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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함께하는 삶 이야기

우리는 대화할 수 있을까?

by 샬롬보금자리 2021. 6. 5.

우리는 대화할 수 있을까?


 아침 공기가 오늘도 상큼하다. 몸도 마음도 낯설다. 도심 도로가에 찾아와 여기저기 깡총 거리는 참새(?)들이 반갑다.

 이 새들을 풍경에서 대상으로 관찰하기 주의를 기울이자 베시시 웃음이 나왔다. 사이가 좋은 듯, 나쁜 듯 함께 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함께 하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한다. 공동체, 교회, 가정에 대한 애정이 있다. 전화 통화든지, 오프라인 만남이든지 나름 정성을 다하려고 주의를 기울인다. 그 안에서 매번 경험하는 애정과 고통이 있다. 한 예로, 언젠가부터 페북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름의 고통이 되었다. 

 그 안에서는 오프라인에서와는 다른 만남이 있다. 평소에는 말을 건네도 좀처럼 눈을 맞추어주지 않던 고딩들, 청년들이 그 좋아요와 댓글에 반응이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하던 그 사진과 어리숙한 글에 반응을 해주는 것도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어찌 살아가는지를 보며 부러워도 하고 함께 기뻐하거나 함께 애통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쫄쫄 흐르는 지독한 외로움과 갈등이 있다. 나도 그렇고, 그도 그래 보인다. 무엇을 기대한 걸까?!

 나의 부족한 이해로는 이 외로움과 갈등의 뿌리에는 관계가 있다. 바꿔 말하면, 굳이 온라인이 아니더라도 관계의 고통과 열망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같이 있고 싶은데 함께 하기 싫어한다(솔로일 땐 외로운데, 연인일 땐 답답하다^^;). 이 긍정과 부정의 기준점은 '나와 같은가', '나와 다른가'이다.

 

나와 너의 구분은 신비다.

 이번 주에 연구소 스터디 모임에서 공부한 마틴 부버의 '나와 너'에서는 나와 너, 나와 그것을 짝말이라고 한다. 필연적 관계, 본질적으로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강조는 천재적이며 본질적이다. 그는 사람이든 자연이든 사물이든 나와 너로 만나는 풍성한 만남의 관계가 있고, 나와 그것으로 만나는 대상이나 사물로 대하는 관계가 있다고 한다. 그가 안내하는 바에 따르면, 나와 너로 만나는 인격적 관계가 무조건적으로 옳은 게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언젠가 다시 나와 그것의 관계로 바뀐다. 그게 자연스러우며 그래야 한다고 한다. '나' 중심성을 통찰력 있게 설명했다고 여겨진다.

 내가 가진 관계, 공동체(함께하는 삶)에 대한 이해로 보면, 나는 우리 전부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내가 빠진 '그들'과 대치되는 우리가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 너와 그것도 나라는 말이다. 나와 다른 그도 결국 나이다. 다만, 지금은 내가 아직 알아듣지 못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세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나를 비우고 경청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다른 이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실과 최선, 호의와 열정을 발견하면 그때부터는 훨씬 쉽고 편해지고 즐거워진다.

 내가 나와 너의 구분이 신비라고 보는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사람에게서 안정감을 얻는다. 위로도 받고 나를 수용하고 돌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안정감은 금세 지루함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에게서 호기심을 느낀다. 나에게는 모험이나 다름없는 다른 삶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동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애정 어린 설렘은 금세 위협처럼 느껴지고 적대감으로 바뀔 수도 있다.

 연인들을 보면 더 명확해지는데, 사랑에 빠질 때 그들은 자신과 다른 그의 모습에서 매력을 느낀다. 내가 갖지 못한 모습을 그가 가져서, 혹은 그가 갖지 못한 점을 내가 채워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강렬하게 하나가 되고 싶어한다. 연인 혹은 부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 하나 됨을 갈망한다. 그리고는 이내 그들은 서로에게서 서로를 발견한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것 같은데 참 비슷하다며 신기해한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가 모르는 상대방의 다른 부분은 내 상상 속에서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해주는 그 사람으로 단정해버린 것일 수 있다.

 이제 그들은 성숙하게 서로 다름에서 배우며 성장하고 같음을 즐거워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나와 같은 모습에 지겨워하고 숨 막혀하다가 나와 다른 모습에는 위협을 느끼고 나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당근과 채찍으로 조정하려 들 수도 있다. 내가 먼저 그리 했는가, 그가 나에게 이렇게 대했느냐에 따라서도 반응이 엇갈리겠지만, 분명한 것은 나와 너의 같음과 다름이 안정감과 모험(호기심, 탐색)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대화의 가능성

 나와 다른 사람의 소통의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대화는 주로 언어화되어 있고, 언어는 말과 글로 표현된다. 이것들은 분명 나를 표현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수 있는 객관적 실체이다.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이면서 엄연히 존재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내 의식 밑에서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자기 중심성과 연관된 애정과 고통을 알아차리는 게 도움이 된다. 

 내가 대화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분명 나와 다른 모습에 대한 호기심(열망)이거나 나와 같은 모습에 대한 안도감(혹은 지지) 일 것이다.  나는 내 양심껏 내가 가진 최선과 진심을 상대방에게 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도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기초, 목표가 무엇인지도 상기해야 한다. 우리 가정을 위해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우리 학교, 우리나라를 위해서 애정 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서로가 믿어주어야 한다. 공동체 강의를 할 때 했던 표현을 다시 인용하자면, "나와 다른 그 사람 안에 있는 고대 보물을 발굴하듯이 조금씩 조심스럽게 찾아들어가면 그의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나는 감격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자기 돌봄이 필요하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 쉼과 회복이 필요하다. 

 "너무 힘들면 잠시 쉬어도 되고, 아예 거리를 두어도 된다. 어쩌겠는가?! 할 수 없는 것을...."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생겨나는 실망감과 적대감은 그에 대한 조롱이나 비난, 외면으로 이어지다가 나에게서 생기를 잃게 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그도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외로움과 갈등 속으로 들어간다. 

 사랑이 대화의 시작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실은 내가 완벽하지 않다. 나는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 도 없다. 잘하고 싶지만, 잘했었지만 오늘 지금은 그냥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좀 더 나아지겠지만 그래도 힘든 순간이 있다. 이때 필요한 것, 아니 언제나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 그래도 사랑, 그렇게 사랑이 필요하다.

 외롭고 힘들 때,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내 눈을 바라봐주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나와 삶을 함께 살아가는 짝꿍과 따뜻한 차 한잔 나누며 웃고 울면 안정감을 찾으며 괜찮아질 수 있다. 이야기할 곳이 없다면, 샬롬복음연구소에 문을 두드려도 좋다.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서, 내가 정답이라서가 아니다. 내가 괜찮으면 대화할수 있다. 충분히 듣고, 그에게 내 말을 할수 있다. 조종하려 하지 않고 그에게서 지혜를 배우고 함께 웃을 수 있다. 그의 호흡을 따라 놀이하듯 도망가고 추격하며 깔깔거리며 행복할 수 있다.

 사자 같은 나도, 사자 같은 그와도 함께 깡총깡총 날아다니는 참새처럼 재밌게 놀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