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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말씀묵상(소감)

[성경 읽기] 사무엘상 21:1-15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by 샬롬보금자리 2020. 9. 22.

[기도] 사랑하는 주님. 오늘 다시 성경을 읽고 묵상할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게 주어진 일상을 소중히 맞이하게 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볼수 있는 지혜와 주님 안에 있는 소망을 사모하는 사랑을 원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를 붙들고 응원하시는 주님앞에 오늘 하루를 온전히 나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께 영광이 되는 삶 살고 싶습니다. 주님 기뻐하는 이 시간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무엘상 21:1-15] 요나단과 헤어진 다윗은 일단 놉 땅의 제사장에게로 갔다. 홀로 나타난 다윗을 이상하게 여긴 제사장에게 자신은 사울의 비밀임무 수행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먹을 것을 구한다. 제사장만 먹을수 있는 진설병을 얻고, 무기를 요청해서 자신이 이전에 내놓았던 골리앗의 칼을 받아서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난한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으로 평가하며 위험성을 지적하자 다윗은 두려워서 미친척을 하고 아기스 왕에게서 떠난다. 

놉 땅에서 아히멜렉에게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얻은 후에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간 다윗

[본문 연구]

[21: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게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하니

// 놉 :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와 가까운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제사장이 머무는 지역이다(AYBD). 예루살렘 동쪽의 감람산 능선 중 한 곳이다. 현재 히브리대학교 전망대나 빅토리아 병원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한다.(역사지리로보는성경-구약) 

// 아히멜렉: 이 이름으로는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학자들은 삼상 14:3, 18에 나오는 아히야와 동일인물로 본다. 아히야는 엘리 제사장의 증손이다. 

// 아히멜렉은 다윗이 혼자 자기에게 찾아온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21: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21: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거짓으로 자신이 사울의 비밀임무를 수행중이고 다른 군사들도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음식을 요청한다. 

// 다윗의 거짓말을 두고 도덕적 진실성에 대한 평가를 할수 있지만, 성경은 그런 평가를 자제한다.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예배 의식을 드릴때 요청되던 기준이다(출 19:15)

 

[21: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21: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라. 

// 다윗은 물자를 얻기 위해 자신의 군사들의 성결을 주장한다. 

//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의 이야기를 듣고 제사장만 먹을수 있는 진설병을 내어주었다. (레 24:9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 예수님은 이 시간을 인용해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안식일 예식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하셨다(마12:3-4).

 

[21:7]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는 도엑. 이 표현은 속죄제를 위해 왔을 가능성, 목회적 돌봄이 필요해서 왔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 표현과는 정 반대로 그는 악당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손이다. 사울은 에돔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었다(삼상 14:47) 도엑은 그때 잡혀온 전쟁포로였을 가능성이 있다. 

[21:8]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하니

// 떡을 얻은 다윗은 이제 무기를 요청한다. 다윗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21:9]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 골리앗의 칼.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때 사용했던 칼이다(삼상 17:51).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만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장막에 두었었다(17:54).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다시 무르려면 1/5을 더해서 내면 다시 돌려 받을수 있다(레 27:14-33). 하지만 다윗은 그냥 가지고 갔다.

//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음. 여기서 에봇은 제사장의 의복이라기보다는 우상화된 에봇일 가능성이 있다(삿 8:27)(FSB). 

 

[21:10] 그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 다윗은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받아서 도망갔는데,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적국인 블레셋 가드 왕에게로 피난했다.

// 다윗이 죽인 골리앗은 가드사람이었다(삼상 17:4)

// 우리가 안전을 추구하다보면, 어쩔수 없이 우리가 평소에 적이라 여겼던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런 선택에 대한 부도덕함을 책망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불안감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한지라

// 블레셋 가드 아기스 왕의 신하들은 다윗의 투항을 의심했다. 그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여기고 있다. 이는 사울이 느꼈던 위협이 개인적인 정신적 불안에서 온 것이 아닐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수 있다.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21: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 다윗은 극심한 두려움으로 미친척한다. 이런 그의 행동을 비열함으로 조롱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삶을 위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다윗, 두려움 속에 있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 현대사회에서 자괴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에 위로를 얻을수 있을지 모른다.

// 수염을 더럽히는 것(특히 침으로)은 수치심과 불명예의 표시였다.(신25:9, 욥 17:6, 30:10 참조, FSB)

 

[21: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21: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 아기스 왕은 다윗을 미쳤다고 여겼다. 

//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냐. 아기스 왕의 이 말은 이미 자신 주변에 미치광이들이 많다는 비꼬는 말일수 있다. 

[묵상 및 적용]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1. 홀로 있는 다윗

  다윗은 정치적 야망으로 살려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형들을 돌보러 최선을 다했었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것을 참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명예나 성공을 바라며 살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축복(?)인지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왕의 질투를 받아 목숨이 위협받는 중에도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의 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만 사울의 측근들의 도움과 지지를 통해 목숨을 건져 도망가고 있습니다.

 다윗은 살아남았지만 혼자입니다. 그가 갈곳은 어디일까.. 그가 찾던 것은 안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지만 그는 제사장의 땅, 놉으로 갔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대리자는 아니지만 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었을까?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다윗이 입을 열기전에 먼저 제사장이 묻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제사장이 보기에 다윗은 혼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지위가 높기도 하고, 인기도 많은 사람이라서 혼자 있는 것이 어색해 보입니다. 다윗을 사랑하는 아내 미가나 다윗을 아끼는 친구 요나단도 없습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혼자 있습니다.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은 홀로 있는 자신의 실존을 드러내는 대신,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합니다. 사울 왕의 비밀임무를 수행중이며, 다른 군사들과도 곧 합류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필요를 요청합니다.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이 궁색한 변명에 속아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채 한 것인지 헷갈리지만, 아히멜렉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전제 조건을 걸고 진설병을 내어줍니다. 먹을 것을 구한 다윗은 이제는 창이나 칼을 찾습니다. 제사장에게 와서 무기를 구하는 것이 말도 안되는 것 같은데 다윗의 간절한 요청으로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던 골리앗의 칼을 가져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다윗은 곧장 더 안전한 곳을 찾아갑니다. 다윗이 생각해낸 안전한 곳은 이스라엘의 적군인 블레셋 가드입니다. 자신을 잡으려는 사울만을 생각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가드 사람들은 다윗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성공가도에 들어서게 된 결정적인 사건인 블레셋과의 전투, 다윗이 물멧돌로 이겼던 골리앗이 가드 사람이었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투행했지만,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으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찬양하던 사람들의 반응을 들어 다윗을 경계합니다. 항복도 마음대로 안됩니다. 살기위해 한 걸음 한걸음 내 딛을 때마다 위기는 더욱 증가하고 삶은 버거워집니다. 결국 다윗은 미친체 합니다. 미친 체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미쳤을지도 모릅니다. 나보고 어쩌라고... 울며 땅을 쳐도 해결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윗의 이런 행동을 보고 아기스 왕은 다윗이 미쳤다고 내보냅니다. 

  이렇게 다윗은 다시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2. 나는 누구와 함께하는가?

  우리의 인생은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나쁜 의도로 어떤 과욕을 부린 것이 아니어도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삶의 자리에 있게 합니다.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없지 않는데 자꾸만 외로운 홀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외로움을 느낄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찾아서 사람들은 교회로 오고, 목회자를 혹은.. 친구를 찾습니다.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만남에서 내가 내 형편을 이야기하고 공감받고 용기를 얻을 틈도 없이 나의 어떠함을 살피며 건네는 질문은 우리를 궁색한 변명의 삶으로 이끕니다. 

  다 계획이 있고, 이렇게 사는 이유가 있다며 책 한권을 써내려갑니다. 내게 필요한 것들을 줄수 있는지를 묻고 그것을 얻으면 떠나갑니다. 더 머물고 싶어도 머물수 없는 어색함이 인생을 이 지독한 외로움, 이 홀로됨으로 이끕니다. 참 어렵고 참 나빠보입니다. 어찌되었든 살아보려고 하는 말과 행동인데 삶이 흩어지고 생명이 흩날리는 것 같습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그 위기를 모면하는데 몰두합니다. 그래서 당장 눈 앞에 놓인 위험만을 피하려고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떤 삶을 살려고 했는지를 잊습니다. 코로나 19로 경제적 위기, 정서적 위기에 노출되니 어쩔줄을 몰라합니다. 돈이 주는 안전함, 지위가 주는 안도감이 절박해지면, 그것을 얻기 위해 몰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리던 은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던 공의와 사랑에 대한 추구보다 나의 생존이 전부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익이 충돌 되는 순간에는 멈칫하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잠시 비켜두고 증권과 부동산, 연금과 수익상품에 눈을 돌립니다. 돈을 벌기 위한 행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안전이 그곳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소명을 따라 내 재능을 내가 기뻐하는 일, 타인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는 일을 하기로 했던 삶을 뒤로한채 생존을 위한 선택에 매몰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나 자신은 세상이 보기에 이상합니다. 세상은 내가 큰 맘먹고 투항했는데도 나를 환영해주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경쟁자가 등장한 것을 알고 나를 견제합니다. 그런 어색함을 감지하고 나면 나 스스로 내가 하나님 나라의 왕자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는데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의아해합니다. 이 안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을 마주 하면 자기 배신, 자기 괴리로 괴로워 울게 됩니다. 

  안전을 찾는 우리 인생은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아무도 없어 보입니다. 교회를 찾아가고 목사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서 정신적 육체적 필요를 채우고도 돌아나오는 때에 느끼는 허전함을 어떻게 채울수가 없는 삶을 사는 다윗이 마냥 측은해보입니다. 안전을 찾아 목숨걸고 찾아간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생은 우울합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짚어내고 속시원히 해결하고 싶지만, 인생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인생에 대해서 성경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지 않습니다.

  다윗이 거짓으로 음식을 얻어내고 무기를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블레셋에 투항한 것도,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고 미친척한 것에 대해서도 어떤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담담히 그것들을 기록해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삶이 완벽하고 이상적인 삶이 아니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줍니다. 이세상에 미친사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내가 미친 짓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홀로있고, 함께하는 사람이 없지만... 내 삶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애정있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거짓을 정당화하고 세속화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스쳐지나가는 듯 하지만,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먹을 것과 칼을 주었고, 아기스는 다윗이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돌려보내었습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을 찾는 것, 내 삶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한 걸음에 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삶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분투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리 내 삶을 찾고 싶습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다윗의 도망자의 삶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봅니다.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을 사는 것조차도 위협받는 다윗의 인생이 안타깝고 내 인생도 그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애잔합니다. 돈이 주는 안정감,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취는 지위가 주는 매력을 원하지 않지만, 먹고 살아야 하고, 칼이 있어야 살아남을수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윗의 간절함이 내 안에도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을 찾아 놉에 있는 제사장을 찾아가도 나 자신을 드러낼수 없던 다윗의 실존, 살아남기 위해 적진에 갔지만 환영받지 못하고 다시 떠나 홀로있을수 밖에 없던 다윗의 삶을 붙드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내 삶에도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기대합니다. 나로 내 삶의 자리를 찾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를 살며, 사람들을 살리고 세우는, 하나님 나라로 함께 나아가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이 세대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살길을 열어주옵소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흠을 잡아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 아기스의 신하들을 떠나 홀로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오늘 그런 삶에 대한 애정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