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나눔 첫번째로 황성하 목사의 글을 기고받아 나눕니다. 블랙팬서 영화를 본 분이라면 통찰력있게 읽을수 있는 글이라 추천합니다. 특히 샬롬복음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헤세드와 미쉬파트, 샬롬의 관계가 잘 설명되어 있어 돋보이는 글입니다.
사진출처: 구글이미지
마틴 루터 킹이 비폭력으로 백인 사회에 저항한 것은 그 방법이 옳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백인이 대다수인 사회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더 큰 힘을 가진 백인 사회의 분노만을 유발할 것이었다. 그는 흑백을 나누지 않고 인류를 하나로 보았으며, 더 큰 대의에 호소했다. 호소력 있는 말의 힘을 알았고, 그 말이 사람의 영혼이 닿을 수 있도록 인류의 영원한 꿈에 호소했다. 이상과 꿈의 나라는 어떤 제국보다도 더 넓고 힘이 세다.
말콤 엑스는 마틴 루터와 다른 길을 걸었다. 감옥에서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접하고 그는 흑인 민족주의 흑백분리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흑인들 내부에 겹겹이 쌓여있는 자기 증오에 집중했다. 그는 백인들이 그들의 피부색을, 존재 자체를 증오하도록 가르쳤다고 폭로했고, 자기들을 향한 증오를 외부를 향한 분노의 감정으로 바꾸는데 주력했다. 분노는 과격하게 표현되었고 그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메카를 순례한 후에 그는 분노와 그 힘의 한계를 알았지만, 결국 희생되었다.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미세먼지를 잡기 위해 블랙 마스크를 쓰던 아이는 블랙 팬서를 통해 블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아름다운 와칸다에 빠져들었다. 꿈에서나 가능할 법한, 미래에 속한 이 나라는 눈부시게 반짝 거렸다.
하지만 와칸다는 현실속에 존재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이 나라는 감추어야 지킬 수 있는 나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외계의 은총(비브라늄)으로 주어진 풍성함을 자신들만을 위해 사용하는 이 나라의 아름다움은 기만적으로 다가왔다.
ⓒ영화 '블랙팬서'
블랙 팬서의 최대 숙적 킬몽거의 분노는 그런 점에서 예수의 분노를 떠오르게 한다. 본시 은총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혈통, 모세의 율법,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 속에 갇힌 이스라엘은 스스로 부패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킬몽거처럼 분노했고, 예수는 예레미야의 말(7장 1-11절)을 인용해서 성전 독점 권력과 맞섰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도, 진리의 풍성함도, 하나님을 만나는 자격도 특정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권력이 아니다. 독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은총도 은총을 소유한 자도 하루 지난 만나처럼 썩고 버려진다.
1517년 비텐베르크 성문에 서 있던 마틴 루터가 이름을 바꾸며 자신 은둔했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자국민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번역한 이유는 은총은 숨겨져서도 독점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세드’(은혜,은총)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무한하고 풍성하다. 미래에서 온 이상이며, 하나님 나라를 바로 오늘 살아내는 꿈이다. 마틴 루터도 그의 이름을 이어받은 조지아 주의 마틴 루터 킹도 무한한 오늘의 사람이었다.
헤세드의 풍성함을 나누는 것이 ‘미쉬파트’(의, 공의)다. 은총을 나누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자기포기’란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면죄부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렇듯 의는 늘 관계적이다.
그리고 미쉬파트의 결과가 샬롬이다. 샬롬은 단지 마음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쟁을 그친 자가 자기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는 것이고, 이웃을 환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이의 고통에 참여했던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타인을 이웃으로,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광야의 나그네를 대접했다가 친구로 오신 하나님을 만났다. 예수의 샬롬을 이해했던 바울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고통을 껴안았다(롬 8:18-25).
ⓒ영화 '블랙팬서'
배제와 편가름은 복음의 방식이 아니다. 소돔은 악한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타인과 나누는 의인이 없었기 때문에 망했다. 내 몸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보지 못하고 늘 타인의 옷게 붉게 글씨를 새긴다. 그들은 악하고 우리는 선하다는 이중적인 잣대로는 킬몽거의 눈물을 그칠 수 없다. 미쉬파트를 오독하는 이들은 타인의 슬픔보다 우리가 얼마나 깨끗한가를 자랑하며 그 안에서 샬롬없이 썩고 있다.
킬몽거는 와칸다의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그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는 거짓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포장한 와칸다에 묻히기를 거부한다. 그는 영원한 뉴욕 뒷골목의 고통 받는 한 사람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Bury me in the ocean with my ancestor
who jumped from ship cause they knew
death was better than bondage.”
예수는 율법과 성전을 독점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영원한 타인이었다. 그리고 그 타인들이 서로를 향해 느슨하게 그러나 무한한 신뢰로 연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 그가 몸을 포기하시지 않은 이유는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대하시기 위해서이다. 그의 또 다른 몸인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미래의 것인 그러나 바로 오늘인 그의 나라를 이 땅에 타인들과 나누는 것이다. 바로 그 삶의 경계와 통로에 샬롬이 있다. 복음이 있다.
황성하 목사(전주성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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