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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말씀묵상(소감)

천국이 그립다. (마 19:13-30)

by 샬롬보금자리 2019. 3. 23.



천국이 그립다. 
본문: 마 19:13-30

다시 천국이다. 예수님이 천국 이야기를 다시 하신다.
오늘 말씀하시는 천국은 그 자체의 특징보다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자격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대체 천국은 어떤 곳일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14), 부자는 가기 어려운 곳(23),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버린 자들의 것(29)이다. 

여기서 어린아이를 가리켰던 이런 사람의 것은.. 어린이가 아닌 예수님께 안수받기를 원하는 자일수도 있다.

부자는 가기 어렵다고 했지만, 누가 자기를 부자라고 생각할까? 10억이 있는 사람도 자기는 부자가 아니라고 손사래 칠것이 뻔하다.
그래서 어쩌면 소비규모나 어떤 액수 이상의 수입, 자산가치 이런 것을 따지는 부자라기 보다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온전해지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포기할수 없는 무엇이 있어서 예수님에게서 떠나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자일지 모르겠다.
사람으로서는 할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 나의 헌신이나 성화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베드로가 앞장선 제자들의 헌신도 궁금한 대목이긴 하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무엇을 버린자는 앞서서 예수님에게서 돌아가버린 부자청년을 염두하고 하는 말이리라...
그런데 여러배를 받는 것은 천국에서일까? 아니면 이 땅에서 일까?, 예수 공동체로 여겨지는 교회의 모습인가? 그럼에도 영생을 상속한다는 것은 시간적인 영원함이라는 문자적 한계에 상상력을 빼앗기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오늘 천국이야기에서 나를 당혹케 하는 것은 "그러나"이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결코 먼저 된자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중도 아니지 않았나? 
그럼 나는 중간인가? 그러면 먼저되든 나중되든 중간은 가려나?
아니, 그냥 아무도 모른다 정도인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감도는 내 마음은 이렇다. 
나는 천국이 그립다. 이미 하늘을 날아 다녀왔던 아메리카 대륙이나 유럽의 땅끝처럼 내 경험을 의지한 그리움이 아니다. 미처 가보지 못했고 맛보지 못했지만, 사무치도록 꿈에서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며 살았을까? 싶은.. 그렇게 살고 살며 영원히 있었던 것 같은 천국에 대한 기다림의 그리움이다.

나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어린아이처럼..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부자청년처럼 예수님에게서 무슨 선한 일을 찾기가 두렵다. 행여 내게 버리라고 하면, 버릴 것이 하나는 있을까? 아니 그러고 싶으면서도 그럴수가 없다. 
이러다가.. "목사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이런 말을 듣는 이 시대의 언어가 내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놓고 과녁으로 만들 것만 같다. 

에잇,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수 있다는 주님의 말은 꼬옥 붙들어 가슴에 움켜쥔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내가 무엇을 떼어낼 자신은 없지만, 내가 예수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더 사랑함으로 불꽃마저도 내 마음에 활짝 들여놓고 싶다. 
죽지 않는 영생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도 온전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호흡으로 생령이 된 한 사람으로 살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