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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모음/복음으로 읽기(서평 및 정리)

[신세계 질서의 비밀, 복음으로 읽기]

by 샬롬보금자리 2020. 3. 28.

  이 글은 음모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제시하고자 쓴 글입니다. 신세계 질서가 음모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혹 이런 음모론에 신경이 쓰이셨던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음모론에 관심이 없다면, 1,3,4 단락만 읽으셔도 됩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신세계 질서의 비밀과 기독교
2. 신세계 질서의 비밀은 무엇인가?
    2-1. 세상에 드러난 음모?
    2-2.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는 자는 누구인가?
    2-3. 신세계 질서의 구체적인 모습
3. 정말 그러한가?
    3-1. 선과 악에 대한 오해, 순수악에 대한 환상과 본질
    3-2. 자유에 대한 혼란, 소중한 자유와 위험한 자유
    3-3. 더 나은 삶을 향한 갈망,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본능
4.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
    4-1. 이 책이 말하는 대처 방법, 바르게 읽기
    4-2. 그리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 사랑, 사랑

*글이 비교적 깁니다^^; 목차별로 읽기 원하시는 분은 위 링크를 누르시면 됩니다. 

 

신세계 질서의 비밀, 복음으로 읽기


1.들어가는 말: 신세계 질서의 비밀과 기독교

  5-6년전에 교회에서 사역할 때, 한 권사님이 제게 책을 한 뭉치 가져오셨습니다. 직접 읽으셨던 책, 새로 산 책들이었는데, 그 책들을 보면서 권사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나에 대한 아껴주시는 마음을 느낄수 있어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 책(신세계 질서의 비밀)의 제목이 수상쩍었고 목차를 보고는 실망감이 컸습니다. 이름부터 포스가 남다른 이 책은 제가 보기에 음모론에 관한 책입니다. 기독교에서 나름 신실하고 영험하시다는 분들이 열변을 토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저 역시도 어렸을때 무서워하면서도 알아야 한다(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접하면서 자연스레 그런 음모론이나 강경한 주장들이 갖는 한계를 인식하고는 그런 이야기를 구지 찾아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연구소로 책을 옮기면서 이 책을 다시 보았습니다. '이제 그만 휴지통으로 보내자' 생각했는데, 순간 이 책을 주셨던 권사님의 얼굴이 어른거렸습니다. 그 교회를 떠나온 뒤에 연락을 따로 드린 적은 없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권사님의 순수하고 신실한 신앙과 성실과 애정이 뭍어나는 삶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 권사님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앞으로 내 자녀가 내 친구가 읽어볼지도 모르는 주제이니 제대로 한번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책은 반나절이면 읽을수 있는 분량이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읽는 동안 이 책의 저자가 느꼈을 불신과 두려움이 그려졌습니다. 그 마음을 생각하니 도리어 제 마음이 먹먹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말씀을 붙들지만 동시에 그 말씀이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류의 음모론으로 사람을 휘두르는 것이 이단이나 사이비종교의 전통이나 철학, 사상만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도 깊이 베어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우리는 저마다 혹은 함께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이때 한편에서는 나의 무능력과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서 답을 찾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모든 책임과 원망을 외부에서 찾고자 합니다. 음모론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면 그냥 순응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문제를 해결 하려는 시도들을 합니다. 그런 개혁의지는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열망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제시하는 것이 종교이고, 이용하는 것은 이단 사이비입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주목받게 된 신천지 같은 이단 역시 (자신들의 탐욕을 담은) 신세계 질서를 꿈꾸고 있고, 그 일을 은밀히 진행하려 한다는 점에서 신세계 질서의 비밀의 한 아류라고 볼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는 이런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소망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간단해 보이는 내용이 당연해 보이고 그래서 어떻다는건지 의문이 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내용이 음모론/신세계 질서에 대한 우려를 벗어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복음은 어렵지도 않고 비밀도 아닙니다 ㅠ.ㅠ) 

  이 글을 통해서 음모론을 소개하는 책 내용을 짚어보고, 이런 음모론의 한계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 신세계 질서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 책이 말하는 신세계 질서의 비밀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음모'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같은 조직들이 말하는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가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삶을 피지배층으로 만들고, 자유를 박탈하려 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지배자가 적그리스도이다는 내용의 음모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머리말에서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주인공 네오에게 찾아와서 겉으로 보이는 현실과 그 이면에 움직이는 실제의 삶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는 장면을 인용하며, 음모의 실체를 알라고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합니다.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목적은 이렇습니다.

 이 책은 누가 프리메이슨인지, 어던 단체가 신세계 질서를 따르는 지를 폭로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는, 이러한 거대한 음모가 추상적이고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매우 폭넓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속기 쉽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애썼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하늘의 모습은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들은 놓치는 위선자"(마16:3)들이 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썼다. (p.8 머리말)

 이런 목적을 가진 이 책은 이 음모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떻게 음모를 실현하려고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2-1. 세상에 드러난 음모?

  먼저, 그 음모의 내용은 비밀조직 일루미나티가 재앙과 사고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밀히 실행되는 계획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요?

  저자는 이것이 소설과 카드게임을 통해서 세상에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들이 은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테러와 재난, 재해, 정치권과 언론의 매수, 개인정보 수집,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하는 것, 병을 만들어 돈을 버는 제약회사, 인구 조절(대량 살상 계획), 에너지 위기 유발, 기독교배제, 인본주의 역사와 진화론 과학 주입, 개인의 자유와 권리 억압, 적그리스도의 등장, 3차 세계 대전을 통한 세계정부 수립 같은 내용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이 음모가 일루미나티 소설과 카드게임, 덴버공항 벽화, 자연재해를 통제하는 무기, 원인모를 질병과 연관된 구름 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이 의도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세상에 드러났다고 합니다.

*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일루미나티의 계획이라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기도 합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때문? - 평화나무

[평화나무 박종찬 기자] 중국 우한 지역에서 발병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해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음모론이 다시 창궐하고 있다.전쟁ㆍ테러ㆍ재해마다 등장하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음모론은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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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는 자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런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는데, 저자는 이런 음모를 꾸미는 세력으로 저자는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뉴에이지, 장미십자회를 지목합니다.

프리메이슨

 프리메이슨은 중세교회나 성곽을 건축한 석공 조합에서 유래했지만,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석공 건축이 쇠퇴하면서 일반 단체로 전환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프리메이슨이 겉으로는 친목 봉사단체를 표방하지만 이집트 신비주의 종교와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를 믿고, 비밀리에 운영되는 거대 음모 세력이라고 소개합니다. 미국 역대 대통령의 50%가 프리메이슨 소속이고, 미국의 대부분의 언론사 CEO, 이사, 편집장, 기자, 앵커, 금융, 자원, 에너지, 농업, 식품, 유통, 제약, 통신, IT, 군수, 미디어 관련 대기업도 대부분 프리메이슨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그래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논리인듯 합니다)

  프리메이슨의 흔적을 찾는 기준은 피라미드(삼각형), 독수리, 호루스(이집트 신화 속 인물), 전시안, 오각별, 육각별, 햇살, 횃불, 여신, 666,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나올때마다 그 세력의 일부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세력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 의미를 모르고 몸에 지니고 다녀도 악마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해설: 하지만 이집트 사람들은 호루스의 눈을 치유의 부적으로 사용했다고 하죠)

프리메이슨 로고(직각자와 콤파스)
호루스의 눈 
전시안

 이외에도 경제문제를 프리메이슨의 음모로 봅니다. 선진국인 미국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연방준비은행(FRB), 빚, 경제공황, 물가상승, 달러화의 몰락 예측 같은 내용을 프리메이슨과 연관시킵니다, 그 이유로 미국 경제에 주요한 영향을 끼치는 로스 차일드 가문, 록펠러 가문, J.P. 모건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식입니다. 

 프리메이슨이 하려고 하는 일은 무시무시(?) 한데, 저자는 전직 MI-6(영국 정보기관) 요원이었다가 프리메이슨 연구가가 된 존 콜먼이 제시한 '프리메이슨 300인 위원회가 다음과 같이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통합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1) 300인 위원회의 감독 아래 통일된 교회와 금융제도를 가진 단일세계정부One World Government를 확립한다.
(2) 모든 국민국가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철저히 타파한다.
(3) 마인드 컨트롤과 브레진스키가 말한 '테크노트로닉스Technotronics, (감시 사회)를 이용하여 모든 개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
(4) '탈공업화 성장 제로 사회'라는 정책에 근거하여 모든 공업화와 핵에너지에 의한 전력 생산에 종지부를 찍는다. 컴퓨터와 서비스 산업은 예외다.
(5) 마약 복용을 부추기고 합법화시킨다. 포르노를 '예술' 로 널리 받아들이게 하고 마침내 일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6) 대도시 인구를 격감시킨다.
(7) 과학 발전은 300인 위원회가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제외하고 억제한다.
(8) 선진국에는 국지전을 일으키며,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전염병을 퍼뜨리고 기근을 일으켜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30억의 사람들을 2050년까지 제거한다.
(9) 대량 실업을 일으켜 국민의 도덕심과 노동자의 생산 의욕을 떨어뜨린다.
(10) 위기 상황을 연달아 일으키고 이를 '관리' 함으로써 모든 인간들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11) 새로운 '컬트' 들을 들여오고 이미 제 몫을 하고 있는 록 그룹 같은 것들을 밀어준다.
(12) 세계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정치적인 혼란을 빚게 한다.
(13) UN,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결제은행BIS, 국제사법재판소ICJ와 같은 초국가적 제도를 강화시키고 국지적인 기관들은 약화 혹은 폐지시킨다.
(14) 모든 정부의 중추에 침입하여 정권을 타도하고 정부가 대표하는 국가 주권을 내부에서부터 파괴한다.
(15)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단체를 조직하고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그들과 교섭한다.
(16) 미국의 교육을 통제하고 철저히 파괴한다.
(p.155-156 프리메이슨의 조직과 운영)

 

일루미나티

 일루미나티는 예수회 소속 교수가 프리메이슨 사상과 계몽주의 사상(루소)을 결부시켜 1776년에 창립했다고 합니다. 이 단체의 목적은 모든 왕정과 시민사회와 종교와 가족제도와 사유재산을 말살하고, 루시퍼를 믿는 종교 하의 단일 정부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기독교에 기초한 유럽 왕조를 타도하는(계몽주의로 대변되는 인본주의와 자유, 평등을 내건 혁명사상을 확산시켜 전통적 토지 귀족을 밀어내고 근대 정부를 세우는) 시도를 한다는 겁니다.

 일루미나티가 일으킨 혁명으로 유럽의 왕정 국가에 혼돈을 주자 일루미나티는 반역집단으로 여겨져 1984년에 금지 해산되었는데, 일루미나티 조직원이 소지하고 다니다 벼락을 맞아 죽은 뒤에 발견된 <시온의 정서(The Protocols of Elders of Zion)>로 인해 세계 정복 비밀 전략이 노출되어 박해를 받았고, 그 이후에 프리메이슨 조직으로 숨어 들어와서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다고 합니다.(역사가들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온의 정서'라는 책 자체가 오히려 유대인을 박해하려는 음모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리메이슨 하부 멤버는 이 사실을 알수 없고, 음모들을 추진하는 고위직은 모두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의 핵심 지도층?)라는게 저자의 설명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이들이 하려고 하는 일로 제시된 7대 목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모든 개별 국가의 파괴
(2) 모든 종교의 파괴 그러나 사탄주의는 제외
(3) 가족제도 폐지
(4) 사유재산 제도 폐지
(5) 고율의 상속세로 상속권의 폐지
(6) 애국주의 파괴
(7) 일루미나티의 통제를 받는 국제 연합 아래 세계정부 창조
(p.164 사탄의 빛을 받다, 일루미나티)

 

뉴 에이지 New Age

 뉴 에이지는 유일신을 부정하며, 범신론적이고, 개인이나 집단의 영적 각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흐름인데, 저자는 이를 '과학주의, 진화론, 유물론적인 생명관을 토대로 한 인간 중심의 낙관적인 생활철학과 무신론을 골자로 하는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결과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변질되었고, 윤리관이 무너졌고, 범죄와 이혼과 자살이 급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마인드 컨트롤, 최면술, 요가, 명상, 마법 등을 통해 세계 모든 종교를 수용하는 '종교통합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꼽는 이들의 활동은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WCC(세계 교회 협의회)를 비롯한 기독교계에 침투하여 타종교와 대화를 하게 한다고 합니다. 특히 이런 흐름에 있는 목회자로 로버트슐러(LA 수정교회, 최근에 파산한 대형교회), 릭워렌(새들백 교회,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한국에서도 유행), 조엘 오스틴(레이크우드 교회, 긍정의 힘 저자)을 의심하고 있고, 이중에서 로버트 슐러 목사는 통일교(교주 문선명이 프리메이슨이라고 함)와 교류 했었고, 릭워렌은 프리메이슨 멤버라고 강조합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뉴 에이지(New Age)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습니다.

(1) 이 계획의 주된 목표는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단일세계종교와 단일세계정부를 세우는 일이다.
(2) 이 운동은 비밀스런 의식, 마법, 신비주의, 바빌론 종교를 부활시킬 것이다.
(3) 이 계획은 뉴에이지 메시야 즉, '666' 이라는 숫자를 지닌 적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와서 통합된 뉴에이지 종교를 이끌고 '신세계 질서'를 이룩하게 될 때 완성될 것으로 믿는다.
(4) 영적 안내자들은 인간이 뉴에이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적그리스도가 세계적인 대스승으로 인류에게 존경을 받는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5) 이 운동의 표어는 사랑, 평화, 단결이다.
(6) 이 운동에 대한 교육은 전 세계의 모든 사회 계층까지 전파되고 진행될 것이다. 특히 모든 학교에서 뉴 에이지 교리를 주입시키고 교실은 뉴에이지 교육장으로 사용될 것이다.
(7) 모든 인류에게 '인간 자신이 신령한 신'이라고 믿도록 교육한다.
(8) 과학과 뉴 에이지 세계종교는 하나다.
(9) 이 운동의 지도자들과 신봉자들은 예수는 신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님과 기독교의 교리는 배척해야 함을 전해야 한다.
(10)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은 뉴에이지 세계종교에 종속되어야 한다.
(11) 계획을 거부하는 자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특히 반대하는 크리스천들은 모두 몰살시켜서라도 세계를 정화시킬 것이다.
(p.173 성공의 유혹, 뉴에이지)

 

장미십자회

 저자에 따르면 장미십자회(Rosicrucians)는 1400년대에 독일 귀족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고대 종교와 카발라, 연금술과 기독신앙을 혼합한 중세 유럽의 오컬트적인 비밀 결사라고 합니다.(오컬트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으로 물리적 영역 이외의 다른 영역에 대한 탐구를 하는 형이상학적인 과학이라 할 수 있으며, 영성주의 또는 영성과 관련이 더 깊다. 출처: 위키백과) 이 단체의 상징을 보면, 십자가는 구세주의 지혜(구속과 부활)를 상징하고, 장미는 연금술에서 더러움을 정화시켜 완전으로 가는 작업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장미 십자가를 통한 명상으로 절대적 신성과 만나는 신비 체험을 할수 있다고 여겼고,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17세기 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끼쳐서 신비주의와 기독교 신학을 결합시켰다고 합니다. 19세기에 와서 프리메이슨이 장미십자회의 사상을 흡수했다고 하는데, 장미십자회의 궁극적 목적은 개개인의 영화(spiritualization,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유사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실제로는 비전(비밀리에 전수되는)의 원리를 따른다고 합니다. 

 저자가 우려하는 이 단체의 특징은, 영성의 추구가 영적 연금술을 통해 초월적 존재가 된다는 생각(신일 합일 또는 일반 인간이 모르는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여기는 신비주의, 성경보다는 주로 체험에 근거함, 단학, 증산도, 타 종교들도 이런 체험을 이야기함)이며, 영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비밀 지식 전수에 관한 부분입니다. 장미십자회 계열 오컬트 교단 중에 AMORC(Ancient andMystical Order Rosac Crucis)가 25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국제조직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합니다. AMORC는 12개의 계급을 갖는데 10-12계급은 여러차례 환생을 거쳐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군사력과 돈으로 신세계질서를 만들려고 한다는 설명.

2-3. 신세계 질서의 구체적인 모습

 앞에서 이 비밀스러운 음모를 진행하는 주체로 지목받은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뉴 에이지 세력(?)과 장미십자회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설명했지만, 저자는 이들이 하려는 구체적인 내용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정부수립, 베리칩, 마인드 컨트롤 노예, 인구축소계획, FEMA수용소, UFO를 통한 미혹, 종교통합, 세계정부 통치자(적그리스도)입니다. 

세계정부수립

  먼저 이 음모세력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정부의 수립입니다. 세계정부수립을 위해서는 위기감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각 나라들을 통제불능의 혼란으로 몰아넣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루미나티의 비상체제를 수용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국제적인 기구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활동과 그들의 활동을 지지하는 모든 행동을 음모세력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UN은 물론이고,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 국제통화기금 IMF, 국제형사재판소(세계법정, 대량학살, 반인륜 범죄, 전쟁 범죄, 공격범죄를 다룸), G-20, EU, 아시아연합, 아프리카연합, 아메리카 연합에 대해 세계정부를 수립하려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음모론자들은 어떤 어려움이 생기는 것 자체, 혹은 그로 인해 국제적인 도움을 받거나 연대를 하려고 하면 비밀세력의 세계정부수립을 떠올립니다)

베리칩

  베리칩은 사람 몸 안에(피부 밑에) 삽입하는 작은 칩으로, 의료정보와 그 외에 정보들을 넣어 ID 구별을 하게 해주는 칩입니다. 음모론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 칩은 앞으로 단일세계정부가 세워졌을 때 국민에 대한 감시와 통제 수단이 될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또한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온 짐승의 표 666이 될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미 많은 신학자들이 요한 계시록의 666은 로마황제를 돌려 표현한 것일뿐, 문자적 의미로 실제 어떤 표를 받는게 아니라고 설명했고,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어떤 표를 받는 것 같은 외부적 형태에 의해 결정되는지도 의문이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인드 컨트롤 노예

  마인드컨트롤 노예는 그 내용상 무척 심각한데, 미국의 정부기관에서 캐시 오브라이언('뜨거운 역사, 추악한 진실'의 저자)을 마인드 컨트롤 연구에 이용해서 성적인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인드 컨트롤에 대해 저자가 소개한 부분을 읽어보면 그 공포감을 헤아려볼수 있습니다.

캐시는 항공우주국NASA이나 군사 기지에서 모나크 프로젝트[정신을 해리(의식,기억,정체감,지각 등의 붕괴)시키는 잔혹한 충격기반 마인드 컨트롤]에 따른 마인드 컨트롤 훈련을 받았다. 전기 충격으로 고통이 가해지고, 최면이나 고주파로 기억과 인격이 분리되면 무의식 상태가 되어 자유의지와 사고 능력을 잃게 되며, 명령받은 일을 의문 없이 수행하게 된다.
(p.220 마인드 컨트롤 노예)

  저자가 제시하는 마인드 컨트롤은 일루미나티가 단일 세계정부를 세우기 위해 개발한 인간의 정신과 행동 통제기술이라고 합니다. 일루미나티의 마약 운반, 매춘, 포르노 촬영, 대중 음악, 암살, 변태 성행위 등에 사용할 노예를 만드는데 적용되고 있다고 확언합니다. 그런 가능성을 엿볼수 있는 유사한 사례로 LSD(환각제)를 활용한 심문 시도, CIA와 미군 실험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뇌칩

  그 외에도 두뇌칩을 통해 인간의 뇌파를 읽고 프로그래밍 된대로 사물을 조종할수 있게 되었다는 BBC뉴스를 인용하면서, 이 기술을 역으로  이용하면, 외부전자기파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조종할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사례들로 레이디 가가, 비욘세,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팝스타들(첨가: 한국은 설리, 최진실의 죽음을 그들의 조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이 마약, 알코올, 이혼하는 삶을 사는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이런 모습이 그들이 조종 받고 있거나 그 조종 받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런 스타들을 일루미나티와 연관지어 보려는 시도는 이들의 뮤직비디오 같은데서 호루스 전시안이나 마귀 뿔 싸인, 피라미드 모양 같은 (앞서서 언급했던 문양들) 장면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구축소계획

  인구축소계획은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로버트  멜서스의 인구론에서 기인하는데, 지구에 살기에 적당한 인구수를 30억명정도로 추산합니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질병이나 재해를 일으키고, 혹은 강압적으로 학살해서라도 인구를 축소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음모가 있다고 합니다. 저자와 음모론자들은 엘리트들이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생물학 무기를 개발한다고 의심합니다.

  예를 들면, AIDS가 실험실에서 만들어졌고, 신종 전염병(신종플루와 사스, 슈퍼박테리아)이 생기고 있고, 백신들이 효과가 미흡하거나 부작용을 일으키고, 식품첨가물(아스파탐 : 설탕의 200배 단맛을 내는 화합물질로 껌, 과자, 다이어트 음료, 막걸리, 소주, 코크-제로 등 5천종에 달하는 다이어트 식품에 사용되고 있다) 역시 '두통, 현기증, 정서장애, 구토, 구역, 복통, 시력저하, 설사, 발작, 경련, 기억상실, 피로, 허탈감, 수면 장애, 두드러기, 심박동 변화, 생리 주기 변화' 같은 부작용을 일으키고, 충치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불소 성분이 인간의 몸에 유해한데도 이런 것들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속이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겁니다. 이외에도 식량 생산을 감축하고 곡물 가격을 올리고, 석유 가격을 올려서 국제적인 분쟁을 유발해서 인간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합니다. 음모 세력이 이런 일을 꾸미는 목적은 인구를 줄이는 것과 세계 정부 수립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FEMA 수용소

  이외에도 미국의 정부기관인 FEMA(연방비상관리국)를 세계정부 계획의 일환으로 바라봅니다. 본래 FEMA는 핵전쟁 발발시 미국 연방정부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고안되었고, 2차적으로 지진, 홍수, 허리케인 등 재난 상황에 치안과 구조를 담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상사태 시 군, 경찰, FBI 등은 FEMA의 지시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이 FEMA가 정말 그런 단체인지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종종 목격되는 소속이 쓰여지지 않은 비밀 헬리콥터들을 이 기관의 소속이라고 추정합니다.  음모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 기관이 미국 헌법 위에 있는 것이라고 보며, FEMA 수용소 건물 외곽에 둘려있는 철조망 담벽락이 안쪽 방향으로 되어 있는 점을 볼때, 외부의 진입을 막는 게 아니라 내부의 탈출을 막는 용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이 수용소가 세계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자들을 격리수용하는 감옥일 것이라고 의심을 보냅니다.(이 음모론은 저도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우리나라 독재시대 삼청교육대 같이 될거라고 보는 듯 함)

UFO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 미확인 비행물체, 외계인이 사용하는 우주선을 가리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존재 여부와 다양한 버전의 이야기들이 있고, 종교집단화 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 UFO가 신세계 질서와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저자가 갖는 의혹은 크게 2종류입니다. 먼저는 UFO가 실제로 존재하며 외계인들과 거래를 통해 과학기술의 진보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UFO와 외계인 세력을 등에 업고 힘으로 세계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전개됩니다. 또 다른 의혹은 UFO는 실제로는 없는데, UFO로 보이게 하는 위장 기술을 통해 세계적인 위협을 가하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 세계정부를 수립하려고 한다는 주장입니다. 양 극단의 전혀 다른 시나리오지만, 이 두가지 모두를 의심하는 증거는 ET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로 문화에 젖어들게 해서 사람들이 외계인에 대해 익숙하게 여기도록 한다는 점을 제시합니다.(없는데 있다고 믿게 하거나, 악한 존재인데 선한 존재일거라고 세뇌하는 용도로 보는 듯 합니다)

종교통합운동

  저자는 신세계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세계종교통합을 꼽습니다. 2000년 8월 UN본부에서 13개 종교 대표들이 세계종교 화합을 명목으로 모인 것과 UN의 평화 정책을 위해 종교 역량을 지원하는 단체인 세계종교지도자위원회에 대한 우려의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계에서 UN역할을 하도록 고안된 종교연합기구(United Religion Organization)가 세계평화와 지구의 신성함을 보호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2000년부터 종교연합계획(United Religious Initiative)으로 바뀌면서 세계 78개에 기반을 가진 종교간 화합 조직인척 하면서 사실은 사람들을 단일 종교의 우산 아래 끌어들여 그들이 단일 정치체제 하에 들어갈수 있도록 만들려고 한다고 의심합니다. 

  심지어 이런 일련의 운동에 핵심인물은 사탄숭배자들이 관여하고 있다고 하는데, 기독교 단체를 통해 세계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뉴에이지 단체를 통해 신비주의 사상을 확산시키고, 교육계를 통해서 자아발견과 자기계발로 인간의 신격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운동에 UN과 그린피스, 앰네스티, 유니세프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세계정부 수립과 연관되어 있다고 의심합니다.(이런 종교간의 교류와 국제 단체의 지원을 모두 음모세력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듯 합니다)

  저자는 그런 종교통합운동의 한 사례로 세계교회 협의회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후 WCC)를 의심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운동(쉽게 이야기하면 같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면 함께 할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대화를 나눠보자는 모임)이 목적이라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이면에서는 초자연적 현상과 생명 공동체, 사회 윤리, 공동선교, 지구촌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보다 더 반대하고 우려하는 것은 그 모임 안에 함께 하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를 보면서, WCC가 공산주의와 타종교 역시 하나님께로 가는 구원의 길을 가질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일련의 의심은 WCC가 종교통합을 위한 프리메이슨의 하부 조직이라고 보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특히 저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교단이 WCC 반대 성명을 낸 것을 근거로 삼아, WCC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의 무오성 부인, 정통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거부, 변질된 성령론 주장, 개인 영혼 구원의 중요성 관과, 종교 다원주의 신학에 근거, 동성애 용인, 복음전도와 선교를 통한 구원의 간과를 문제 삼았던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의식이 그 자체로 나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기에 오히려 정말 그러한지 살펴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하지만, WCC안에 있는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본인들도 이런 내용들을 다 동의하고 지지하는게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신학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런 다양성(서로 다름)을 열어두고 대화해보자는 취지라고 합니다. 물론 WCC반대 성명을 낸 합동교단은 신학적으로 좀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음모의 세력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음모론을 추종하시는 분은 WCC의 취지를 신뢰하지 않으며 음모를 꾸미는 세력의 일로 여깁니다)

 그 외에도 UN에 있는 이해의 사원(Temple of Understanding, 종교 간 평화를 위해 설립된 비정부조직 NGO이자 UN의 자문기관)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유로 우려의 시선을 보냅니다. 이해의 사원의 목적이 종교적 다양성을 이해시키고, 건설적인 사회를 촉진하며, 세계 시민의식을 교육하려고 한다고 하지만, 그 공간의 바닥이 피라미드 같은 사디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점, 프리메이슨 관련 기관들과 연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타 종교에서 사용하는 오컬트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종교 통합을 위한 시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세계 정부 통치자, 적 그리스도

  음모론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은 바로 적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경배하지 않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모든 사람에게 짐승의 표를 삽입해 감시할 것이라고 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베리칩을 666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예전에는 바코드, 신용카드를 666이라고 했었죠) 성경에 나온 적그리스도는 일곱머리와 열뿔을 가졌는데, 이 열뿔에 해당하는 나라들을 EU 중에서도 서유럽연합 10개국이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합니다.

런던시 문장 (출처: flicker)

  또한 적그리스도 출현 가능성을 프리메이슨의 수장을 맡고 있는 영국왕실로 지목하는데(이미 브렉시트로 가능성이 희미해졌겠지만?) 그 근거들은 런던 시의 문장과 찰스 황태자의 문장입니다. 런던시의 문장은 템플 기사단과 비슷하고, 방패 양쪽에 용 두마리가 있고, 그 밑에 'Domine Dirige Nos 신이여, 우리를 인도하소서'라는 글귀가 쓰여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용이 성경에서 사탄이니까, 여기서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라고 해석합니다) 찰스 황태자의 문장에는 방패 좌우에 왕관을 쓴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져 있는데, 이 사자가 표범의 몸과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하고 있어서 게시록 13:2의 적그리스도 예언과 일치하고, 오른쪽 유니콘은 계시록 20:1-2의 천사에게 쇠사슬로 잡힌 사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하지만, 찾아보면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연합해서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공식 명칭도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입니다. 연합의 개체인 잉글랜드는 사자를, 스코틀랜드는 유니콘을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United Kingdom이 되면서 문장이 합쳐졌는데, 지금도 스코틀랜드 내에서는 여전히 유니콘만 있는 문장을 사용합니다. 게다가 찰스 황태자는 66년째 황태자인데 언제 왕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고, 그의 나이 때문에 어쩌면 그의 아들이 곧바로 왕위를 이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즉, 이 음모론이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는거죠.)

계 13:1–2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계 20:1–2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찰스 황태자의 문장(스코틀랜드 외) (출처; 나무위키)
찰스 황태자의 공식문장 스코틀랜드 (출처:나무위키)

 

 2-4. 음모론자들의 현실과 삶의 자세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저자는 지금을 성경의 예언과 일루미나티의 세계통치 계획이 현실로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앞서서 책의 내용을 소개한 것처럼 모든 것이 신세계 질서를 향해 척척 들어맞아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저자와 생각을 같이 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상황에 선택할 길은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런 음모세력의 의도에 순응해서 짐승의 표를 받고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삶을 이어가다가 심판을 받는 것(심판 이전에는 음모세력에 가담한다면 부와 권력을 누릴수도 있겠죠),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음모세력에게 박해를 받다가 심판때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여전히 악이 득세하려는 세상이 무섭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까봐 두렵고, 내가 그 일부가 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보이는 첫번째 반응은 이런 세상에서 싸우려고 합니다. 이 싸움을 하기 위해서 힘(사람들, 돈,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서 못살고, 실력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못살고, 빽이 없어서 못살겠다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교회 안밖에서 볼수 있듯이, 상위 1%가 되면 안전하다고 느낄 것 같지만, 도리어 그들은 더 높은 장벽을 쌓고 자신이 도퇴될지 모르는 미래를 두려워 합니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보이는 또 다른 반응은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는 것은 모든 신자의 바램이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종교생활 안에 갖혀버립니다. 교회안에서 믿는 자들과의 관계안에서 위로를 받는 것, 예배를 통해 은혜를 누리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들에게는 천국에 가기 전까지 이 땅은 지옥이거나 지옥으로 향하는 시험과 유혹의 공간이자, 환난과 핍박의 시간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무한 경쟁속에서 힘과 효율에 목말라 있는 모습이 이 두가지 반응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다거나 힘이 필요없다는 말도 아니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매몰되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자는 겁니다.


3. 정말 그러한가?

  이제는 이 책이 다루는 음모론의 한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짚어보겠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들은 그동안 살면서 한번쯤은 접해봤던 이야기입니다. 아마 지금까지 접해보지 않으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10년 내에 '어머, 이런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정말인가?' 하고 귀가 솔깃하는 순간을 만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음모론을 추종하는 분들은 이 음모론을 사실로 여깁니다. 그래서 아주 진지하고 영혼 사랑과 구원의 열정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음모론은 거짓뉴스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 내에도 이런 음모론 추종자들과 비슷하게 아주 진지하고 구원을 위해 극렬하게 반응하지만, 거짓 뉴스를 검증하지 못한데서 기인한 반응이라 카톡교가 아니냐고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전문가와 신학자들이 나서서 이 음모론에 대해 연구하고 진실을 밝혀도, 그들의 의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동원된 논리들을 반박하며 좀더 진화를 거듭하곤 합니다. 물론 이런 음모론 중에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있을수 있고 그 진위를 분별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음모론이나 거짓 뉴스를 접할때마다 느끼는 불안감은 정말 그러한지 사실을 확인(팩트체크)하기 버거운 경우에 생깁니다. 그대로 믿기도 애매하고, 안믿기도 찝찝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가지 방법으로, 음모론(혹은 거짓뉴스)들이 갖는 특징들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음모론의 특징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비추어 교정하면 다른 삶의 태도를 가질수 있습니다. 

이런 그림과 같은 상상을 많이 하지만 잘못된 성경관이다. (그림 출처: 구글검색)

3-1. 선과 악에 대한 오해, 순수 악에 대한 환상과 본질

 이 책에서 나타난 프리메이슨 300인 위원회 계획이나 일루미나티의 7대 목표를 보면, 소수의 엘리트로 여겨지는 특정 집단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고,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인간성을 말살하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며 악랄한 존재들이 됩니다. 동시에 그들에게는 어떤 선한 것도 기대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를 가리켜 순수 악이라 할수 있습니다. 순수 악은 선과 대항하는 개념으로 절대 악의 개념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를 빛과 어둠으로 바꾸어 혼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선과 악의 대립 구조는 많은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매우 보편적인 생각이며, 성경 안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개념입니다.(아래 성구 이외에도 많죠) 

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3-1-1. 순수 악이라는 환상

(1) 인간의 어두운 악의 한계

  하지만 현실 속에서 순수 악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순수 악은 내가 상상하는 환상입니다. 악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순수 악은 없습니다. 포스트모너니즘 시대에 극렬하게 드러난 것이 악 안에 있는 선, 선 안에 있는 악입니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치르고 휴전상태에 있기에, 이전에는 북한을 늑대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굶주려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이라거나, 그들이 행한 악을 부정하는게 아닙니다. 다만, 악을 행하는 이들 안에도 그들 나름의 이유와 선한 부분도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 안에도 악이 존재할수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안에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면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대표적으로 가족 안에서 무수히 경험합니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간에 서로 사랑하는게 분명한데도 어느 때에는 죽일듯이 미워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는 상대방이 잘못되었고 악의 편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더 성찰적인 경우에는 내가 잘못한 부분을 알아차리며 나의 악함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말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2) 사단의 본질적 악의 한계

  이런 논의를 좀더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도 악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악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선이신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적할수도 없습니다. 악은 언제나 선이신 하나님의 심판/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음모를 꾸미는 세력들이 사단에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악랄함을 꾸미고, 거짓으로 우리를 속이려고 한다고 해도, 그런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만물의 절대자이십니다. 사실, 그 악의 주체라고 할수 있는 사단도 본래는 하나님의 천사였다가 자기 자리를 떠난 자입니다(유다서 1:6). 이것이 무서워 보이는 사단의 악함의 한계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듯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로 구원과 회복을 이루십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등장하는 바로(애굽 왕,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박해함)나 하만(유대인을 말살하려다가 에스더와 모르드개에 의해서 실패함)은 분명히 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편에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순수 악, 절대 악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이나 에서를 비롯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민족도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지는 않았고, 문제가 많았지만 그들 역시도 순수 악, 절대 악이 아닙니다. 그들의 악함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훼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원죄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게 유혹한 뱀도 사단이 분명하지만, 그(뱀)도 본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의 일부였습니다(창 1:31, 3:1a). 또한 그는 자신의 악함으로 인간이 범죄하게 했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과 겨루어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뱀(사단)이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자와 후손입니다. 그마저도 여자의 후손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겨우 발꿈치를 상하게 할뿐입니다(창3:15). 사단도 순수 악, 절대 악이 아니라면, 사단의 사주를 받고 그에게 능력을 받는다고 의심받는 음모세력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3) 성경이 말하는 악

  도덕적인 악행이나 사람에 대한 억압, 종교적 혼합의 시도는 분명히 악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악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좋은 예물을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마냥 기뻐하고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암 5:21-22). 성경이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를 두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 우상숭배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악이고, 가인에게 죄를 피하라고, 죄값을 받으라고 하는데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악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하고 떠나는 것이 죄이며, 그 상태가 악입니다. 

 

3-1-2. 순수 악의 본질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앞선 논의에서 언급한 '순수 악'을 상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순수 악을 상상하는 배경에는 우리는 악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악하다는 실존적 상황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악을 다루는 정상적인 방법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이신 하나님 앞에 그리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는 세상, 내가 하나님이 되는 세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악을 다루기 위한 다른 방법으로 내게 들어온 악의 유혹과 무게를 순수 악에게로 투사시킵니다. 어쩌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악의 화신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대개는 타인에게 원인이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며 그를 순수 악으로 상정합니다. 이것이 제가 정의하는 '상상속에 존재하는 순수 악의 본질'입니다. (전자는 자기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것이고, 후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거부한 것입니다)

(1) 기독교의 악에 대한 반응

  실제로, 우리가 이미 보고 듣고 경험하는 삶에서 마주하는 악을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훌륭했던 목사님들이 노년에 추문에 휩싸이고, 건강한 교회로 알려졌던 교회가 부정과 비리로 얼룩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 기업, 집단, 국가가 한편에는 악을 온전히 밀어내지 못하고 끌어 안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 우리는 그들의 가식적인 모습, 이중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고, 분노하고 절규합니다. 이 지점에서 음모론을 추종하는 분들은 그런 모든 오류들을 프리매이슨과 연결지어 나, 우리 라는 정체성에서 벗겨내고 싶은 것이 이 음모론의 동기이자, 가상의 순수 악을 떠 올리는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꼭 음모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악을 저지른 그들이 원래 구원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보는 견해를 갖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 악으로 투사하는 것입니다.

(2) 성화의 과정에 경험하는 실존적 악

  하지만, 정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보면 우리 안에도 크고 작은 죄들이 끝없이 솟아나는 것을 마주하게 됩니다.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지만 여전히 걷어내어지지 않는 삶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선을 행한다고 해도 세상에 사는 동안, 어느 특정 순간을 기점으로 거룩한 완전체가 되지 않습니다. 성화가 이루어져 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화의 완성은 하나님 앞에서는 날에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고(딤전1:15), '바울이 스스로를 곤고한 자(롬7:24)'라고 절망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그를 순수 악에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며 알듯이, 죄를 짓기 원하지 않았지만 죄를 지었던 과거(또는 현재)에 대한 성찰적 자세에서 나오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우리가 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기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수 있고(요8:12),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은 개인이 아니라 너희, 팔복의 말씀을 듣는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소금과 빛으로 여기셨으니 그렇게 살라는 의미이지, 우리(인간) 자체로 소금이나 빛이라는 의미나 빛이나 소금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3)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51:17)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예배는 우리의 거룩함이 빛나는 예배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존적으로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상하고 통회하는 모습, 그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이 지점에서 복음이 선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실존적 악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안 짓는 자가 되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병든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 죄인에게 구원자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회복할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 피조물로 삼으셔서 새 삶을 살게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죄와 악을 거절하고 나와 세상을 개혁하려고 애쓰지만 여전히 그 안에서 고통하는 우리의 삶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며, 그 구원의 복음으로 샬롬을 누릴수 있습니다.

 

출처; Pixabay. Daniel Reche님의 이미지

3-2. 자유에 대한 혼란, 소중한 자유와 위험한 자유

  음모론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자유에 대한 혼란입니다. 먼저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세계단일정부가 들어서고, 666을 받게 해서 통제하거나 죽일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좀더 극단적으로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뇌를 당하거나 조정당하는 노예가 되는 것을 걱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유를 빼앗기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염려가 전혀 쓸데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인류 역사에 노예제도가 존재했었고, 오늘 날에는 노동력을 돈으로 환산하면서 노동력을 넘어서서 노동하는 주체로서의 사람을 기계처럼 이용하려는 시도들과 그에 대한 부당함이 충돌하며 갑질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한 이 세대의 인류는 점점 편리하고 부요한 삶을 살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기계나 시스템에 맡기고 의존적으로(수동적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그리하지 않고, 주로 자신이 신뢰하는 정부와 기업에게 그리 합니다. 때로는 훌륭한 목회자, 정치인, 기업가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하려고 하기도 하고 좋은 교회, 좋은 회사, 좋은 집안(?)에 맡기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를 상기해야 하며, 내 자유가 상실 되는 것을 분명히 염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음모론이 힘을 잃는 부분은 바로 이런 일련의 행동에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박탈 당하는지의 여부를 염두해야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유로이 선택할수 있고, 선택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원치 않는 경우에는 그 동일한 자유로 우리의 자유가 침해 받는 것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음모론자들은 이 부분이 그럴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점을 부각시키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의지가 들어간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3-2-1. 영적전쟁,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

 성경은 영적인 존재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 본문에서 말하는 바를 오해하면 김기동의 귀신론이나 세상에서 진리처럼 숭배되는 능력대결로서의 영적전쟁의 개념을 갖게 됩니다. (이는 다시 선악 세계관, 힘의 세계관과 맞물려서 왜곡되고 비틀어집니다) 하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점은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이 아니라 그 영적인 싸움이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는 '우리의 싸움'인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엡 6:12)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사단은 그 자체로 악해서 악한 일을 꾸미고 실행해서 홀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단은 인격(지정의)을 갖춘 악한 영으로 인간을 속이고 고소하고 두려워하게 함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복음을 차단합니다. 사단의 주요 전략은 속임과 고소 하는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 답게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속이거나 사실과 거짓을 교모히 섞어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고후11:14 광명의 천사로 가장함, 창 3:1-5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함, 계 12:10 참소/고소 하던자). 하나님과 대적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힘이나 성공을 추구하도록 유혹합니다. 

   선교현장(또는 일상에서도?)에서 종종 나타나는 귀신들림의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존재가 있음과 그 영향력을 분명히 확인하게 해줍니다. 상담분야에서도 정신병리와 귀신들림을 구분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고민은 바로 이미 구원받았다고 여겨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들이 귀신들림이 가능한가하는 지점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내림이 있어서 무당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TV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고, 목회자나 성도의 일탈이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것처럼 악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귀신 들림 역시, 우리가 상대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수 있는가?의 문제는 하나님과 사단의 힘 대결이 아니라, 유혹과 속임에 기초한 악한 영과 사랑과 신실하신 하나님 사이에서 내 안에서/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내가 어느 것을 선택할지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선택은 귀신들림까지도 누구를 주님으로 여기느냐의 문제, 통치권의 문제이며,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누적된 결과로 귀신의 영향, 악의 영향력 아래 있던지, 하나님의 샬롬 아래에 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와 연관된 근거로 뇌과학에서 언급되는 뇌 가소성(brain plasticity: 뇌 가소성이란 뇌가 외부의 자극, 경험, 학습에 의해 구조 기능적으로 변화하고 재조직화 되는 현상)을 들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음란물에 중독되거나, 점점 더 폭력적으로 되고, 우울감이 깊어지는 이유는 그런 선택을 반복한 것이 나를 그런 삶을 살게 한다고 설명할수도 있습니다. 

  GMTC(한국선교훈련원) 이태웅 박사가 소개한 "영적전쟁"에 따르면, "현대 신학의 흐름을 보면, 이전에는 주로 귀신 들림(Demon Possession, 귀신이 사로잡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귀신에게 영향을 받음(Demoniz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자라는 의미도(예, 마8:16), 귀신에게 사로잡혀 꼼짝할수 없는 상태인 것 같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해방되고 자유케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볼때, 귀신 들림은 그 영향 아래에 있던 상태라고 볼수 있다. 사단은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 감정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비롯해 전방위적으로 위협하거나 유혹한다. 조상의 죄, 개인의 죄, 과거의 충격(트라우마), 마귀의 활동에 부주의하게 참여함, 하나님의 섭리가 사단의 이런 활동의 근거가 된다"고 합니다. 

  이태웅 박사는 선교사들에게 귀신들림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는 '어떤 특정한 공식(기계적인 방식으로 몰아내는 의식, 기도문 같은 방법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됨을 분명히 하고 영적인 권위를 갖는 것'을 강조 했습니다. 동시에 어떤 특정한 기질이나 은사의 형태를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하며 그에 맞추려 하는 시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신 다양성을 헤아리며 선교지의 특수성, 개인의 차이를 창조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당부 했습니다. 

 

3-2-2. 내 삶의 주체성, 자유와 선택

  오늘날 사람들의 언어 표현을 보면 "XX가 나를 화나게 해!", "XX가 우리를 ~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는 내 자유와 선택이 박탈당한 상태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은 여전히 내가 선택할수 있고, 선택한 것을 두고 자신의 주체성을 빼앗긴 것으로 왜곡하는 표현입니다. 백소영 교수는 복음과 상황에 실린 [4차 산업혁명 시대, '4세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란 글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특징으로서 창조성, 주체성, 관계성을 꼽았습니다.(참고, [4차 산업혁명시대, 4세대 그리스도인의 소명(백소영)]을 읽고) 그녀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갖는 주체성에 주목한다면, 하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케 하시는(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자로서의 나/우리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할건지를 결정하면 됩니다. 

(1) 창조 때 주어진 자유

  성경 서두에 기록된 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우리에게 지상명령(창 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을 주셨습니다. 자신이 지은 세상을 보며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아담을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마 넘치는 기대로 그리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떤 특수한 일(사과나무를 심고, 그 뒤에 비료를 주고, 풀을 뽑아라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에게 주신 것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으라(창2:16)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또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그에게로 이끌어 오셔서,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부르는 것이 그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을 (내가 보기엔 못미더운) 인간에게 (과감히) 맡기셨고, 그 선택(이름)을 그대로(부르는대로 그 이름이 되도록) 되게 하셨습니다.(창 2:19)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 이외에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사랑의 지점이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자발적인 순종을 기대하며 제공한 자유였지만, 그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어길수 있는 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배척하라고 준 것은 아니지만, 그런 극단의 선택까지도 할수 있는 주체성을 허용하셨습니다)

(2) 위험한 자유를 품는 사랑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 자주 등장합니다. 찾아와서 말을 거시고, 자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알려주셨지만, 그들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나타나서 막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은 것을 두고 분해할때도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라고 알려주셨지만, 그가 들에서 아벨을 쳐죽이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그들이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형과 아버지를 속일 때에도(그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을게 분명하지만) 그들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편을 들며 구원으로 인도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현대 신학에 와서는 악을 허용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선하다는 개념을 용인하기 힘든 이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1,2차세계대전의 참혹함,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을 보며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악을 허용하여 우리가 고통당하도록 하는 하나님은 과연 선하신가?하는 의문) 하지만,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악을 택하고 행한 것은 사람이고, 그 악에게 고통당하는 순간에 누구보다 함께하시고 가슴 아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점을 간과할수록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허용하시며 기대하시는 것은 온전한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싫어도 까라면 까!'라는 식의 복종이 아니라 '사랑해서 구지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순종'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하나님의 통치이지만, 그 통치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통해 이루시려는 그분의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만의 고유한 권한이라 할수 있는 자유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자유는 소중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타인을 위협할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경험하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거함으로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위험한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다시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다시 그 자유를 우리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이 세상을 사랑하기를 기대하시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대로 음모론 세력이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일을 염려하는 것은 의미있으면서도 의미가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가지고 있고, 바른 선택, 온전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영의 유혹과 거짓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선택을 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된 본성(sinful nature)은 그럴수 없는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지만, 그럴 때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얻는 구원을 소망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좀 더 온전한 의미로 하나님과의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주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로 온전히 나의 행복과 세상의 행복이 어우러지는 천국, 하나님 나라를 만날수 있을 것입니다. 

salvation mountain @ 캘리포니아

3-3.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

  마지막으로 저자를 비롯한 음모론자들이 염려하는 것은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일루미나티, 뉴 에이지, 장미 십자회 같은 음모세력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노예화 하거나 통제하려고 해서 얻는 그들의 유익이 우리의 위협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일은 안타깝게도 음모세력의 진위 여부와 상관 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함몰된 독재자(혹은 그런류의 독선적인 사람)가 한 나라/기업/가정/교회를 장악할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염려를 뿌리칠 수 있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앞서 말한 우리의 자유, 소중한 자유가 이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개선하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저항을 선택하고 개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한번 저항한다고 바뀌지는 않지만, 분명히 이 세상은 그런 수많은 저항들과 개선의 노력들을 통해서 개선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처음에 완벽한 창조를 한 곳에서도 일어난 일이었고, 예수님이 재림하실때까지 각종 다양한 모습으로 반복될 일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악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세상,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세상을 살도록 우리의 자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음모론에 대한 염려를 상쇄할수 있는 다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 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함몰되어 사람들을 수단화 하는 이들이나,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모두 자신의 안전과 행복이라는 가치가 그 기저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음모론자들의 주장대로 보더라도 프리메이슨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는 자신들이 보기에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악한 존재로 의심할만한 신천지나 JMS, 통일교 같은 사이비 이단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들 나름대로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만족보다는 새로올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제시합니다. (결코 인류 보편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뜻과 다릅니다) 그 안에 거할수록 가정과 개인의 삶이 망가지는데도 그 망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도피적으로 일상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혼란과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현실을 회피하는 일부 기독교의 모습과도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3-3-1.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본능

  비록 이들의 행태가 건전하다고 보기 힘들지만,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바램 자체는 사실 모든 인류의 것입니다.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본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본래 하나님이 주셨던 낙원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안에서 온전함(샬롬)을 누릴수 있음을 바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온전한 생명(영생), 풍요로운 삶(성공, 건강, 타인과의 관계, 자존감)을 원하는 어리석은 현실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1) 철학, 이데올로기, 종교와 기독교

  ACTS(아세아 연합 신학대학교)의 안점식 교수는 이런 점을 주목하며 "종교와 문화는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이라고 합니다. 인생 가운데 만나는 고통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 희노애락,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설명하고 답을 찾다보니 종교가 나오고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안교수는 그런 관점에서 '삶의 문제에 대해 철학은 설명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변화시키려고 하고(행동적인 측면이 강조됨), 종교는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려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세계관으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세계관이 가장 중심에 있고, 그 세계관에서 기인한 가치체계가 형성되어서 사람의 사고를 결정하고, 그 가치체계에 따라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철학과 이데올로기, 종교는 모두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지만 결국 세계관의 틀로 그 진리됨의 가치를 비교할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안교수는 그런면에서 고등종교들은 나름의 깊이 있는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나름의 구원을 제시하지만, 기독교의 세계관의 독특함, 탁월함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 흰두교, 불교 같은 종교는 의식을 강조하고, 유대교, 이슬람, 유교는 질서를 강조하는데, 오직 기독교만이 관계를 강조 합니다.
> 흰두교는 자신을 신이라고 하고, 불교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하는데, 기독교는 성령이 '나'와 함께 합니다(현실의 나를 고스란히 인정함).
> 기독교는 타 종교와 다르게 고통을 부정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며,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그 외의 죄)를 하나님과의 질서를 깨뜨린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깨뜨린 것으로 바라봅니다. 
> 성경은 질서를 정하는 계약이 아니라 관계를 설정하는 언약을 말합니다.
> 기독교는 주인이 누구인가가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만 되고, 주인 안될수는 없습니다. 
> 유일신 종교(유대교, 이슬람, 기타 타종교)는 성육신 모델을 가지고 있는데,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성육신은 대속을 위해 오셨다는 점에 있어서 독특합니다.
> 모든 종교가 자신의 체계(세계관)을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그 가르침이 아니라 십자가가 중심에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산상수훈만 있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비교종교학 강의 내용 중)

(2) 우리의 모습(현실 기독교)와 진리의 가능성

  기독교의 이런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모습, 기독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교수의 평가에 따르면 19세기는 행동양식을 전달하는데 치중하는 선교를 했다고 합니다. 병원과 학교를 짓고 자기와 유사한 교회를 짓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20세기에 대해서는 가치체계, 교리를 전하는 선교를 했다고 보는데, 이런 모습이 '예수님이 구원이라고는 알면서도 삶에서는 변화가 없는 신자'를 양산하는 원인으로 진단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는 씁쓸한 단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 예로,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예배 자제 권고에 대해 종교탄압을 염려하는 분들을 보면, 표면적 행동양식을 기준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새물결플러스 & 아카데미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기독교 진리의 탁월함"입니다. 음모론 세력이든지, 세상 정치가든지 자신의 행복을 바라며, 더 나은 세상,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이 안전한 세상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눌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지,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각자가 설명하고 정말 그러한가 서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신천지처럼 속이고 관계로 유혹하는 왜곡된 방법이 아니라, 빛가운데 행하는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고, 우리가 알고 믿는 기독교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초대하며 함께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자는 것입니다. 그럴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 현실, 하나님의 세계

  지금까지는 음모론자들을 비롯해서 세상이 만들려는 새로운 세상, 신세계 질서는 현재 느끼는 한계, 나에게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을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소망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그 이면에서 놓쳐버린 것들을 주목할까 합니다. 바로 현실이 하나님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온 만물이 타락하였고, 회복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롬 8:18-19).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고,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 속되다고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 14:14, 17)  무엇을 하고 안하고, 무엇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이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행동 하나에 기초하는 (A를 하면 B가 되는 기계적인 결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는 새상을 개선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주체성, 자유로 지속할 일이지만, 그것이 복음과는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있는 죄와 악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억제하고 개선하기 위해 세상 법 조항을 바꾸고, 교단 법을 제정하는 일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고 우리가 계속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뒤에도 여전히 새로운 형태로 우리의 죄와 악이 드러날 것입니다. 믿는 자의 성화처럼 이 세상 역시 온전함을 다 회복하는 일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앞서 말한대로) '기독교는 고통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 입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 복음의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인이라 여김받으며 샬롬을 누리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유진 피터슨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라는 책에서 제러드 맨리 홉킨스의 소네트(14행 시 As kingsfishers catch fire)의 마지막 행을 기독교적 삶의 모든 세세한 면모를 들추어 내기 위한 은유적 이미지로 사용해서 영성을 설명 합니다.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영성신학이란 '우리 삶을 사려깊게 그리고 순종 가운데 일궈가는 것', ' 우리 삶이, 성부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로서의 삶, 성자 하나님을 따라 걷는 희생 제사로서의 삶, 성령 하나님의 공동체를 포옹하는, 또 그 공동체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사랑으로서의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창조와 역사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가 놀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뛰어난 솜씨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놀이한다는 것은 제목에 나온 play를 번역한 것입니다. 다르게 번역하자면 활동하신다 정도로 해도 무난할 듯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현실을 긍정하고 즐겁게 바라보도록 놀이라 번역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를 잘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놀이는 창조때부터 인간과 함께 하도록 계획되었고, 역사 속에서 함께 했으며, 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4) 기독교적 삶, 전치사적 참여

  이런 현실에 대한 긍정의 진정한 의미는 '긍정의 힘' 같은 낙관론과 자기 암시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긍정적인 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할수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어떤 절망적이고 위험해보이고 의심스러운 상황도 예수 그리스도를 막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 일은 우리와 무관하게 저절로 일어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 받고 성령안에서 새로워진 사람이 자신의 자유로 선택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유진 피터슨의 표현을 조금 더 소개하는 것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며, 소위 '더 깊은 삶'을 계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적 삶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삶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다. 또한 우리는 그 행위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몇몇 전치사들을 통해 여기에 포함될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마 1:2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 2:20),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롬 8:31). 이 전치사들 - 함께(with), 안에(in), 위하여(for)-은 모두 연결짓고 관계짓는 강력한 단어들이지만, 그 어느것도 우리를 주어나 서술어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전치사구의 끄트머리 단어일 뿐이다. 
.....  우리가 기독교적 삶의 행위를 하도록 초대받고 명령 받은 것은 전치사적 참여(prepositional participation)다.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지어 주는, 또 하나님이 우리 안과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활동과 연결지어 주는 그 전치사들-함께, 안에, 위하는-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신일에 우리가 참여하는 방식과 수단의 문제일 뿐이다
(현실, 하나님의 세계, p.578)

 

   이쯤되면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음모세력들은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모든 좋은 것, 우리의 평범한 삶을 파괴할 것 같은 그들의 악함도 하나님 아래에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것 같지만, 실은 여전히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혹은 우리의 자유가 위험스럽지만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우리에게는 박해가 될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바로 우리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책

4. 결론: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

  지금까지, 이 책'신세계 질서의 비밀'에서 저자가 말하는 음모론의 위협과 그 한계를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4-1. 이 책이 말하는 대처 방법, 바르게 읽기

  저자는 프리메이슨이과 일련의 비밀세력이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있는 상황을 알리는 것이 두려움을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런 그가 제안하는 내용은 3가지 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평안을 받으라

 저자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다 박해 받는 삶은 예수님이 먼저 가신 길이고, 제자들에게도 핍박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평안을 받으라고 하셨으니, 어떤 상황이든지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자고 합니다.(요 14:27, 16:33)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강조하는 것은 흠 잡을 부분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님이 평안의 수여자시고, 실제로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지만 조심스럽게 저자가 말하는 평안이 앞서서 지적했던 세상과의 분리되는 모습으로 반영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평안, 제자들에게 주신 평안은 이 세상과 분리된 평안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겠다는 말과 이어지는 단락에서 등장하는 평안(요14:26)이고, 제자들이 떠나가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알려주면서 제자들이 환난 속에서도 누리는 평안입니다(요16:32).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 안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은 이 세상에 현존하며, 나를 사랑하시는 줄을 알고 믿음으로 누리는 평안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고통과 환난을 벗어나려고 자신을 세상에서 분리하고 없애는 방식을 택하는데, 그러지 말고 치열한 세상 안에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은혜를 알고 샬롬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둘째, 어디로 가든지 주님을 따르라

 저자는 일루미나티는 사람들을 극도의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거나 갖가지 죄악으로 타락시켜 자신들이 내놓은 대안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들 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정부와 기업이 시키는대로 하다가 뉴에이지에 물들고 세계화에 찬성하며 생체칩을 심게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WCC가 종교통합을 위한 단체이니 경계해야 하고, 자유주의 신학교에 가면 안됩니다.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에 물든 교회는 예수님이 아닌 자신들이 만든 방법으로 성장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삶은 결론적으로는 성경말씀에 중심을 둔 참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권면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긍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려합니다. 긍정하는 면은 말씀에 중심을 두고 참 믿음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 어디로 가든지 주님을 따르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실제로 누군가 의도하는 음모 여부에 상관없이, 말씀에 중심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건강하고 바람직한 신앙이며 기독교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부분은 그 기준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이러니하게도 전광훈 목사나 이단 사이비도 자기들이 성경말씀에 중심을 둔 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 말씀에 중심을 둔 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헷갈려 합니다.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말씀을 바로 알수 있는지가 혼돈스럽습니다. 게다가 신천지가 (복음방) 성경공부로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나온 주요 대책 중에 교회 밖 성경공부를 금지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신천지의 간계를 막는 긴급한 대책은 될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도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저 응급조치일 뿐, 이단을 회심케 하지도 못하고, 성도들이 복음으로 살수 있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거나 신학을 공부하는데 꼭 목회자가 되거나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과감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삶으로 순종하는데 그 뜻을 두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 순간 회심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교회 생활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결국은 이 책의 저자가 말한 어디로 가든지 주님을 따르라는 말이 맞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고, 공부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다만,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히 연합해서 숫자를 불리고 힘을 모은다는 의미하는 게 전혀 아닙니다. 내가 보고 깨닫는 바를 나누고, 내가 전혀 보지 못하던 것을 듣게 해줄 다른 사람이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된 것 같이, 목사와 장로가 함께 해야 하고,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당연히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방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 다름을 경계로 삶고 벽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요 13:34-3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서로를 받아들이며(롬 15:7) 예수 그리스도가 선명히 드러나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셋째, 삶을 통해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 것인지 정하라

  저자는 은퇴하는 목수에게 사장이 마지막으로 집을 지으라고 했는데, 그 집을 목수의 퇴직 선물로 주었다는 예화를 들며, 결과를 알수 없지만, 주어진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가 유익을 얻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자취, 그 삶의 내용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을 유산으로 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자가 권면하는 바는 '삶과 신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불(심판)을 통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기초가 되시니, 그 위에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지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 권면은 모든 사람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것인지 성찰하게 해주는 것으로 그 의미가 있고 유익하다고 동의가 됩니다. 이 권면을 내게 적용하니, 더욱더 음모론에 심취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집중하고 나 자신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가족에게, 이웃에게, 친구에게, 교우들에게 사랑과 섬김을 행해야겠다 싶습니다.

 

4-2. 그리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 사랑, 사랑

  마지막으로 강조할 우리의 삶의 모습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잘 보면,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아같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온 인격, 온 생애를 통해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책의 저자도 이런 부분을 많이 강조했고, 많은 교회들이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 안에서 참된 복음, 샬롬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사랑받는 나를 사랑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삶에 얼룩진 죄와 악을 볼때, 애써 부인하면서도 괴롭습니다. 남을 탓하거나 자신을 자책하기를 자명종시계처럼 반복하며 신경증과 우울증 사이를 오가지만, 우리의 구원은 우리 안에 있는 거룩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나는 감히 나를 사랑할수 없더라도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며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며 그 안에서 온전한 샬롬을 누리기 바랍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다시 하나님께로,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완악함을 마주하게 될때 우리에게는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던 것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아주고 사랑하자는 말입니다. 내 기준에 어리석어 보이고, 틀려 보여도 순수 악이라 투사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선한 의도를 보는 것이 사랑의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정치적 견해나 종교적 입장이 달라도 각자의 삶의 지평에서 결핍된 것을 채우고 개선하려는 굶주림을 보면 분노와 비난을 그치고 내 안에 있는 상한 마음이 공명하며 긍휼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이 사랑은 구지 순서를 두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 사랑 받음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그 반복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장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 없이, 나를 사랑함 없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기형적으로 황폐함을 가져옵니다. 이 순서를 좀 더 현실적으로 환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게도 나 아닌 타인에게서 받습니다. 부모에게서 받기도 하고, 친구를 통해서 받기도 하지만, 나보다 먼저 그 사랑을 받은 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받습니다. 조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되고 사랑받는 뒤에 그 사랑의 주체에게 사랑을 하며 사랑을 배웁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 나 자신을 사랑, 이웃 사랑은 서로에게로 끊임 없이 흘러가며 풍성해집니다. 이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하나됨에서 볼수 있는 상호 내재성(co-inherence)과 다르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이해할수 있는 신비이기도 합니다. 

출처: 구글검색

  신세계 질서의 비밀 같은 음모론이나 카톡을 통해 전달받는 선지자적인 진단을 마주하면서 생겨나는 두려움과 염려들은 자연스레 우리를 위축시키고 경계를 짓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다스리시기를 원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고, 주실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그 사랑을 받은 나와 내 주변의 이웃을 사랑하며 샬롬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샬롬.