 (p.128)
: 고독한 자율성이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 하는 삶.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친구로서의 다른 이와 함께 부활을 경험하며 친밀감을 경험해야 한다는 말 같다.
- 정확히 말해 우정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다르다. ... 친구에 대해 꼭 "친밀한 느낌"을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함께하는 삶을 통해 서로의 동료애를 경험하고 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 연인관계와는 달리, 우정은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넓어지는 것을 반긴다. 여럿이 함께 모여 나누는 대화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할 때 생겨나는 활력을 즐긴다. ... 그래서 친구 관계에는 다분히 관조적 요소가 존재한다. 서로의 독특함을 충분히 느끼고, 나 자신 밖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넘어서는 실재로부터 흘러나오는 선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p. 129)
: 정말 그런 것 같다. 친구와 내가 똑같지 않고 서로 차이나는 부분도 많은데 좋고 편하다.
: 연인은 배타적 관계를 갖는다. 서로에게 연인이 되는 순간부터 다른 이성은 들어오면 안 된다. 그런데 우정은 함께 모여 나누는 대화나 활동은 자연스레 확장된다. Like 우리 독서모임 같다.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을 함께 바라본다.
나눔 14. 친구관계가 해체되고 있다.(p.129-131)
- "서로 안에 거하는 사람들"(C.S 루이스의 친구 찰스 윌리엄스가 쓴 표현) ...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자기 스스로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다 함께 참여하고 있는 부활의 영성 형성에 그 기초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곧 성육하신(하나님이요 인간이신)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여 관계를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것은 보다 일반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교회'나 '회중' 혹은 '공동체'와 같은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p.129)
: 서로 안에 거하는 사람들, 멋진 표현이다. 삼위일체가 생각난다.
: 여기서 말하는 (우정 같은?) 관계 형성이 자기의 어떠함에 의해 생겨난다고 여기지 않고, 다 함께 참여하는 부활의 영성에 기초가 있다고 믿는 것, 예수님, 부활의 생명이 우리 관계의 기초가 된다고 믿는 것...
-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이런 종류의 친구관계 혹은 동료 관계는 매우 강력한 공격의 대상이 된다. ...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설명하기 위해 온갖 역할과 범주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한다. 역기능, 자원, 소비자, 문제, 희생자, 내담자, 자산, 의무, 패배자, 승리자 등과 같은 비인격적 단어들이 우리의 대화를 채우기 시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친구관계의 가능성을 공격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 우리가 이처럼 모든 것을 비인간화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마다, 친구들 무리에 속한 존재로서 우리가 가진 핵심적 정체성은 침식당하게 된다.(p.130)
: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세상, 비인격화된 세상을 살고 있다. 구체적인 사람,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 보는 것,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 노통이 새롭게 보인다.
: 개그 프로그램이 사람을 비하하거나 놀리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불편했었다. 자기 비하하는 방식으로 웃기는 것도 자존감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 / 반대의견? 김재동 같은 경우는 자폭개그를 하는데 자존감이 높으니까 그렇게 웃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눔 15. 독자성의 추구는 치명적이다(p.131-132)
- 이런 공격(친구관계가 비인격적으로 해체되는) ...은 드러난 싸움이 아니다. ... 교묘하게 속이는 말이나 꾸며낸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좋은 일을 나쁜 방식으로 하거나 좋은 방법으로 나쁜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p.131)
: 이런 상황을 정리하고 바른 방법으로 바른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사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이런 공격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ㅠ.ㅠ
- 동전의 양면이라 할수 있는 자율성과 전문가 의존증이 함께 엉킨 문화는 이러한 해체를 야기하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 자율성의 문화는 독자성과 자기 충족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컴퓨터 같은 것이 하나씩 새로 생길 때마다 우리는 그만큼 확실하게 우리 삶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된다. 다른 사람들이 필요 없게 된다(p.131)
: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현대 문화에 있어서 자율성은 환영받는다. 하지만, 고립된 자율성은 분명 문제가 있다.
-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문화는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삶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단절시켜 버린다. ..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곧 지인이나 이웃, 가족과 같이 우리와 가장 많이 부대끼는 사람들은 점점 초라한 구경꾼이 되고 ... 우리 자신 또한 전문가들로부터 끊임없이 소비자나 희생자 취급을 받으며, 아무런 자존감도 없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 오늘날 마트에 가면 각종 냉동식품과 간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음식들로 넘쳐난다. 직접 씨를 뿌리고, 재배하고, 요리하는 법을 잊어가는 것 같다. 다시 해보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ㅠ.ㅠ 집에서 채소를 가꾸는 할머니에게 배우면 좋겠다.
나눔 16. 부활의 실천(p.132-134)
- 부활의 삶은 실천하는(practice) 것이다. ... 우리가 부활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것은 .. 친구들 무리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친밀한 임재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과 평범함을 조건으로 포괄적 의미의 기독교적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 바로 우리 가정과 일터의 일상적 삶 속에서 실천되는 부활의 영성인 것이다. (p.133)
-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나타나시고, 알려지시며, 또 우리로 하여금 그 부활 속에 참여하게 만드신다. ... 이 부활의 삶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분은 살아서 지금 여기 계신다. 부활을 실천한다는 것은 이것을 알아채고, 그 속에 들어가 거기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p.133)
: 부활의 삶을 실천하는 것은 일상에서, 현재의 삶을 부활하신 예수님과 사는 것이다. 나의 최선을 다하되, 그다음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는 것이다.
- 1장에서 우리는 휴식과 여가(책임과 필요로부터 벗어남)를 통해 우리 삶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우리가 하지 않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놀라게 되는)이 가장 우선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안식일 준수는 우리와 다른 무언가를 인식하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경이와 경배의 능력을 보존함으로써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 2장에서는 음식을 먹는 일이 우리 모두가 다 하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다(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일). 식사는 삶과 죽음,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가 희생적으로 교환되는 사건이다. (성찬. 4단게. 받으사(take), 축복하시고(bless, thank), 떼어(break), 주심(give)). 예수님의 사역에 식사가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주의 만찬은 일상적 삶 속에서 부활이라는 초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성례적 실천이 된다. 우리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희생적 교환 속에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을 촉진시켜준다. (p.134)
나눔 17. 거룩한 세례(p.134-135)
-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성호가 언급된 세 인격의 하나님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따라 불린다. 여기서 우리는 철저히 인격적인 존재가 된다. (p.134)
: 세례를 받을 때 기억하나? 세례는 어떤 의미로 기억되나?
: 하나님과 부활의 친구들(성도들) 사이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세례의 의미를 처음 접한다. 좋다.
- 부활의 삶을 실천하는 일, 곧 예수를 살리셨고 또 지금 우리를 살리시는 성령을 존중하는 삶은 이내 어려움에 봉착한다. [1] 어떤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삶을 움직이고 싶어 한다. [2]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옛 습관에 따라 전문가를 부르기도 한다. ... 우리들 대부분은 일정 부분에서 모두 이런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 이렇게 오래되고 문화 속에서 강화된 습관과 전제를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정말 현실이 그런 것 같다. 고립된 자율성과 전문가 의존성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라죽어가는 것 같다.
나눔 18.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공동체다(p.136-137)
-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문화가 보여주는 고립적 자율성과 전문가 의존증이라는 세력에 대항하여 우리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 사실 해답은 매우 분명하고 간단하다. 거룩한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가 받은 세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이 세례는 우리의 이름이 불리는 곳이며, 우리의 이름이 불리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공동체다.(p.136)
: 이름이 불리는 공동체! 대중 속에 묻혀 지나가는 교회, 예배가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만날 수 있는 공동체가 그리어진다.
- 세례는 부활 공동체가 핵심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서, 예수를 따르며 구하는 공동체 내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p.136) : 세례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자로) 확인된다.
- 세례는 우리가 부활의 친구들로서 살아가려 할 때, 거룩한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규정되고 또 그 역사하심에 포함된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려 할때,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핵심적 행위가 된다. (p.137) : 하나님 안에서 이름 불려지는 자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게 한다.
- 형제회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 전통에서 세례 의식은 부활을 통해 표현된다.(p.137)
: 성찬식과 더불어 세례는 기독교의 핵심을 담고 있는 전통이며, 영성 형성의 아주 중요한 표지가 된다.
나눔 19. 돌아서라! (p.138-139)
- 세례의식 속에는 두 가지 명령이 암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 이 명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것이 되려면 일생에 걸친 관심과 훈련이 요구된다. 바로 "회개하라"repent와 "따르라"follow라는 두 단어다. (p.138)
: 회개와 따름이라는 것을 다른 책에서(유진 피터슨, 현실 하나님의 세계) 자기 부인과 예수님을 따름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맥락인 것 같아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No"라고 말하는 자기 부인이 회개이다. 그다음에는 "Yes"라고 말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발적 순종의 따름이다. 여기에는 강요나 당연함이 없다. 흠모의 대상인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경험하고, 알면서 사랑하게 되어(?) 충성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의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당연한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기꺼이 결혼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 고난을 감내하는 자발적인 삶이다(십자가의 고난과 비길 수 있을까?!마는.. 현장에서 느끼는 당사자들의 곤욕스러움은 십자가 이상일 때가 있다)
- 그런데 복음의 말씀이 들려온다. 회개하라. 돌아서라. 너의 사고방식과 상상력의 방식을 바꾸라. 시끄러움, 오염, 혼란스러움, 비인간적 효율성, 기술이 부추기는 조급증,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가능해진 구경꾼의 자세, 공동체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자율성, 이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라(p.139)
: 이 목록들은 육아 때 경험하는 현상과 같다(!!!) 아이들은 시끄럽고, 자꾸 어지른다(우유를 먹지 않고 쏟는다), 육아는 정말 비인간적인 효율성을 보여준다(애가 크는데 몇 년이며.. 이걸 이렇게 키워야 하나? 그런 면에서는 반려견, 반려묘를 찾는 마음이 이해도 된다), 기술이 부추기는 조급증은.. 아이들 손에 들려있는 유튜브다. 어린이집과 학교에 있는 전문가들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부모는 구경꾼이 된다. 아이가 부모에게 스스로 하겠다고 혹은 부모가 아이에게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할 때 가정이라는 진정한 공동체의 의미는 축소된다. ㅠ.ㅠ
- 우리는 무언가를 우리 삶에 추가함으로써가 아니라 / 발광에 가까운 이기적 삶을 버리고, 문화적, 종교적 혼란을 털어내며, 우리가 보통 "세상, 육체, 마귀"라 칭하는 것들로부터 돌아섬으로써 부활의 삶을 증진시킨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 바쁘고, 스케줄도 너무 많다. 부활의 삶에서 우리의 동지가 되어야 할 교회조차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p.139)
: 우리는 정말 바쁘다. 교회도 바빴다. 코로나 19로 많이 버리고 멈추었다. 여기에 불안이 엄습하는 것 같다. 뭔가 해야 할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눔 20. 거부 뒤의 선택(p.139-141)
- 세례에 포함되어 있는 예수를 따르는 것은 거부(회개, 돌아섬) 뒤에 오는 선택이다. 우리는 자율적 삶을 포기하고 예수께 복종하는 삶을 선택한다. 우리는 시끄러운 자기주장의 소리를 버리고 조용히 말씀을 듣기로 선택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일하시는 것을 바라본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분과 함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낯선 곳, 낯선 사람에게로 다가간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와 동행하는 가운데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살아간다. 기도의 삶인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뒤를 따라 직선으로 행진하는 틀에 박힌 걸음이 아니다. 그분을 따르는 일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 내면화되고, 우리의 근육과 신경 속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오히려 느린 걸음의 산보와 같다. 그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p.140)
: 선택하는 것은 태초 때부터 우리에게, 나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다. 우리는 죄를 선택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 선택의 주권을 흔들어 놓는 것이 사탄의 시도이고, 무엇을 팔려고 하는 자들, 자신의 뜻대로 (영향력 아래로) 지배하려는 자들의 시도이다(일부는 정말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선택의 주권을 내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의 드물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수 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 사역자는 아니지만(사역자만 이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정말 이런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것을 경험하면 좌절하게 된다. 하지만 직선으로 행하는 틀에 박힌 걸음이 아니라 느린 걸음의 산보 같고.. 오랜 시간을 두고 내면화되는.. 근육과 신경 속으로 파고드는 기도라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
: 기도하는 일이 쉽지 않다. 선교를 다녀오면서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서 기대를 하는데도 선교사님들의 사역 소개와 기도 요청이 좀처럼 와 닿지 않을 때가 있다.
: 근육과 신경 속으로 파고드는 내면화... 그 기도가 하고 싶어 진다. 가정에서 육아를 위해서 부부가 같이 기도하는 게 좋은 것 같다.
- 기도는 우리가 스스로의 중심에서 벗어나 참된 중심에 응답하기 시작할 때 생겨난다. 이 중심은 예수님이다. 이 응답은 언제나 실제적인 것으로, 예수를 따르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다. ... 우리는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심을 깨닫는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그분을 따라가면서 부활의 친구들과 대화하는 법을 배운다. (p.140)
: 기도는 자기 부인과 주를 따름, 회개와 따름의 전형적인 통로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 세례란 스스로에게 베푸는 것이 아닌, 언제나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행해지는 무엇이기에, 부활의 삶은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넘어, 그리고 우리와 다르게 시작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자아 속으로 들어가며 그 자아가 된다. 부활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자아다.(p.141)
: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자아, 부활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자아... 고립된 자율성과 전문가 의존주의를 벗어난 자기 정체성.
: 직장이나 직급을 이름만큼이나 자기 정체성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세례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을 받아들이면 좋겠다.
- 우리의 삶은 세례를 통해, 그리고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알고 그 삶이 알려지듯이, 우리 또한 알고 또 알려진다.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 세례를 기억하라. (p.141)
: 앞에서, 안식일과 성찬을 다룬 것처럼 여기서는 세례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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