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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2020.07.27)- 청년팔이 사회(4)

by 샬롬보금자리 2020. 7. 28.

청년팔이 사회 4번째 독서모임

지난주에 모임을 했는데, 따로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바쁘기도 하고.. 나눈 대화가 다 기억나지도 않아서 ㅎㅎㅎ

하지만, 오늘이 "청년팔이 사회" 마지막 시간이었기에 꼬옥~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오늘은 p.133~ 끝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내용을 다 나누었습니다. 이를 위해 3장의 1-2과, 3-4과, 5-7과, 4장과 '나가며' 부분을 4명이서 나눠서 요약 및 발제를 했고, 유익한 토론을 했습니다.

청년팔이 사회 끝~~~~~~~*

*요약 1 (3장 1-2과) : 자유

3장. '청년세대' 담론, 이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청년’ 담론을 통해 청년들은 종종 배제되거나 타자화 됨으로 심하게는 ‘요즘 것들’ 이란 지칭으로 선입견이 조장되기도 한다. 

1. 청년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세대 사회학은 대개 세대를 구분할 때 출생 코호트를 기준으로 삼는다. 오늘날 세대적 관점에서 청년을 이해할 때 관건은 이들이 다른 세대와 비교해 어떤 변별성을 갖는지이다. 이 관점은 청년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평균을 핵심 단어로 보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세대는 기본적으로 다의적이고 모호한 개념이기에, 세대 개념 자체의 양가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때 더 나은 세대론 혹은 청년 담론이 가능하다. 청년이라는 특정한 나이 때, 생애주기, 사회 범주 자체에 대한 전형적인 상이 있는데 여기서는 2가지 이미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청년을 역사와 진보의 주체로 상정하는 방식, 한국사회에 오랜 기간 유지되었고 민족주의, 국가주의, 사회운동 등의 지식 및 담론 체계가 이 이미지를 지탱한다. 이렇게 청년층을 새로움과 미래에, 중장년층을 현재 내지는 과거에 대응시키는 세대 관념은 대립구도를 만든다.

[2] 청년을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이행기로 이해하는 방식, 이는 인구학, 청소년학, 최근 청년정책을 추진하는 주체들에 의해 생산된다. 한국사회에서 청년과 비청년의 경계는 꽤 오랫동안 모호하게 남겨져 있었다. (ex. 마을의 청년부, 교회의 청년부는 40대 이상이 흔하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만 19세(법상으로는 만 15세) 이후, 청소년기 직후를 청년으로 칭하는데, 청년기가 마무리되는 때를 몇 살로 정할지는 아직 논쟁 중이다. 

오늘날 청년은 더 이상 중장년층과 동등한 사회적 위치를 지닌 주체가 아니다. 오늘날 청년은 미성숙한 존재, 보호받아야 할 존재, 계도되어야 할 존재, 덜 자란 철없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미성숙함과 능력 없음은 청년의 속성이 아니라, 누군가 그들을 규정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정책 차원에서 청년은 주로 청소년기에서 성인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경제구조의 변동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 유예된 후기 청소년으로 간주된다. 반면 정치나 운동의 맥락에서는 문화 정치적 전략과 열망이 투사되어 있다. 청년이나 대학생을 여전히 사회변혁의 주체로 이해한다. 

 

2. '20대 투표율'의 신화

대학생 투표율 괴담 - 프랑스 대학생 투표율 83%, 대한민국 36%

> 비밀선거의 원칙상 선거인 명부에 기재되지 않은 직업/직군별 투표율은 산정할 방법이 없다. (대학생)
> 실제 투표율 숫자가 조작되었다. 프랑스 통계 경제 연구소, 2012년 프랑스 대선은 1차 2차 결선투표. 두 번 모두 투표한 유권자를 기준으로 청년(85-93년생) 투표율은 65퍼센트 내외. 두 번 중에 한 번만 참석한 사람도 있다. 2012년 한국 대통령 선거 20대 ㅍ투표율은 68.5% 전체보다는 자지만 17대 대선보다 20% 이상 상승한 것. 
> 프랑스의 젊은 층도 프랑스 전체 유권자의 투표율에 비해 낮은 투표율을 보임

젊은 층의 투표율이 왜 상대적으로 낮은가?
> 생애주기상 젊은 층은 선거에 참여할 만한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다.
> 젊은 층이 낡은 정치를 거부한다.
> /반대/ 투표율이 적어서  젊은 층이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정치나 선거 관련 의제가 세대주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20대 총선의 젊은 층 투표율에는 2가지 착시현상이 있다. [1] 20대 총선의 투표율은 19대 총선과 비교하면 5-8% 상승했지만, 6회 지방선거와 비교하면 다른 연령대보다 오히려 감소했다. [2] 투표율만 가지고 투표 성향이 선거 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할 수 없다. 투표율은 2030이 가장 크게 증가했지만, 고령화로 실제 인구는 60대 이상 장년층의 투표수 증가폭이 가장 크다. 투표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40대에서 더 높다.

2030 투표율은 다른 연령대에 비해 여전히 낮아서 이들에게 선거 패배의 책임이 언제든 전가될 수 있다. 악마화 하기 좋은 먹잇감이다. 세대 정치라는 외피를 입은 타자화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발제. 저자는 청년을 진보의 주체로 상정하거나, 청소년 후기로 대하는 사회분위기를 소개했다. 우리는 청년을 어떤 존재로 대하나?(자신의 이야기, 혹은 자신이 청년을 대하는 이야기를 들려달라)

- 청소년기 후기로서의 청년기를 보낸 것 같다.
- 사역자로서도 청년들을 어른으로 대하기보다는 좀 보호해줘야 한다고 느꼈었다. 
- 민족복음화, 성서한국 세계선교를 꿈꾸는 복음 청년기를 보냈다.

- 어른 흉내 내는 청년기를 보낸 것 같다.
- 정치 참여나 무엇인가를 변혁해야 하는 청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 어쨌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를 원하던 소년이었던 것 같다.
- 이제야 청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 같다. (청년은 꿈꾼 것을 이루고 시도해가는 시기)
- 신사의 품격, 장동건이 하던 말. 소년은 철들지 않는다. 나이 들어갈 뿐이다. - 그렇게 살고 싶었다. 

- 청년 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대학 때 학생이었다. 공부나 책 읽기를 왜 하지 못했을까 아쉽다. 어린 청년이었다.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기회를 가졌다면 더 꿈을 펼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요약 2 (3-4과) : 잔디

3. 학벌주의, 문제는 20대 대학생?

연세대 내에 서울 캠퍼스와 원주 캠퍼스, 수시와 정시 , 현역과 재수생, 입학성적 상위-하위학과를 구별 짓는 묵시적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고발성 기사가 나왔었다. 연세대 내에서 이에 대한 지적이 나왔고, 주변에서 대학생들의 이런 분위기를 지적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일부 대학생들의 문제로 특정할 수 있을까? 이 기사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학벌주의라는 구조적 현상의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학벌 카스트의 상위자들’을 성급히 가해자로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학벌주의가 심화되는 추세라면 그것은 세대적인 현상이 아니라 시대적인 현상이다. 

시대를 세대로 퉁치다

세대 개념 혹은 세대적 관점은 주로 사회 역사적인 변화, 변동에 대한 기대, 예상과 맞물려 등장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젊은 세대가 사회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는 연령대에 이르렀을 때 사회가 변한다고 본다. 이는 세대 변화가 시대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시대 변화가 세대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라면 초점을 시대에 맞춰야 한다. 시대 변화는 어떤 세대에게만 영향을 주고 어떤 세대는 비껴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 마음 놓고 비난할 대상

어떤 사회문제의 책임 소재를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사회적 힘은 항상 존재한다. 저출산-이기적 여성들 탓. 사회문제의 책임소재는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 다시 말해 귀책 받았을 때 반론을 펼칠 수 있는 충분한 담론적 무기를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 전가한다. (희생양 이론?)

 

4. 청년세대를 둘러싼 아무 말 대잔치

모든 단어 하나하나를 비판적으로 따져가며 읽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문제제기가 필요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 내용이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 대체로 넘어간다. 청년들, 젊은 층 혹은 세대 문제와 관련된 뉴스들 역시 그런 사각지대에서 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도 안 되는 것을 말이 되는 것처럼 뻔뻔하게 적어놓는 기적의 논리는 실로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깝다. 다음 4가지 예시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남자를 평가하는 척도가 외모 중심으로 바뀌었다. - 근거는 고정관념일 뿐 확인되지 않은 선입관들만으로도 글이 쓰이고 읽힌다. 
> 군대 자살률 증가의 원인을 신세대 장병의 문화적 특성에서 찾음 - 군내 안전사고가 감소함으로 사망원인 중에 자살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졌음, 세대주의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해소함. 
> 요즘 것들 리스트, 10대와 20대의 문화를 소개하면서 제목에 경악이나 충격을 달아 조회수 늘리기를 시도함. - 사실은 10대, 20대 순으로 범죄건수가 작다. 
> 대학생 독서량 기사 - 2015년 통계, 20대가 그나마 책을 읽는 집단. 연간 평균 독서량은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감소함.

청년들을 왜곡하고 타자화하는 보도와 사회 담론은 대부분 합리적 근거를 통해 반박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요즘 젊은것들’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바탕으로 생산된 근거 없는 지식들이 청년 관련 발화의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일의 원인을 엉뚱한 청년에게 돌림으로써 더 근본적인 문제를 은폐하거나 간과하는 상황이다. 그 결과 청년들이 받게 되는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불이익을 막아야 한다.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하는 주제와 관련된 통계 수치를 볼 때, 사람들은 그 산출과정을 잘 살피지 않는다. 

느낀 점.

- 학벌 문제를 대학생들의 문제로 여기거나, 범죄율이나 독서량에 대해서 사회가 저항할 수 없는 특정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모습이 정말 그렇구나 하고 와 닿았다.
- 정치인들이 애들처럼 싸우는 모습을 보면 쥐어박고 싶다. 그럴 수밖에 없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 191쪽 대학생 독서량에 대한 팩트체크가 흥미로웠다. 나도 책을 안 읽고, 내 주변도 비슷해서 맞는 줄 알고만 있었다. 
- 다른 예시들도, 정말 그랬나 싶어서 놀라웠다.
- 195페이지. "미래의 청년들을 위해서라도 지금껏 청년을 억압해온 '청년' 담론을 제대로 문제 삼아야 한다"는 말이 참 와 닿았다. 

- 175페이지, 사실은 학벌 문제인데 이것을 대학 문제로만 취급하며 나무라는 것이라는 문제제기가 크게 공감되었다. 

174페이지에서 저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은연중에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지 않은지를 성찰하는 윤리성은 중요하다. 이것은 모든 개인에게 필요한 삶의 덕목이다. '그 위치가 보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차별의 구조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은 차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차별에 연루되어 있다'는 엄기호의 지적은 그런 점에서 적확하다"라고 한다. 

발제. 당신은 차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차별에 연루되어 있다. 성찰하는 윤리성? 우리가 어디까지 성찰해야 할까?

- 피해자가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다시 성찰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문제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 문제가 되지 않는 데까지 성찰해야 할 것 같다. 문제가 된다면 다시 돌아보고 그다음 대응을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 이것 역시 기준의 문제인데, 쉽지 않은 것 같다. 

- 프랑스는 우리보다 차별이 없는 것 같다. 14년 전 오늘 영아살해 사건 뉴스를 들었는데, 프랑스인 베로니크가 자신의 아기를 낳아서 살해했는데 임신 거부증이라는 정신질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 사회가 이 여인을 대한점이 새로워 보였다. 베로니크가 죗값을 치른 뒤에 남편은 다시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맞이했고, 프랑스는 당시 사건을 크게 보도하고 영화화까지 했지만 개인의 사생활을 캐거나 비난하지는 않고 그냥 그 사건 자체만을 보도했다고 한다. 참 놀라웠다. 

www.nocutnews.co.kr/news/5383363

 

[탐정 손수호] "14년전 오늘, 서래마을 영아살해사건"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손수호(변호사) 탐정의 눈으로 사건을 들여다봅니다. 탐정 손수호. 우리 사회 관심을 모으고 있는 사건을

www.nocutnews.co.kr

 

*요약 3 (5-7과) : 용현

5. 3포 세대 파헤치기(1) : 누구의 포기이고, 누구의 위기인가?

한국 사회의 다양한 갈등구조가 ‘청년세대’ 담론을 통해 표출될 때, 그 담론은 청년층의 이익과는 관계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N포 세대 담론은 청년층 일반의 포기를 전제한 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으며, 청년을 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레토릭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청년 당사자들은 이와 같은 담론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감을 느낀다. 당사자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데도 혹은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는데도 그 행위를 포기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3포 세대가 감추는 것: 젠더와 계급

계급? 한국의 청년세대 담론은 역사적으로 엘리트 계층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970년대의 청년 문화론, 1980년대의 386세대론, 1990년대의 신세대론 모두 상위권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들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슷한 현상이 근래의 청년세대 담론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하층 계급 청년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지만, 청년들의 빈곤이 사회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명문대 대학생들이 졸업 후 취업하기 어려워진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젠더? N포 세대 담론과 관련해 청년의 위기 혹은 청년의 증상으로 운위 되는 현상들은 현대 사회의 표준화된 남성 생애 달성의 어려움을 담고 있다. 취업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뒤 결혼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은 근대 남성의 생애주기 모델이다. 

 

6. 3포 세대 파헤치기(2) : N포 세대론 어디서 멈췄나?

N포 세대 담론은 N에 해당하는 항목들을 정상적인 것으로, 그것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범화한다. 청년이라는 주체에게 특정한 행동 양식이나 생애주기적인 의무들을 부과하며 그것을 본질화한다. 나아가 특수한 정상성 규범을 바탕으로 사회제도와 구조로 재통합한다. N포 세대 담론에서 포기된 것, 즉 회복해야 한다고 상정되는 것들은 지극히 중산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규범이다.

오늘날 포기되는 연애는 다름 아닌 경제적 능력을 갖춘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소비주의적 연애다.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의 법적 결합이 아니다. 연애, 결혼, 출산에 대한 보수적 규범은 ‘경제력’ 외의 다른 분할선들을 통해서도 상징 폭력과 차별의 메커니즘을 재생산한(p.211). N포 세대 담론이 청년들에게 능동적인 주체가 될 것을 주문하지만, 이전 세대의 가치관이나 지배적 규범에 맞서 새로운 대안 문화를 형성하는 능동적/전략적 세대의 출현을  억제한다. 청년들이 포기했다는 내 집 마련은 애초 하층계급이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N포가 개인주의-능력주의를 만날 때

최근 청년들의 보수성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능력주의'와 '공정성'이다. 능력주의는 '개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으며, 다수가 자신에게 적합한 사회적 위치에 도달하고 적절히 보상받을 수 있다는 관념에 기초하는 사회 시스템'을 지칭한다. 이때 능력을 보유할 수 있는 개체 단위는 개인이며, 따라서 능력주의는 개인주의와 연결된 도덕적 이상이다. 이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공정성 개념은 “능력에 따라 보상을 얻는 것, 보상이 개인의 기여에 상응해야 공정하다”(형평 원칙)는 의미이다. 

'개인주의-능력주의'라는 도덕적 이상과 그것이 관철되지 않는 사회구조(혈연, 지연, 학연, 빽, 부모의 경제력 등 능력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요소들이 개인의 성취에 큰 영향을 줌) 사이에 놓인 청년들은 ‘한국에서 능력주의 원칙은 작동하지 않는다’ 거나 ‘불공정한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은 추상적인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구체적인 스펙'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능력주의 자체가 아니라 불공정한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물신화된 스펙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경향, 즉 ‘유사-능력주의’가 나타난다. 

N포 세대 담론과 청년들의 '개인주의-능력주의'가 만나면 연애, 결혼, 출산을 비롯한 기존의 규범들을 필수적인 생애 과업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는 개인의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선택의 폭은 각자가 가진 능력 혹은 노오력의 양과 성공 여부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산층적인) 연애, 결혼, 출산은 스펙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결혼식이나 아이 사진에 그들이 가진 능력이 전시되어 있다. 결국 N포 세대 담론은 기존 규범의 정상성을 해체하기보다는 그것을 획득하지 못하는 청년들을 연민함으로 오히려 청년들에게 다시 규범을 강제하게 된다. 

남성 1인 가장 핵가족 모델로 대표되는 근대적 젠더 관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여기에 입각한 남성성의 표준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청년(남성)'의 위기로 표상하는 것" 내지는 "청년 주체들의 '포기'에 주목하여 그들을 동정심의 대상으로 만드는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 과거의 규범에 따라 청년기의 생애 과업을 결정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준을 발명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7. 청년을 위한 언론은 없다. 

누가 담론을 장악하는가

세대 간 경제 불평등은 경제적 자원의 분배 문제가 세대주의와 만나 탄생한 문제틀이다.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연구를 통해서 그러한 문제의식을 기각해왔다. 사회 담론이 세대 간 경제 불평등에 관한 논의를 과장하고 있으며, 지나친 세대 갈등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원이 아닌 담론을 생산하고 유포할 수 있는 자원과 기반을 마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역량인 상징적 자원은 확실히 세대 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주로 40대와 50대에 해당하는 저널리스트들이 생산하는 ‘요즘 젊은것들’에 대한 매체 담론이 많다는 것이다.

발화 주체는 기성세대, 청년은 해석대상

최근의 청년세대 담론들은 청년 당사자가 아닌 기성세대에 의해 주로 생산된다. 청년세대 담론의 특이점은 발화 주체가 주로 전문가보다는 기성세대의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발화 주체인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요구하고 명령한다.(계도의 말 걸기) 또는 기성세대 발화자들은 청년세대에게 위로를 건네면서 동시에 기성세대가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사과의 말 걸기). 하지만 이 계도의 말 걸기와 사과의 말 걸기 모두 청년을 대상화하며, 청년세대의 행위자성, 그들 역시 실천의 주체라는 사실을 누락한다. 청년 세대의 특성을 병리화하며 청년들이 문제가 있다는 전제를 동일하게 유지한다. 

청년 논객의 사명

청년 논객은 언제나 청년 다움이 묻어나는 글을 요구받는다. 청년다운 글이란 무엇인가? 청년 논객이라는 명칭은 젊은 필자들을 있는 그대로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실상 그들을 상징적으로 평가절하하는 언어다. 이는 어떤 존재를 보편적인 것을 대표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며 자기 정체성과 일치하는 집단을 대표하도록 강요하는 일이다(p.226) 사회학자 너멀 퓨워에 따르면 사회의 상층부에 올라간 여성이나 흑인은 줄곧 그들의 내집단을 대표할 것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남성, 백인, 기성세대는 결코 그 내집단을 대표하도록 가용받지 않으며, 이들이 생산하는 담론은 그 자체로 보편성을 담지한다. 

불티나게 팔리는 청년

청년세대를 다루는 기사들은 관심의 표현이며 좋은 기사로 여겨지지만, 오히려 청년세대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세대주의를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 온갖 ‘요즘 젊은것들’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은 결국 기성세대다. 오늘날 청년세대는 그들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기성세대, 산업 경제 정치적 목적에서 의해 판매된다. 그 지식들은 청년세대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이익과도 괴리되어 있다. 청년 문제를 다루는 연구 및 정책 보고서, 대학내일 20대 연구소와 같은 소위 20대 전문 연구단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청년세대의 이익보다 다른 이들의 이익을 충족시키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P230)

느낀 점. 

- 5-7 과를 읽으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여성들이 갖는 의구심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시선을 달리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 저자의 시각은 참 불편하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줄곧 부정적인 방향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청년다운 글을 요구하는 것이 보편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라며 불평하고(p.226), 청년세대에 대한 관심을 청년들이 대상화시키고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로 매도한다(p.230) 이렇게만 본다면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매력과 동시에 한계를 다 드러낸 것과 다름이 없다.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제기는 언제나 참고할만하며 정말 그렇지는 않은지 성찰하도록 해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드러내는 적대감은 당혹스럽고 염려스럽다. 호의를 베푸는 것을 자신을 동정하는 것으로 매도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읽혀서이다. 그냥 보편으로서 사회적 주체로서 청년으로 살고 싶다는 말이겠다 싶다. 필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 누구도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을 온전히 대표할 수 없음을 기억한다면, 모든 청년들의 동의를 얻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청년들에 대한 관심 전부를 이렇게 매도하는 것은 지나치다. 많이 지나치다. 

발제. 내가 생각하는 청년들의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는지?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말 청년의 문제인지 세대 담론으로 인한 청년의 문제로 보이는 것인지 말해보자

- 청년들이 코로나 시대에도 나이트 가는 것? 코로나 파티를 즐기는 미국의 청년들?
- 코로나 시대에 안전불감증에 걸린 것처럼 유흥을 즐기는 청년들을 나무라는 시선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코로나 29번 환자는 청년이 아닌데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코로나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유흥업소 감염 사례를 보면 중년 남성 역시 유흥업소에 출입한 것을 보면, 이것은 비단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발제. p.207 "정체성은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 이 문장은 저자의 주요한 해석의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사회학적 접근이 갖는 시각으로 환경의 영향을 고려할 때 일정 부분 참고할만하다. 그러나 본질에서 만들어진 것도 있음도 놓쳐서는 안 된다. 성경은 본질에서 비롯된 정체성과 구조를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발제. p.211 "연애, 결혼, 출산에 대한 보수적 규범은 ‘경제력’ 외의 다른 분할선들을 통해서도 상징 폭력과 차별의 메커니즘을 재생산한다." 

- N포 세대 담론이 연애, 결혼, 출산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오히려 이를 강제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 것은 참 좋은 통찰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상징 폭력과 차별의 메커니즘의 재생산이라는 표현은 좀 과하다. 폭력이란 뜻은 억압을 의미하는데, 실제 억압으로 느끼는 상황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서술에서는 지나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폭력?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 넓은 뜻으로는 무기로 억누르는 힘을 이르기도 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요약 4 (4장, 나가며) : 대장

4장. 청년세대 담론 다시 쓰기 

이 책이 제기하는 핵심 비판은 기존 '청년세대' 담론을 구성하는 원리인 세대주의에 여러 가지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청년'이라는 정체성에 기초하지 않는 '탈-청년'의 문화정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청년'에 관해 말하는 모든 실천들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세대주의적 '청년' 담론을 비판할 수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할 자신은 없다. (청년운동이 지닌 힘과 잠재력이 있으니 이렇게 써보자.) 크게 2가지 측면에서 청년세대 다시 쓰기를 제안하고 싶다. 

[1] 특정 연령 코호트나 출생 코호트를 지칭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청년세대'를 정의하자.  
[2] 운동의 차원에서 '청년세대'라는 기호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해야 할지 생각해보자.(청년 당사자라는 표현의 불충분함) 

발제 1. p.238-243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모델'을 가지고 '청년-하기'라는 시각을 설명한다.(아래 요약 참고) 이런 시각이 최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해보자.  

요약: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은 주디스 버틀러가 제시한 젠더 수행성 모델로  잘 알려져 있다. 버틀러는 섹스는 생물학적, 자연적인 것이고 젠더는 문화적인 것이며 따라서 섹스가 젠더의 원이 된다는 이해를 거부한다. 그는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이며 오히려 섹스가 젠더, 즉 문화적인 것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성기의 형태에 대한 의학 지식이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객관적 근거로 여겨지지만, 그 지식 자체가 이미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의학적 기준이 단일하지 않으며 간성 intersex과 같이 남성 혹은 여성으로 성별을 판정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다수 존재한다.(전체 중에 그 확률은 미비하지 않나? 개별로는 존중하되 그것이 또 하나의 보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성별은 지극히 임의적인 기준에 의해 판별되며 여기서 의학적 기준이란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강제된 성별 이분법이 구현되는 일종의 장치에 가깝다. 

그렇다면 젠더는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버틀러는 젠더는 생물학적 성별에 의해 본질주의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언제나 행위”일뿐이라고 답한다. 젠더는 행위들의 축적을 통해 “시간을 두고 서서히 구성되는 정체성이며, 행위의 양식화된 반복에 의해 구성” 되는 것이다. 젠더는 사회화 과정의 결과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그들의 생물학적 본질이 발현된 결과가 아니라 그들이 젠더적으로 주체화된 결과이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분법적 젠더 각본을 인지하는 개인들은 스스로의 젠더를 통제하기 위해 일종의 ‘정체성 관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한다. 

젠더-하기 doing gender라는 개념은 젠더가 누군가에게 배당된 “성별 범주에 적합한 태도와 활동에 대한 규범적인 개념을 고려하여 위치 지어진 행동을 관리하는 활동이다( c.f 백인하기 doing whiteness, 인종 수행하기 performing race, 인종 수행성 race performativity) 규범의 반복 수행을 통해 구성되는 젠더 정체성 자체가 규범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즉 행위 주체성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젠더는 오늘은 남성이 되었다가 내일 여성이 되는 식의 온전히 자율적인 주체의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 사회학에서 이해하는 젠더 이슈가 참으로 낯설다.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사회환경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는 점을 볼 때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생각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거니와, 성경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스스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이 문화적 사회적 결과라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학문적 가설이다. 강제된 성별 이분법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폭력적 억압의 의심은 그 역사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 모두를 주체성을 가지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이는 남자나 여자라는 성을 가지고 있어도 여성성과 남성성을 추구하는 이들이 느꼈을 좌절감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서 본질적인 것이 없다는 말로 모든 제대로 기능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젠더 하기의 관점으로 청년 하기를 이해하는 것은 같은 한계를 갖는다. 청년 스스로 청년 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전부를 대변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하다고 기각하는 모습이나, 애정 어린 관심마저도 미숙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냐며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발제 2. 저자는 청년 개념을 부정하고 청년 당사자를 자처하는 운동에도 부정적 평가를 하며, 탈-청년 & 탈-세대 문화 정치를 이야기한다. 약자인 청년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청년을 대변해야 하고, 경제적 재분배에 매몰되서는 안 되며, 청년이 연령이 아닌 특정 가치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한다. 동시에, 청년 명함을 가지고 힘을 발휘하는 부분을 잘 활용하자고 하며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청년이 배제된 자들의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청년이란 무엇인가?, 청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인가?

-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제기는 새롭고 흥미로웠다. 팩트체크를 통해 실제 청년문제로 호도되는 전반적인 윤곽을 이해할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청년은 그만의 독특한 개념인 것 같다. 이미 작동하고 있는 청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청년이 맞다. 다소 모호하고 그 의미를 청년 전체로 상정할수는 없지만 분명히 20대 30대라는 나이와 대학생, 군인, 취업준비생 혹은 젊음을 상징하는 삶의 자리에 있는 그 사람을 청년이라고 생각한다. 청년으로 사는 것은 사회적으로요 요구되는 경제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어떤 역할을 하느냐보다 우리의 친구이자 동생, 혹은 아들이자 조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존재로서 있는 그대로 대하고 싶다. 저자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한 것처럼 청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나이나 생애주기적 역할에서 부여되는 특징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으로 혹은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회 가운데 조화롭게 살아가는 2030이기 때문이다. 

 

나가며, 탈-청년을 위하여

20대의 저자는 '나는 청년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한다. 불가능해보이지만 필요하다고 한다. 14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년으로 퉁쳐지는 것은 다양성을 간과하고 동질성이 과장된 결과이다. 청년이라는 기표에는 이미 권력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사회는 청년이라는 단어, 그 구체적인 연령 집단에게 다양한 욕망들을 투사하고 있다. 진보를 달성하게 해줄 변화의 동력, 미래의 한국 경제를 책임질 인적 자원 같은 식으로, 청년을 통해 미래를 상상한다. 청년과 청년을 규정하고자 하는 사람들(기성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가 드러난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정체성’을 부여 받음으로써 청년은 사회가 특별히 보호해야 할 대상, 동시에 규명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기존의 청년담론은 청년 이기주의나 세대 분리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혹은 청년들이 과거와 달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를 하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이해한다. 이런 사고는 청년들의 실천이 촉발하는 복잡한 작용들을 청년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도록 한다. 우리 스스로가 어떤 청년 담론을 만들어 왔는지 다시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청년 담론을 쓸수 있는지 새롭게 상상해보자. 
 
발제1. 저자는 기존 청년담론이 가진 한계(다양성을 대표하지 못하고, 일부만의 특징을 대변한다는 점)로 인해 벌어지는 현실왜곡(보호나 관리의 대상이 됨, 청년 이기주의로 호도되거나 세대간의 갈등을 야기함,)에 대한 대안으로 청년이 아니라고 ‘탈-청년’을 외치면서, 청년 스스로 앞으로 어떤 청년 담론을 쓸수 있을지 상상해보자고 한다. 기존 청년담론에 대한 비판이 탈-청년을 촉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 사모는 사모, 며느리는 며느리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나를 규정짓는 단어가 될 때, 암묵적으로 어떤 요구를 할 때 쓰는 단어.. 이런 표현은 짐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런 때는 이런 규정 자체가 거부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탈-청년이라는 표현이 수긍이 된다. 희생을 강요하는 표현, 타자화된 표현, 미숙하다고 여기는 표현이라면 거절할 필요가 있다. 

- 국가에서 청년청이라는 기관을 만들어서 육아를 담당하는 청년, 사업하는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주고 있다. 이 책의 관점에서 보면 굳이 청년만이 육아를 담당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청년이라는 말을 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해당되는 청년들은 적절한 도움을 받고 있다. 

-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화가 났다. 정치나 광고, 매체에서 청년들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는 말이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반부에 오면서는 이 사회가 청년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괜찮아졌다. 나를 청년으로서 어떤 특정한 역할에 치부하지 않고 실제의 나 자신을 찾아보는.. 정체성을 잡아가고 확립해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