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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세상에생명을주는예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OT, 머리말) 나눔

by 샬롬보금자리 2021. 2. 24.

첫 모임

일시: 2021년 2월 18일 목요일 오전 10시-11시35분
장소: 온라인

만남과 시작

 코로나 시대에 오랫만에 오전에 사람을(?) 만났습니다. 새로 시작한 온라인 독서모임을 시작했거든요. 그 동안 알고 지내던 분들이긴 했지만, 책을 같이 읽고 나누는 독서모임으로 처음 만났고 그 느낌도 새로웠습니다.

 시작하면서는 독서모임을 통해 성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나누었고, 서로 간단한 소개를 한 뒤에, 체크인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본래 모임은 5명이 만나기로 했었는데, 사정상 한 분은 참석 못하셨고, 꽃님(꽃이라서..라고 아무도 안불러줘서), 늘푸른 나무님, 여행, 비스킷 이렇게 4분이 참석했습니다.

 모임을 시작하기 위해 마음의 온도와 응원으로 체크인을 했고, 본격적으로 독서모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안전한 모임을 이루기 위한 약속들(진정한 이야기, 용기있는 나눔, 내 기준에서의 판단 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알아채려는 경청, 비밀유지)을 안내했습니다.

책 날개 읽기

그리고 책 날개에 씌여진 포인트를 짚어보고, 서문을 함께 읽고 저자의 의도에 비추어 나눔시간을 가졌습니다. 

책 날개는 나름 출판사에서 핵심적인 내용, 책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실어 놓았다고 여겨서 소개했습니다. 

  • 이 책은 성례전의 신학적 의미의 복원해 낸다.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을 먹는 삶,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서 영생을 누리는 삶을 이야기 한다.
  • 정교회에 초기 기독교의 예배 원형이 보전되어있다고 한다. 저자는 형식이나 의식 정도로 여겨지던 성례를 [1] 하나님을 만나고, [2] 생명을 누리고, [3] 세상에 그 생명을 주는 예배의 본질이 담겨있음을 보여준다.
  •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눈으로 기독교 예배를 보게 되며, 그 예배를 통해 전혀 새로운 눈으로 다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서문은 책을 쓰게 된 배경과 책이 주목 받는 이유, 출판에 관계해서 감사의 말이 담겨있습니다.

 책이 주목 받는 이유로 저자는 세속주의를 꼽았습니다. 1963년에 처음 만들어진 글이 1973년에 출판된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저자의 주목은 우리가 오늘날에도 할말이 많아지는 통찰이었습니다. 

Key word: 세속주의

 저자가 말하는 세속주의는 “애초 우리 문화를 형성했던 기독교적 경험과 세계관으로부터 지금 우리 문화가 빠르게 멀어져 가는 것”이고, 문제는 세속주의를 두고 그리스도인들이 양극단으로 나뉘어 반응한다는 점입니다. 샬롬복음의 관점으로보자면, 세속주의는 하나님과 관계 맺지 않는 세상, 하나님 없는 세상, 하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삶의 태도이고, 문제는 그래서 샬롬을 누리지 못한다고 설명했던 부분입니다.

한구경제신문 기사 '이슬람원리 세속주의뿌리 깊은 갈등' 도표정리

 저자가 말하는 세속주의를 둘러싼 기독교의 양극단은 이렇습니다. 

[1] 세속주의를 역사상 기독교가 낳은 최고의 열매로 환영하는 이들

[2] 세상에 대한 미니교적 거부 또는 비성육신적 이원론적 영성으로의 도피에 대한 정당화로 삼는 이들

 세속주의를 긍정하는 [1]은 세속주의에 물들어서 교회를 그저 세상과 세상의 문제들로 축소 시킵니다. 말하자면 교회를 볼때 돈이나 사람 혹은 조직체계의 문제로 여깁니다. 

 세속주의를 부정하는 [2]에 나오는 마니교적 거부라는 말은, 마니교의 특성을 이해하는게 필요합니다.  

 마니교는 이 세상을 빛(선)과 어둠(악)의 대립으로 이해하며 영혼을 선한 것으로 육신을 악한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기대하는 구원은 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방법은 영적인 지식(지혜)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마니교에서 볼때, 과거는 빛과 어둠, 선과 악이 대립하며 분리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이둘이 섞여있는 상태, 즉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구원이라 할수 있는 미래는 다시 그 빛과 어둠, 선과 악이 분리된다고 전망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육적인 사람(간음, 출산, 소유, 경작, 추수, 육식, 음주)은 육체가 연속되는 환생을 거듭하게 됩니다. 또한 마니교 공동체는 교리를 따르는 엄격한 금욕생활을 따를수 있는 “선별된 자”와 노동과 기부를 통해 그들을 돕는 “듣는 자”로 나뉩니다. (성직자에 대한 다른 삶을 요구하는 관점과 만인제사장을 이야기하는 개신교 관점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마니교의 사제들이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다:  타림 분지의  고창 에서 발견된 사본의 한 페이지 @위키백과

 마니교와 연이어 나오는 비성육신적 이원론적 영성이란 말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절대 선하고, 인간은 죄로 인해 악하기에 하나님이 인간이 될수 없다고 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보일뿐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상태의 가현설(보기에만 인간으로 보일뿐이다) 차원에서 갖는 생각입니다. 이원론적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 있다. 세상을 영과 육 혹은 선과 악, 빛과 어둠 같은 대립구조로 이해합니다. 이런 영성은 세속의 일을 악한 것으로 벗어나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또한 파생적으로 선이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선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필요하고 보통은 자연스레 힘이 필요합니다. 평화를 위한 전쟁,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경찰이나 군대 같은 개념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힘이라기 보다는 사랑(낮아짐)입니다.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의 샬롬을 이끌어냅니다)

 따라서 마니교적 거부라는 말은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고 배척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성육신적 이원론적 영성 역시 세상을 긍정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을 내려놓고 신학을 하는 일이나 예배나 기도에 집중하는 것을 더 좋은 것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거부하거나 영적인 세계로 도피하는 이들은 세상을 그저 악과 동일시하고 병적으로 그들의 묵시적 파멸을 기뻐(?)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망해야 할 세상, 벌 받아 마땅한 세상으로 보는 저주신학이 연결되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출현 초기에 중국에 대한 심판론을 이야기 한것과도 유사합니다. 

나눔. 

이 지점에서 참석자들은 다양한 자기 경험들과 교회와 세상의 시선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모두들 양극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느 한 극단의 태도를 경험할때 뭔가 이건 아닌데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균형잡힌 삶을 살기 위해 말씀(성경)과 믿음, 고민과 사색의 시간, 함께 할 공동체(신앙의 동역자)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눔 도중에 죽음과 구원의 문제,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곁가지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시간과 내용의 흐름상 일단 미뤄두었지만, 글로 내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먼저, 죽음의 문제를 두고 구원을 판단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불신자가 임종 직전에 신앙을 갖는 것처럼 보였는데, 임종시에 드러나는 고인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그닥 평안해 보이지 않는데, 과연 구원 받은 것일까? 하는 질문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에 대해 간략히 답을 해보자면, 일단, 임종시 고인의 행동이나 표정, 분위기를 통해 구원여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유족과 주변인들에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구원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예로, 평소 신앙좋은 성도가 노년에 치매에 걸려 신앙을 부정하는 경우에도 비슷한 고민에 빠질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우리는 분명히 그 결과를 알수 없고 우리의 판단이 그 결과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든지 그렇지 않든지 우리의 어떤 추측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성경을 근거로 이야기해볼 부분들은 있지만 타인의 구원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나의 구원도 약속으로 하나님께 받을뿐 우리편에서 확정할수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의 확신이 필요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호기심 너머 우리의 종교생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사는 일상의 풍성함까지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할 부분이 많아보입니다. 

또 다른 주제인 자유에 대해서는 간략히 “주체성”과 연관되어 이해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백소영 교수에 따르면(참고: shalomvil.tistory.com/58)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특징을 크게 3가지로 꼽았습니다. “창조성, 주체성, 관계성”입니다. 이중에서 주체성은 세상 그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존재감, 자존감과 연관됩니다.

이 주체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초에서 가져오는 것이 중요해보입니다. 이 책을 가지고도 앞으로 이에 대해 나눌 대화가 있어 보입니다. 기존에 샬롬복음 차원에서 이야기했던 것을 소환해보자면, 우리는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죄에서 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죄사함(구속)과 구원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지배받는 복종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무엇에도 지배받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사이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매몰되어버리는 것은 안타까운일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은 우리가 바친 그 사랑을 받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셔서 이 세상을 마음껏 살게 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권위에 이끌려 자신의 말대로 복종(타율적인)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순종(자발적인)의 자세로 세상을 자유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는 그 기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자유롭게 살면 됩니다. 여기에 실수가 없거나 잘못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귀하지만, 거의 불가능합니다. 실수하고 넘어질 일어나서 다시 길을 갈수 있도록 좋은 친구, 같은 마음을 가진(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다음 모임에서는 1과를 읽고, 나눌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