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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말씀묵상(소감)

[QT소감] 예배하는 야곱의 처절한 삶

by 샬롬보금자리 2020. 2. 27.

예배하는 야곱의 처절한 삶

본문. 창세기 35:1-22

오늘 큐티 본문을 묵상하면서 삶이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잘 살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일텐데, 산너머 산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방향과 방식을 바꿔놓지만, 결국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황금길이나 꽃길이라기보다는 험난한 시골 비포장 도로 같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복음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복적인 환경의 나음(장소로서의 베델, 위기를 벗어남)이 아니라 그 환경 가운데 찾아오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엘베델)과의 관계 안에 거하는 것(말씀에 반응하는 것, 자발적인 거룩, 순종)이구나 싶습니다. 

1부. 베델에서 예배하라

 야곱이 세겜에서 자신의 딸 디나가 욕보인 사건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는 사이에 디나의 오빠들이 세겜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을 몰살하고 그들의 제물을 취하는 폭력적인 일을 저질렀습니다(34:18-31). 이일에 대해 야곱과 아들들 사이에 설왕설래하며 논쟁이 있었지만, 어떤 결론은 딱히 드러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바로 등장하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서 베델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아라. 네가 너의 형 에서 앞에서 피해 도망칠 때에 너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쳐라"(1)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베델로 올라가서 거기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세겜에서 장막을 짓고 그곳에 사는 세겜사람들과 통혼하려고 했었고, 디나의 친오빠들의 개입으로 끔찍한 피비린내 나는 일이 일어나서 더이상 안전하게 거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세겜을 떠나서 베델로 가라는 것입니다.(1)

Bible Map(ios App)

 이 베델은 그냥 하나의 피신지가 아닙니다. 이전에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뒤에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는 위협을 듣고는 도망갈때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 베델입니다(창28:19). 따라서 하나님이 베델로 가라는 말은 야곱이 형 에서 때처럼 목숨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두려움을 아시고, 그 순간에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야곱은 순종합니다. 자기의 가족과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을 데리고 베델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공표합니다. 뿐만아니라 야곱은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일도 추가 합니다. 바로 이방신상을 다 버리는 것,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도록 합니다.(2) 자신의 딸이 욕을 보이고 돌아와도 침묵하던 야곱, 아들들이 세겜사람에게 행한 끔찍한 살육보다 그 결과로 인해 자신의 가족이 위협 받을 걱정하던 야곱이 하나님이 베델로 가서 제사를 드리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제사에 합당한 모습을 스스로 생각해서 정결케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야곱과 논쟁하던 아들들은 큰 저항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에 대한 마음이 이전과 같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이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야곱이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시종)를 범했는데(35:22) 이는 르우벤의 개인의 욕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야곱이 모든 이방신상과 귀고리를 세겜 상수리 나무 밑에 묻어두고 베델로 가는 동안에 모든 성읍 사람들은 야곱을 추격하기는 커녕 야곱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35:5) 그 이유를 성경은 "하나님이 사방에 있는 모든 성읍 사람을 두려워 떨게 하셨으므로"라고 설명합니다. 베델에 도착한 야곱은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새로운 신앙으로 성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로서의 베델이 아니라 베델에서 자신을 만나주셨던 하나님, 베델로 올라가라고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엘베델(베델의 하나님)이라고 지명을 고쳐부르는 것에서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서 복을 주셨습니다.(9) 그 복의 내용은 #1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고, #2 생육하고 번성하여 자손이 많이 나올것과 #3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야곱에게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이전에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할때 베델에서 들었던 #2, #3을 반복하는 것이기도 한데(28:13-15), 이 복을 주는 대상으로서의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어 갱신된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 나도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위기의 순간이 아니고 두렵지 않은 순간이 없는 것 같은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 나라가 조용하면서도 시끄럽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부터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오고 갑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한 그리해야 하겠지만, 이 위기의 순간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어서 올라가야 할 베델이 어디인지 알고 싶고, 거기에서 살라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베델은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도망하던 때에 하나님을 만났던 곳인데.. 나에게 베델은 결국 말씀의 자리, 큐티와 성경공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베델로 가려는 뜻을 알리고, 나 자신과 나와 함께 하는 가족, 친구들에게 거룩을 요청하고, 장소로서의 예배 장소나 예배 자체보다 그 예배의 참된 목적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환기해야겠습니다. 결국 이 곤고한 시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가 마주하는 위협에서 안전한 것은 하나님이 지켜주심으로 가능할 것을 믿습니다.

(노파심으로 추가하자면, 저는 전광훈씨가 말하는 '야외에서는 코로나19가 전염되지 않는다, 우리는 죽어도 괜찮다'는 논지에는 적극 반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신뢰 같지만 오히려 신천지보다 더 무지몽매하며 자기 중심적인 죄성에서 비롯된 착각이며 상식이하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실질적인 위험(세겜)에서 피하도록 하시며 지켜주셨습니다. 민간 요법도 참고할수는 있지만 질병관리본부에 주어진 권위를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상식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어떤 장소나 환경(특정 정당 지지)에 매이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런차원에서 기독교의 위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것과 순종하려는 것, 자발적인 거룩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편이든지 가시적인 어떤 결과를 목적삼는 것은 안타까운 우상일수 있습니다.[다만 각자가 가진 양심과 소명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성찰이 요구되며, 타인과의 관계안에서 적절한지(사랑) 고려해야 합니다]

2부. 예배자의 삶, 그 진지한 참혹함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야곱은 순종함으로 세겜에서의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복을 약속받았습니다.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여과없이 드러내는 모습은 좀 다릅니다. 야곱이 경험하는 실제의 삶은 그리 핑크빛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어쩌면 좋을까 싶은 일들이 펼쳐집니다. 

The Death of Rachel by Francesco Furini

  야곱이 베델에서 떠나 에브랏(베들레헴 가는 길)을 지날 즈음에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죽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다시 에델 망대 건너편에 장막을 치고 머물렀을때, 아까 말했던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를 범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삶이 전혀 만만치가 않습니다. 집안이 엉망진창이 된 것 같은 패배감,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베델에서 살라고 하셨는데(1), 에브랏으로 떠나서(16)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야곱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야곱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만 보여줄 뿐입니다.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죽어가며 낳은 아이는 베냐민입니다. 죽어가던 라헬은 이 아이를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야곱은 이 아들을 베냐민('오른손의 아들'(동쪽을 기준으로 남쪽이 오른손임) 혹은 '남쪽의 아들', 참고로 다른 아들들은 모두 북쪽에서 낳았음)이라고 고쳐불렀습니다. 또한 야곱이 상심했을 법한데도 야곱이 슬퍼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묻고 비석을 세워두었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르우벤이 빌하를 범한 사건에 대해서도 이 소식이 이스라엘(야곱의 새이름)의 귀에 들어갔다고만 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해 하며 두려워하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또한 가족과 함께 거하는 자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정결하도록 갱신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저 종교적인 거룩의 행위를 넘어서 베델을 통해서 자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받고 약속된 복들을 재확인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기복적인 결과와는 다르게 야곱의 삶은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보내야 했고, 아들로부터 배신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류의 슬픔과 절망, 비참함과 분노의 상황은 보통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징벌로 인식됩니다. 물론 르우벤의 행동은 명백한 죄이며 구약의 율법으로도 죽여야 하는 위중한 죄입니다. 하지만 야곱에게 있어서 이런 삶은 그가 숨을 쉬고 다리를 움직여 걸어다니는 세상에 존재하는 일입니다. 야곱이 할수 있는 것은 베노니를 베냐민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슬픔의 아들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오른손의 아이로 의미를 찾는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도 문제이고, 사람에 대한 태도도 문제이고, 교육과 의료와 문화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앞에 그저 절망만 할수 없습니다. 세상이 비관할때 새로운 관점을 보고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역사를 만들어야 합니다. 코로나 19로 말미암은 이 어려움의 때를 비난과 정쟁의 때로만 두지 않고, 선진화된 의료체계를 갖추고 사교의 위험을 알아차리는 때로 삼아야 합니다. 비난과 비판을 통한 정당성을 획득하기 보다는 사랑과 연민으로(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아픔을 돌보고, 수고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모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족이 어색함과 불편함을 넘어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회로 삼기를 원합니다. 

  그 마저도 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그 불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지 싶습니다. 야곱이 르우벤의 이야기를 듣고 침묵한 것이 그의 우유부단함 같지만, 그랬던 야곱이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삼으신 자이며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음이 명백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께 집중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